• "이판사판요? 2번 판을 4번이 판갈이 하는거죠"
        2006년 05월 25일 06: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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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 3월, 독문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 준비를 하던 서생이 있었다. 어느날 그는 TV에서 용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뉴스를 보게 된다. 순간 그의 뇌리에는 고3 시절 친구 집에 놀러갔다 나오면서 마주쳤던 평택의 밤거리 풍경이 떠올랐다. 술 취한 미군들이 ‘양색시’를 끼고 거리를 활보하던. 평택에는 이미 2곳의 미군기지가 있던 터였다.

    서생, 성명서를 내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보자고 마음 먹었다. 그 전까지 그는 데모꾼도 운동가도 아니었다. <말>지를 읽고 <한겨레신문>의 창간 주주가 되고 하는 정도의 ‘양심적’ 시민이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뜻을 같이하는 6명을 규합해 성명서를 냈다.

       
     
     

    날짜도 기억한다. 90년 5월 20일. ‘용산기지 평택이전을 절대 반대하는 시민의 모임’ 이름으로 낸 ‘평택시민들에게 드립니다’는 성명서. 그가 운동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 때 그는 예감하지 못했다. 16년 뒤 자신이 진보정당의 경기지사 후보가 될 거라고는.

    김용한 후보는 경기도 안성에서 나서 평택고등학교를 나왔다. 평택에서 선거도 여러번 치렀다. 92년 지방선거부터 이번 선거 전까지 직접 출마한 것만 네 차례다. 평택에서는 이미 알려질만큼 알려진 인사다. 그러나 경기도 전체적으로는 아직 생소하다.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TV토론 본 사람들은 넘어온다"

    인지도를 높이는 데 TV토론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그는 몇 차례 TV토론을 거치면서 인지도와 호감도가 많이 뛰어올랐다고 자랑했다. 그는 운동원들에게도 유권자를 만날 때 꼭 TV토론을 홍보하라고 당부한다. 지나가면서 힐끗 보는 거리 유세와는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밤 늦게 방송돼서 많은 사람들이 보지는 못하지만 일단 TV토론을 본 사람들은 ‘넘어온다’고 자신했다.

    파주 인근의 어느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새벽 2시까지 한 집에 모여 TV토론을 같이 봤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TV토론 끝나기도 전에 문자를 보냈더라구요. 제가 화면에 나오자마자 막 박수치고 그랬대요. 그런 곳에서는 몰표 나오지 않겠어요?" 미군기지 문제로 몇 차례 들른 지역이었다. 경기북부는 민주노동당의 취약지역이다. 지역위원회도 약하고 기초단체장 후보를 낸 곳도 양주밖에 없다. 그랬던 곳들이 그의 전문분야인 미군기지 문제를 고리로 조금씩 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2판4판이다"

    김 후보는 얼마 전 신조어를 하나 만들었다. 이른바 ‘이판사판론’이다. "이번 선거는 2번 판이다. 1번, 3번은 보이지도 않는다. 4번이 판갈이하겠다"는 얘기란다. 최근 민주노동당이 내놓고 있는 진보개혁세력의 대표선수 교체론과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이런 논리가 바닥에서 조금씩 먹혀들고 있다고 말한다. 열린우리당에 던지는 표는 ‘사표’라는 역발상에 유권자들이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지금 열린우리당이 민주노동당보다 지지율이 높게 나오고 있지만 두 당 지지율 다 합해도 한나라당 지지율 못 따라가요. 그럼 판단을 해야죠. 누구에게 표를 줄 건가. 어디로 가는 표가 사표인가. 제가 TV토론에서 그런 얘길 했어요. 97년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가 얻은 400만표는 사표였다. 그러나 권영길 후보가 얻은 96만표는 지금 시퍼렇게 살아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열린우리당으로 가는 표는 모두 사표다. 선거 끝나면 열린우리당은 급속도로 해체의 길을 걸을 것이다."

    ‘이판’을 ‘사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이 지금보다 실력을 훨씬 더 키워야 한다. 김 후보는 일상적인 지역 활동 강화를 주문했다.

    "정당에게는 지역이 현장이죠"

    "제가 이 지역에서 민주노동당 활동 6년째인데, 당원 중 상당수가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시민운동 등에 몸담았던 분들이예요. 그 분들은 민주노동당을 운동단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요. 예를 들어 분회도 현장 분회와 지역 분회로 구분하죠. 사업장 같은 곳을 현장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저는 좀 다르게 구분합니다. 사업장은 노동현장이고 지역은 지역현장이예요. 지역도 정치가 이뤄지는 현장이란 얘기죠.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약점이 지역활동이 취약하다는 거에요.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지역의 중요성을 많이들 깨달았을 겁니다. 지역활동 열심히 하고 지역 인맥 관리 잘 하면 세세한 공약 남들이 안 알려줘도 다 알게 되요."

    "김문수는 박쥐, 민주노동당이 떠오르면 동굴로 사라질 것"

    지방선거 전체 판세와 마찬가지로 경기지사 선거 역시 한나라당이 독주하고 있다. 삼성전자 CEO, 정통부장관의 화려한 경력을 가진 진대제 열린우리당 후보는 맥을 못추고 있다. 김 후보의 지지율도 현재 10% 선을 약간 밑도는 것으로 나온다. 그의 목표는 여전히 당선이지만, 캠프 관계자들은 10%-15% 득표면 성공적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선두를 달리고 있는 김문수 한나라당 후보를 ‘생계형 변절자’라고 했다. ‘박쥐’라는 표현도 썼다. 재벌과 서민 사이를 오가다 결국 재벌에게 줄을 섰다는 이유다. "민주노동당이 찬란히 떠오르면 박쥐들은 동굴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어요. 지금이야 민주노동당에 그만한 힘이 없으니까 김문수 후보 같은 사람이 판치는 거죠."

    김문수 후보의 핵심 공약인 ‘수도권 정비법 폐지’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논평했다.

    "수도권정비법 있어도 공장 짓고 학교 짓고 다 해요. 경기 북부도 군사보호구역 문제 때문에 개발이 안 되고 있는 거지 수도권정비법 때문이 아니예요. 서민들 입장에서는 불편할 게 하나도 없어요. 재벌들, 땅투기하는 사람들이 불편하겠죠.

    수도권정비법 폐지되면 대기업은 마음껏 땅 사들이고 기업도시니 뭐니 해서 온갖 땅투기가 일어날 거예요. 땅 값이 뛰면 원래 살던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져요. 일자리가 늘어날거라고 하는데 그것도 비정규직이 대부분일 거고요. 이런 사실을 유권자들도 알아요. 수도권정비법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남는 예산 보도블럭 깔지 말고 초등학교 무료 급식 확대해야죠"

    그의 공약은 김문수 후보의 공약의 대척점에 서 있다. ‘90%의 도민이 행복한 도정’, 그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다. "10%의 부자는 도지사가 안 도와줘도 자손만대 누릴 부를 쌓고 있어요. 의사에게 환자가 필요하듯이 90%의 서민에게는 도지사가 필요합니다."

       
     
     

    그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원칙은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멀쩡한 도로 파헤치고 재개발 한다고 건물 허물고 짓고를 반복하는 개발주의적 투자가 아니라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의료문제를 예로 들면 최고급 민간병원 짓고 비싼 의료장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소박하나마 환자들이 돈 덜 내고 치료받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남는 예산을 보도블럭 까는데 쓰지 말고 초등학생들 무료 급식을 확대하는 데 써야한다는 거죠."

    "평택 미군기지 문제는 내지인 외지인 가를 문제 아니다"

    현재 경기도 지역의 최대 현안은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다. 이 문제는 그의 전문 분야이기도 하다. 지역 유권자들의 여론은 어떤지 물어봤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요. 기자들도 처음 듣는 얘기들이 많다고 할 정도니까요. TV토론 몇 번 해서 경기도민 생각 다 바꾸기는 힘들겠죠. 그래도 김용한이라는 전문가 입에서 저런 얘기 나오는 거 보면 뭔가 문제가 있기는 있는가 보다, 이런 생각들은 하시는 것 같아요."

    평택 문제는 여전히 교착상태다. 정부는 현지 주민들과, 토지보상 문제에 한해서는 얘기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대추리 주민들만 당사자라고 하면, 그래서 당사자하고만 얘기할 수 있다고 하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어요. 그럼 반대편 직접 당사자는 누구냐. 미군이다. 노무현 대통령, 국방부장관, 조선일보가 미군기지 쓸 거냐. 당신들도 직접 당사자가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왜 나서느냐. 미군이 직접 나서서 이 땅을 얼마에 어떻게 쓸 건지, 임대는 안 되는지 밝혀라, 이렇게 말이죠. 이 주장을 정부가 수용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평택 문제는 외지인 내지인 이렇게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저 지금 잘 나가고 있잖아요. 떠오르는 정당에서 도지사 후보로도 나오고요"

    인터뷰 내내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얘기를 하다보면 상대방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지독하게 낙관적인 사람이다.

       
     
     

    "96년 총선에 송탄 지역에서 무소속 후보로 나왔어요. 그 전에는 평택에서 나왔었는데 지역을 옮겼죠. 제가 송탄 미군 기지 앞에서 데모하니까 평택 사는 놈이 송탄와서 데모한다고, 불순세력이라고, 송탄 발전하는 게 샘나서 평택놈이 와서 ‘지랄’하는 거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송탄으로 이사를 해버렸어요. 맨땅에 헤딩한 거죠. 인맥도 없고 학맥도 없는 곳인데 선거를 하겠다는 사람이 말이예요. 또라이죠, 어찌보면." 

    90년 돈키호테처럼 성명서를 만들어 낸 이후의 인생행로에 만족하느냐고 물었다. 천진한 웃음과 함께 "행복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저 지금 잘 나가고 있잖아요. 떠오르는 정당에서 도지사 후보로도 나왔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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