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 위기에서 문화 붕괴까지,
    붕괴 다섯 국면과 새로운 삶의 가능성
    [책]『붕괴의 다섯 단계』(드미트리 오를로프/ 궁리)
        2018년 11월 24일 11: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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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경제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은 “타인을 이겨야 내가 산다”는 생존의 압박으로 시민성까지 상실해가고 있다. “친절, 베품, 배려, 애정, 정직성, 환대, 연대, 연민, 나눔”과 같은 가치를 잃은 사회를 우리는 감히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개인의 생존만이 지상 최대의 가치라고 말하는 사회가 과연 지속 가능할까? 이 책 『붕괴의 다섯 단계』가 던지는 물음이다.

    경제 위기, 정치의 무능, 자원 고갈, 기후 변화에 직면하여,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에게 성큼 다가와 있다. 많은 이들이 자각하는 미래란 심각한 장기 불황에서 문명의 붕괴까지, 암울한 그림을 담고 있다. 이 거대한 위기 앞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온전한 정신과 건강, 인간성을 지키며 이 시대의 광범위한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드미트리 오를로프는 이 책 『붕괴의 다섯 단계』에서 사회 붕괴 과정에 분류학 작업을 취하여, 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오를로프는 붕괴 과정을 1단계 금융 붕괴, 2단계 상업 붕괴, 3단계 정치 붕괴, 4단계 사회 붕괴, 5단계 문화 붕괴, 이렇게 다섯 단계로 정의하고, 우리가 각각의 단계에 얼마나 준비되어 있으며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이정표로 삼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단계 금융 붕괴 : “평소와 같은 경기”라는 믿음이 사라진다. 금융 자산이 보장된다는 믿음은 이제 옛날이야기가 된다. 사람들의 저축은 휴지조각이 되며 자본 접근성이 막힌다.

    2단계 상업 붕괴 : “시장에 가면 다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다. 화폐는 가치절하를 겪거나 희소해진다. 수입에서 소매업까지 이어지는 연쇄 고리가 끊어진다.

    3단계 정치 붕괴 : “정부가 당신을 돌보아준다”는 믿음이 사라진다. 기초 생필품을 살 수 없는 상태가 만연하면서 정부가 여러 시도를 벌이지만 효과를 내지 못한다.

    4단계 사회 붕괴 : “이웃들이 당신을 돌보아준다”는 믿음이 사라진다. 자선 기관이나 지역 사회 기관들이 권력의 공백을 메우게 되지만 자원 부족이나 내부 갈등으로 실패한다.

    5단계 문화 붕괴 :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가족이 해체되고, 희소한 자원을 놓고 개인들이 경쟁을 벌인다. “내가 하루 더 살려면 네가 오늘 죽어야 한다”가 새로운 행동 원리가 된다.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거기에서 이어지는 사회 불안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이 책은 단순히 붕괴의 여러 징후들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다. 현대 산업 문명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해부하는 이 책은 산업 문명의 미래, 그리고 우리들 삶의 현재와 미래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소중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역사, 정치, 경제, 현실 세계에 대한 거시적이고도 미시적인 저자의 탐구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금융, 자본, 상업, 국가, 사회, 환경 등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저마다의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될 것이다. 저자 특유의 블랙 유머와 풍자가 함께해 붕괴에 관한 한 단연 흥미롭고 재기 넘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 드미트리 오를로프는 구소련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소련의 붕괴에 비추어 냉전 시대 세계의 또 다른 강대국인 미국의 붕괴 가능성을 최초로 논의하고 비교한 저술가다. 그의 첫 저작인 『예고된 붕괴』(한국어판 2010년 궁리 펴냄)는 2009년 미국독립출판협회상(시사부문 은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그리스와 스페인 등지에서 금융, 상업, 정치 붕괴를 한창 겪고 있던 시기에 쓰인 이 책 『붕괴의 다섯 단계』는 위기 이후의 사회를 전면적으로 검토해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이자 경제학자 홍기빈이 우리말로 옮겼다.

    “붕괴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피해야 할 악몽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밀물이 들어왔다가 썰물이 나가는 것처럼 인간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정상적인 한 부분이다. 비록 붕괴라는 것을 은폐하려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이는 우리의 적응을 가로막는 짓일 뿐이다. 이 책은 붕괴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것이 다섯 개의 국면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보고 그 과정을 분석한 것이다. 다섯 국면마다 거기에서 생존하고자 한다면 서로 다른 종류의 적응 및 수용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본문에서

    금융과 화폐라는 신화, 그 뒷면에 대하여…현대 산업 문명을 해부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는 지구적 금융 체제 전체를 파산 직전으로 몰고 갔다. 미국 정부는 금융 회사들을 살리기 위해 “돈을 찍어” 구제금융을 실시했다. 이후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의 국가들이 국가 부도 사태 직전에 처해 대규모 구제금융에 들어갔다. 금융 위기가 벌어질 때마다 중앙 정부가 더 많은 부채를 껴안는 방식이 유일한 조치였다. 그 결과 “죄를 지은 책임자들은 체포되지도 않고, 위기 이전보다 더욱 부자가 되”었고, 중산층과 서민들은 집을 잃고 빚더미에 올랐다.

    오늘날 경제는 지구적 차원에서 작동하며, 금융과 수입 무역으로 굴러가는 지구적 경제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금융에서 상업으로, 정치적 붕괴로 계단식 실패를 촉발한다. 자본이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오늘날, “전 세계 보편적 조세 체제는 존재하지 않”기에 “조세 부담은 각국의 시민들, 지역 중소기업들에게 떨어진다.” 더구나 대규모 자본은 더 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어 이동함으로써 수익을 얻고, 슈퍼 리치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세금을 낼 필요 없는 역외 지역에 쌓아두고 있다.

    세계를 단일 시장으로 만드는 무역 자유화의 흐름 속에서 경제 부문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역할은 약화되었다. 최근에는 복지국가로서의 역할도 축소되면서 전 세계에 걸쳐 국가 안보 문제로 관심을 돌리는 정부가 늘어났다. 오늘날의 “정치적 실체는 국가가 아니라 초국적 기업”이 되었다.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현대 산업 문명이 모종의 위계, 착취 구조로 유지되는 시스템이라는 진단이다. 화폐의 사용은 사회적 불평등을 낳으며, 이에 따라 권력이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된다. 금융 자본주의는 이를 가속화했다. 일찍이 유럽 제국(국민국가)은 식민지 시장을 통해 더 부유해졌고, 현재 지구적 금융 시스템으로 부를 키우는 것은 소수의 초국적 기업과 초국적 금융 기관이다.

    “‘성장 신화’와 ‘규모의 경제’에 갇히게 되면 붕괴하는 것 말고 탈출구가 없다”

    저자 오를로프는 붕괴란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필연이라고 본다. “우리의 현 지구적 금융 시스템은 이자를 받는 대출 행위, 그리고 지구적 경제의 무한한 성장을 전제로” 유지되기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1장에서 우주의 제국 예를 통해 설명하듯이, 에너지와 자원, 인구를 포함한 자연 환경은 결코 그러한 팽창을 용납할 수가 없다.”(옮긴이의 글 참조)

    저자는 “금융이 미래의 성장을 놓고 체계적으로 판돈을 걸면서 팽창하는 활동”이라고 본다. “미래가 현재보다 부유할 것이라는” 기대가 금융을 지탱하는 원리다. 그러나 경제 성장이 멈추거나 수축한다면, 금융 행위에서 수입을 올릴 수 없으며, 기존의 대출 중 상당량은 악성 부채가 될 것이며, 수많은 은행들이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며, 그 결과 전 지구적 무역과 제조업 네트워크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한 바구니에 담은 달걀들이 외부에 충격에 한꺼번에 깨지듯이, 지구적 차원의 현 산업 문명은 언제든 위기가 닥쳐올 수 있는 위험한 구조이다. 저자가 여러 사례와 연구 결과를 통해 보여주듯이, 큰 규모를 지향하는 ‘규모의 경제’, ‘규모의 정치’를 좇을수록 리스크는 커진다.

    “근대 이후에 성립된 국민국가, 세계 시장, 지구적 금융은 모두 무한한 자본 축적, 경제 성장, 국력 신장이라는 것을 지상명령으로 삼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무한 성장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저자의 다양한 논의를 통해서 현대 산업 문명이 필연적으로 붕괴로 가게 될 것이라고 보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는 바로 그것이 이러한 무한 성장을 원리로 삼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장에서 저자가 우주 제국의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듯이, 자연과 생태는 멱법칙power law에 근거한 무한 팽창의 논리를 결코 따라잡을 수가 없다. 에너지도 자원도 또 인구를 포함한 자연 환경이 결코 그러한 팽창을 용납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은 절대로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붕괴할 수밖에 없음이 논리적 필연이라는 관점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생존만이 남은 사회의 참혹한 풍경, 과연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금융 붕괴나 정치 붕괴보다 심각한 것은 인간성 자체가 사라진 ‘문화 붕괴’의 단계다. 저자는 5장에서 콜린 턴불의 『산 사람들The Mountain People』(1987)을 빌려와 윤리도 감정도 사회도 사라진 이크족을 묘사한다. 오랫동안 계절의 흐름에 따라 수렵 채집을 하며 살아온 이크족에게 영국 식민 정부와 우간다에서 정착 생활을 명령한다. 방랑 생활을 하던 부족이 땅에 묶이면서 그들에게 재앙이 덮쳐온다. 기근이 닥치면서,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 상황이 오자 이크족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생존”만이 목적인 삶이 찾아온다. 사회와 가족이 해체되고 노인과 아이들이 짐이 되는 극단의 상황이 펼쳐진다. “선이란 곧 음식(배불리 먹은 상태)”이 된 이곳에서 “타인의 불행은 곧 나의 작은 행복”이 되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생존의 원리만이 자리 잡는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오늘날 현실 세계 곳곳에서 퍽 비슷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할 것이라는 신화가 무너진 지 오래다. 경제 불황이 계속되고 정치 시스템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개인들은 점점 자신의 생존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사회적 연대와 인간성에 대한 믿음 자체가 사라져간다.

    드미트리 오를로프는 붕괴의 다섯 단계 중 앞의 세 단계(금융, 상업, 정치)에서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적절한 변화를 마련할 수 있다면, 이어지는 극심한 사회, 문화 붕괴를 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붕괴 이전과 이후의 사회를 밀도 있게 스케치하는 이 책은 회복력 있는 공동체의 특징에 관한 독특한 전망을 제시한다. 금융, 상업, 자치, 사회 조직, 문화의 영역에서 성공적인 적응 방식과 실패한 적응 방식 또한 상세하게 탐구한다. 저자는 각 장마다 아이슬란드, 러시아 마피아, 중앙아시아의 파슈툰족, 로마(집시), 동아프리카의 이크족 사례를 들어, 독자들을 풍부한 사유 속으로 안내한다.

    우리의 기존 관념에 도전하는 이 책의 질문들!
    “붕괴가 벌어져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저자의 대안은 각 단계마다 “몰인격적이고 상업적인 관계를 버리고 신뢰에 기반을 둔 문화적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개인들이 기존의 제도와는 다른 노선을 직접 만들어 작은 단위에서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맺으라는 것. 위계 없이, 자율과 자치, 협동으로 유지되는 아나키에 가깝다. “붕괴 상황에서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되새긴다.

    저자는 화폐와 숫자로 굴러가는 세상은 그 비인격적인 속성으로 인해 개인들을 원자화된 파편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저자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란, 사람들이 서로 대면하여 관계를 맺어나가고, 자신들을 둘러싼 물리적 세계와도 상호작용을 맺어나가는 삶이다. 이를테면 중앙은행 화폐를 대신해 사람들 간에 신뢰를 회복하는 선물과 물물교환을 실험해보는 것, 중앙집권화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평등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보는 것 등이다.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지속 불가능한 산업 문명을 검토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성찰해보자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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