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능’과 승자 독식주의
    [비판과 비평] 수능 위한 변명과 개혁의 방향
        2018년 11월 25일 01: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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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능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런데 나는 수능 문제들이 기이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수긍하지 않는다. 수능은 수학 능력 즉 논리적 사고능력을 측정하는 문제들이 다수 출제된다. 독해능력, 논리적 사고능력, 추론능력 등을 측정하는 문제다. 그러니 일상에서 쓰이는 영어나 일상적인 지문들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지적 능력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중요하겠지만 일상에서 중요한지는 모르겠다.

    수능이 반복풀이만 훈련시킨다는 비판 또한 그렇게 정치한 비판은 아니다. 수능 수학문제가 반복 문제풀이 선수만 기른다는 비판은 무용하다. 아무리 반복해바라, 이해도 되지 않은 문제가 풀리는가. 문제를 조금만 변형시켜 놓아도 풀지 못한다. 일단 이해가 되어야 한다. 이해를 하려면 수학적 지능이 필요하고, 그 지능 위에 학습이 필요하다. 그 다음 유사한 유형의 문제풀이를 통해 문제 푸는 시간을 줄인다. 문제풀이의 반복이 필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문제풀이를 열심히 해서-반복학습을 통해 비록 이해가 되지 않지만 수많은 유형의 문제를 풀어(쉽게 말해 달달 외어서) 좋은 점수를 받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은 말 그대로 노력파다.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점수를 따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한 이다. 그런 아이들은 수학적 지능이 조금 모자라도 그 노력에 맞는 대가를 공동체가 지불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래서 좋은 대학 간 것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일단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풀이 훈련을 한다. 언어지문의 독해 능력도 마찬가지다. 독해가 되어야 추론 문제들이 풀린다. 독해는 어휘력과 사고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반복 문제풀이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독서수준, 사고능력, 맥락적 이해를 할 수 있는 역량 등이 뒷받침 되어야만 독해가 제대로 된다. 단기 처방으로 이 문제 해결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내공이 필요한 지점이다.

    그러니 한국 교육이 단순 문제풀이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비판은 맞지 않다. 그것은 수능문제를 심층적으로 풀어보지 않은 이들이 하는 비판이다. 똑똑한 대학생들이 수능 3등급 받는 것은, 비록 독해수준, 이해수준은 뛰어나지만 시간 내에 문제를 푸는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학생들 몇 명 데려다 놓고 시험 치게 해서 3등급 나왔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그런 실험을 하는 언론이 한심한 언론이다.

    수능은 단기적인 사교육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이다. 동일한 지적 능력을 지닌 가구의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어릴 때부터 사교육이든 뭐든 책읽기 및 토론, 심층적인 수학 교육을 받은 아이가 더 좋은 점수를 받는다. 중산층들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투자한다. 노동자계급의 아이들이 받는 대중적인 학원교육으로도 한계가 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고득점을 받는 것 더더욱 쉽지 않다. 소득의 계층적 차이가 아이의 성취도의 차이를 낳는다.

    사교육 시장이 단순 암기와 문제풀이 기술만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교육 시장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사교육이 하는 일을 가소롭게 만들어 마치 그들이 기생적인 존재인 것처럼 사유하도록 한다. 상대를 이렇게 비판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승리의 길이다. 한국에서 사교육 시장은 공교육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때문에 수요가 있다. 수학능력시험은 어렵고, 실질적인 학습 능력이 있어야 하며, 사교육 시장은 그런 학습능력을 아이들의 수준에 맞춰 제공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다. 이것은 공교육이 따라갈 수 없다. 솔직히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학습 성취도에서 계층적 차이가 뚜렷이 나오는 이유이다.

    수능시험 모습(방송화면)

    나는 수능이 주는 더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고 본다. 내 생각으로 수능이 진짜 문제인 것은 수능이 한국 사회에 강하게 뿌리내린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능력 위주 사회)의 토대라는 점에서이다. 능력 있는 인간이 모든 것을 성취하는 세계 말이다. 능력 있고 노력하는 인간이 성취를 독점하고 그 능력-노력에 따른 보상의 차이를 정당화 하는 한국적 문화의 말이다. 지적 능력과 욕망을 억제하는 인내력, 노력의 결과로 성취한 승리와 그 승리로 인한 보상의 차등화를 당연시 여기고 타인과 그 성과를 나누는데 인색한 문화의 토대에 메리토-크라시가 있고, 그 제도적 토대가 수능이다.

    서울대를 간 아이들이 미래의 거의 모든 대학의 교수 자리를 차지하고, 공사 시험에 합격한 아이들이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특권을 누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시험 치지 않고 들어온 이들, 지역균형선발 통해 들어온 이들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차별하는 문화는 바로 수능을 그 뿌리로 둔 ‘메리토 크라시’이다. 이런 문화들은 공정성의 역설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새로 시험 쳐 들어온 청년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가장 크게 반대하고, 소득이 높은 노동자들이 부의 분배를 위한 제도적 변화에 저항하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 승자독식의 사회 말이다.

    수능 중심의 대학 전형을 개혁해야 한다는 데 내가 동의한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수능 교육이 창의-융합의 시대에 부적합하다는 점이 아니라. 창의-융합은 기초적인 학습능력이 바탕이 될 때 의미가 있다. 몇몇 예외 상황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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