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패망과 국공 양당의 대응
[국공내전-2] 종전 후 주도권 갈등
    2018년 11월 29일 10: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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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국공내전-1] 장제스와 마오쩌둥

얄타회담과 소련의 개입

1944년 말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 연합국에게 남은 적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독일과 달리 전쟁을 지속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1억 총폭탄’을 부르짖으며 미국과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필리핀을 수복한 맥아더는 만주에 주둔중인 일본군을 섬멸시키기 위해 소련군 60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예상하였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연합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을 중국 전구에 참여시키기로 결심했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회담을 하고 있는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앞줄 왼쪽부터)

1945년 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영국 수상 처칠이 소련의 크림반도 남쪽 얄타에 도착했다. 그들은 스탈린과 함께 중국 전구에 소련의 대일전 참여 문제를 의논했다. 소련은 참전하는 대신에 여러 현실적인 특권을 요구했다. “1904년 일본에게 침탈 당하기 전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를 회복하고 만주에서의 특권을 소련에게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쿠릴열도와 남부 사할린의 반환, 부동항인 뤼순항과 다롄항에 소련군을 주둔시킬 것, 중동철도와 남만주철도 획득 및 외몽골을 중국 영토로 인정하지 않는 것 등이었다. 스탈린은 “그런 조건도 없으면 소련 인민들에게 대일 전쟁 참전을 납득시키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영토 주권과 관련된 내용들이었지만 장제스는 어떤 내용도 알지 못했으며 당연히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수 없었다.

루즈벨트가 장제스를 설득하기로 하였는데 그는 스탈린에게 “소련이 만주에서의 중국 주권을 존중하고, 장제스가 중국의 유일한 지도자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또 “중국과 관련 조약을 체결할 것, 독일 패전 이후 3개월 내로 참전할 것”을 요구했는데 스탈린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날 장제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우리 민족은 크고 자원이 많다. 오늘 우리의 손으로 수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후손들이 영토, 행정 주권을 반드시 회복할 것으로 믿는다.” 그는 간접적으로 얄타회담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벌어질지 모르는 내전에서 소련의 개입을 막은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그는 처남인 쑹즈원을 모스크바로 보내어 스탈린과 협정을 체결했다.

스탈린은 얄타회담의 결과를 확인하는 대신 “중국과 일본 침략에 반대하는 30년 우호동맹 조약을 맺고, 장제스를 중국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그의 적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소련군은 일본군이 투항한 뒤 2-3주 내에 철수를 시작하여 2-3개월 내에 철수를 완료하겠다.”고 보증했다. 회담은 시일을 끌었지만 8월 14일 마침내 조약이 체결되었다.

8월 6일과 8월 7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스탈린은 그것을 회담의 지렛대로 사용했다. 쑹즈원에게 “동맹조약이 신속히 체결되지 않으면 장차 만주가 중국 공산당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라고 위협했다.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논의된 조건을 약간 완화해주고 “장제스를 수반으로 하는 중국 정부에 도의적, 물질적, 군사적 지원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결국 소련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문서 하나로 참전의 대가를 톡톡히 챙긴 꼴이 되었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에게는 믿었던 사회주의 조국 소련에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다. 중국 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를 때에는 온갖 잘못된 지도와 간섭으로 골탕을 먹었다. 천두슈와 취추바이, 리리싼 같은 당 지도자들은 기회주의와 모험주의라는 오명을 쓰고 지도부에서 탄핵을 당했다. 일제와 장제스의 탄압 속에서 간신히 양성한 당원들과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 병사들은 무모한 봉기를 일으켰다가 헛되이 피를 흘렸다. 모두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도에 따른 것이었다. 왕밍과 28인의 볼세비키는 당권을 장악하자 마오쩌둥 등이 어렵게 건설한 해방구를 접수하여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코민테른이 파견한 리더는 중앙 소비에트 홍군의 대부분을 무모한 전략전술로 소모시켜 버렸다. 옌안에서 마오쩌둥이 어렵게 지도력을 세우자 다시 왕밍을 보내어 흔들기도 하였다.

소련과 스탈린은 수만리 밖 모스크바에 앉아 감 내놔라, 배 내놔라 간섭만 하였지 수류탄 한발, 총 한 자루 보태준 일이 없었다. 그런데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대신에 장제스가 중국의 유일한 지도자이며 물질적, 군사적 지도를 한다니 중국 공산당원들의 심정이 “복잡한 정도”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날 소련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만주에 진격했다. 이틀 뒤에는 외몽골에서 증파되어온 돌격부대가 합류하여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뒤에도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동안의 체험을 통해 중국의 문제는 자신들이 풀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45년 봄에 이미 “연합정부를 논한다.”는 정치보고를 통해 종전 이후의 앞날에 대비하였다. “중국은 각당 각파, 무당·무파의 대표 인물들이 일치단결하여 민주적 임시 연합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전 중국의 항일 역량들을 통일, 동원하여 유력한 동맹국들과 협력하여 일본 침략자들을 패배시켜야 한다. 그런 뒤 국민 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연합 성격의 정식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해방 후 전국 인민들을 영도하여 중국이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이고 통일된 부강한 새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의 글은 충칭에서 소책자로 3만부를 발행하였다. 하지만 장제스 시종실(비서실) 주임인 천부레이(陳布雷)는 이 글을 읽고 짧게 한마디 했다. “내전이다!” 그가 보기에 마오쩌둥의 글은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으며 국민당이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공산당과는 전쟁만이 남은 해결 수단이었다. 하지만 학생, 언론인과 사회 각계 인사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미지수였다. 외국기자 한 사람이 이렇게 논평하였다. “모든 것이 드러났다. 만약 내전이 폭발한다면 공산당은 혼자 싸워야 할 것이다.”

마오쩌둥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뒤 내전이 폭발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대항하기에 아직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국제 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미국의 물질적, 군사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 시간을 벌어야 했으며 내전에 반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것을 내다본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역할

저우언라이는 원래 마오쩌둥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 초기부터 언제나 지도적 위치에 있었으며 쌓아온 경력도 후난성 시골 출신인 마오와 비교할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1898년 장쑤성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났다. 그는 텐진의 난카이대학에서 공부할 때 학생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5.4운동을 이끌었다. 1920년에는 근공검학 유학생단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갔다. 다음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사회주의 청년단 유럽지부 서기를 맡았다. 그는 유럽에서 중국 국민당 지부 주비위원의 성원이었으며 귀국해서는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과 국민혁명군 1군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광둥지역 위원장과 군사부장을 맡았다. 그의 나이 26세때의 일이었다.

1927년에는 당 중앙위원,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어 지도부로 활약하였다. 그해 8월 1일 허룽(賀龍), 예팅(葉廷), 쭈더(朱德), 류보청(劉伯承) 등과 함께 중국 최초의 군사폭동인 난창기의를 일으켜 전적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군부의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다. 1928년에는 다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군사위 서기를 맡았으며 1931년 장시성의 소비에트로 가서 중앙국 서기, 공농 홍군 총정치위원,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마오쩌둥이 경험주의, 부농주의, 우경기회주의자로 몰려 후보 중앙위원에서 배제당하고 명목상의 소비에트 주석을 맡고 있을 때였다.

구이저우성 쭌이에서 왕밍과 리더를 탄핵할 때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지도부의 일원으로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리더와 왕밍을 군사지휘부에서 함께 끌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오쩌둥의 주장을 뒷받침했으며 지휘부에는 자신과 마오, 그리고 장원텐(張聞天)이 포진했다. 그는 실무에 두루 밝았으며 누구에게나 호감을 갖게 하는 부드러움과 세련된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했으며 외교와 행정, 비밀공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서안사변 때 그는 막후에서 장쉐량, 국민당 쪽과 교섭을 도맡았으며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후에는 충칭에 파견되어 국민당과 합작에 따르는 복잡한 문제들을 처리하였다.

1944년 7월, 미국은 옌안에 군사조사단을 파견했다. 충칭의 저우언라이가 미국 대사관 관원 및 미국 쪽 인사들과 교류하며 설득한 것이 효과를 냈던 것이다. 9월에는 루즈벨트가 헐리를 특사로 파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중재를 진행하게 하였다. 공산당과 저우언라이의 이런 노력은 미국을 중재자로 만들어 내었다. 미국은 국민정부와 공산당이 합심하여 일본과 싸우게 되기를 원했다. 그로부터 일년간 헐리의 중재 속에 국공 양당은 끝나지 않는 입씨름을 벌였다. 국민당은 공산당이 쑨원의 삼민주의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국민당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공산당을 해체하라는 주장이었다. 공산당은 장제스에게 연합정부를 주장했다. 둘다 회담을 통한 협정의 체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장제스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척해야 하였고 마오쩌둥은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1946년 본격적인 내전이 벌어질 때까지 대화국면이 만들어져 중국 공산당은 최소한의 준비할 시간을 벌수 있게 되었다.

중국 항전의 승리와 국공 군대의 진격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중국에 있던 일본군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8년간의 전쟁을 치른 뒤 중국은 마침내 승전국가가 되었다. 중국은 명목상 5대 승전국이 되었으며 국제연합(UN( 창설국이자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회 자리를 확보했다. 장제스의 위망은 크게 높아졌다.

일본이 항복하던 날, 장제스는 충칭 중앙방송국에서 방송연설을 발표했다. “오늘 우리의 승리는 정의로운 전쟁은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우리 중국은 암흑과 절망의 시기 속에서 팔년간 분투했으며 마침내 오늘 우리의 신념이 실현되었다. 우리는 항전 이래의 전국 선열들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며 함께 싸웠던 세계의 친구들에 대하여도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숙제가 남아 있었다. 일본 점령지역에 남아 곳곳에 해방구를 건설하고 있던 공산당과의 투쟁이었다.

1945년 8월 당시 공산당 해방구는 18곳, 병력은 정규군 100만명, 민병 200만명에 이르렀다.(별표 중공중앙 소재지, 분홍색 공산당 항일근거지, 노란색 일본 점령지)

중국 공산당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여 8월 8일 곧바로 회의를 소집하였다. 당과 정부, 군대의 책임자를 모두 옌안의 양자령 강당 안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일본 침략자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공산당이 지도하는 무장세력이 광범위한 세력 확대를 해야 하며 소련의 대일본 작전에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다.

8월 9일, 중국 18집단군 총사령인 쭈더는 휘하 부대에게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모든 도시와 교통의 중심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것이며 무기를 접수하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린비아오가 지휘하는 10만명의 병력이 베이핑(北平: 베이징의 옛이름)에서 선양에 이르는 철도를 따라 만주로 진격했다.

8월 11일 마오쩌둥은 전문 한 통을 기초하여 각 전략지역으로 발송했다. “먼저 적과 괴뢰(괴뢰라고 하면 일제가 세운 만주국이나 왕징웨이 등이 일제의 협력을 받아 난징에 세운 괴뢰정권 등을 말한다.)가 우리에게 투항하도록 하라. 투항하지 않는 자는 공격하라. 우리는 맹렬하게 해방구를 확대해야 한다. 크고 작은 도시를 점령하고 교통로도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또 “국민당이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다. 우리 당은 병력이동을 준비해야 하며 내전에 대비해야 한다. 강남, 하남, 호북, 산서, 하북 등은 적이 투항하는 속도가 매우 빠를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이런 적극적인 방침에 다라 일본군이 항복한 뒤 보름간 공산당 근거지는 116개 현에서 175개 현으로 늘어났다.

전쟁이 끝난 것에 모택동도 흥분하였지만 그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점령지를 확대하라고 명령한 뒤 한편으로는 “평화건설의 시기가 이미 닥쳐왔다. 중국 공산당은 나라 안의 단결을 튼튼히 하고, 국내 평화를 보증해야 하며, 민주를 실현하고 민생을 개선해야 한다는 임무를 잘 알고 있다. 평화와 민주, 단결의 기초 위에서 전국의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고 대내외에 선언했다. 한편으로는 세력 확장을 위해 점령지를 확대하면서 평화와 통일의 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장제스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국민정부군은 여러 전선과 서부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일본군 점령지에 국민정부군 병력이 없어 여러모로 불리하였다. 장제스는 마오쩌둥이 명령한 같은 날 세 개의 명령을 선포했다.

전선에 있는 국민당 각 부대에게 “적의 점령지에 진주하고 무기와 재물을 접수 관리하라. 공산당 무장세력이 방해할 때는 토벌하는 등 단호하게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점령지구 괴뢰군대에게는 “주둔지에서 치안을 유지하며 새출발하여 속죄할 기회로 삼고, 장위원장의 명령 없이 주둔지를 떠날 수 없다.”고 명령하였다. 또 일본군과 괴뢰군에게 “비 국민정부 군대에게 항복하지 말고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팔로군(후에 18집단군으로 개칭되었으나 보통 팔로군으로 부른다.) 총사령 쭈더와 부총사령 펑더화이에게도 명령했다. “주둔지에서 명령을 기다리며 각 전구 사령장관의 명령에 따를 것, 적군의 무장해제 및 괴뢰군대 처리 등은 명령에 따라 실시하고 독단적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마오쩌둥의 명령과 장제스의 명령은 서로 완전히 충돌하였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합법성이 걸린 문제였으며 (공산당의 방침은) 장제스에게 국공합작에서 확인했던 국민정부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쭈더는 장제스의 행위가 “일본 침략자와 매국노에게 유리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중국주재 일본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레이지(岡村寧次)에게 중공 대표에게 항복하라고 직접 명령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공산당이 일본군과 괴뢰군의 투항을 관리하는 것에 대하여 “당돌하고 비합법적인 행위”라고 일축했다.

8월 13일, 쭈더와 펑더화이는 장제스에게 회신했다. 비록 두 사람 명의이기는 했지만 마오쩌둥이 기초한 것이 분명하였다. “지금 일본 침략군이 아직도 투항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싸우지 말라고 하는가? 그리고 직계 군대에게만 싸우고 투항을 접수하라고 하며 우리에게는 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인가? 우리는 당신의 방침대로 팔로군에 더 긴급하게 작전하라고 명령하였다. 지금 일본 침략자들과 싸워 항복을 받는 게 우리 민족의 이익에 완전히 부합되는데 왜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우리는 명령이 공평하지도 않으며 한참 잘못된 것이므로 부득이 따르지 않을 것을 밝혀둔다.”

마오쩌둥도 신화사 평론을 통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장제스가 원지에서 주둔하며 명령을 기다리라고 한 것은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대군을 어메이산(峨眉山) 동쪽으로 급히 보내 괴뢰군과 협력하여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아미산이 쓰촨성에 있으며 당시 벌어진 상황을 보면 마오쩌둥의 말은 현실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미군은 즉각 와서 지원했는데 정부군을 피점령지 각 지역으로 수송하도록 지시하고 3만명의 해병대를 주요 항구와 교통 중심지에 상륙시켜 국민정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정부군 3개 군이 베이핑, 텐진, 상하이, 난징으로 공중 수송되었으며 뒤따라 50만명의 부대가 전국 각지로 수송되었다. 이로써 장제스는 불리한 국면을 단숨에 만회하였다. 일본군 총사령관도 장제스와 국민정부에게만 복종하였다.

국민 정부는 화중, 화동, 화남의 대부분 도시와 교통 중심지를 확보하였고 중공 군대는 잠시 농촌 지역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공산당도 좌절하지 않고 기운을 내어 화북에 있는 59개 도시와 광대한 향촌을 장악하였다.

문제는 동북지역이었다. 소련군은 말리노프스키 사령관이 100만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만주에 밀고 들어온 다음 러허(熱河: 청더承德의 옛 지명)와 차하르까지 진주했다. 비록 스탈린과 협정을 맺었지만 소련군은 중공 군대가 만주로 진입하는 것을 도왔으며 일본 군대의 무기를 중공 군대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중국 공산당이 만주를 접수하여 관리하게 하지는 않았다. 처음에 소련은 장제스의 국민정부군이 만주에 진주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공산군(1946년 내전 폭발 뒤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꿨다)이 만주 지역의 농촌을 완전히 장악하게 한 다음 정부군의 진주를 허락했다. 그 결과 정부군은 1946년 1월 6일이 되어서야 창춘(長春)에 진주했으며 그 3주 후에 펑텐(奉天: 지금의 선양 沈陽)에 진주할 수 있었다. 소련 군대는 3개월 내에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1946년 5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철수했다. 만주의 공장과 광산을 모두 약탈하여 20억 달러에 상당하는 시설들을 소련으로 보낸 다음이었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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