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공 내전,
    중국 현대사의 전환점
    [국공내전-1] 마오쩌둥과 장제스
        2018년 11월 22일 10:02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연재를 시작하며

    ‘중국 국공내전’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국공내전이라 하면 중국 현대사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벌인 내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내전을 국민당 쪽은 ‘동원감란’(動員戡亂: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전시 동원체체를 갖추는 것)이라 부르고 중국 공산당은 ‘해방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이 내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노동조합 활동 때문입니다. 역대 정권과 회사, 그리고 어용세력에 시달리다 보니 약한 힘으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가질수록 내전 자체에 궁금증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겨자씨보다 작던 공산당이 어떻게 막강한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는가? 일본의 침략과 소탕작전 속에서 공산당은 어떻게 생존하였으며 세력을 키울 수 있었는가? 수백만 명씩 맞붙는 내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던 공산당이 끝내 역전승을 거둔 원인이 무엇인가? 중국의 농민들은 왜 공산당을 일방적으로 응원하였는가? 학생운동과 지식인, 민주당파들은 왜 대부분 공산당을 지지하게 되었는가? 중요한 명분들을 공산당이 모두 가져갈 수 있던 원인이 무엇인가? 내전이 현대 중국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며, 지금의 중국 공산당은 일제에 대한 항전이나 내전당시와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게 되었습니다. 중국 혁명은 요행이나 상대방의 실책이 아니라 실력으로 차근차근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내전을 다루는 것이므로 수많은 전투장면이 등장합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싸우며 죽어갑니다. 흥미 위주로 다룰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사실만 나열할 수도 없습니다. 국공내전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더라도 쉽게 이해가 가도록 써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일 년 가까이 자료를 수집하고 읽고 번역하였습니다. 대부분 중국 포털사이트의 유료, 무료 자료들과 내전 관련 책들, 그리고 장제스와 마오쩌둥, 쭈더, 저우언라이, 펑더화이등 주요 인물들의 전기나 저작들입니다.

    꽤 오랫동안 연재할 것 같습니다. 초한지나 삼국지보다 더 많은 사건과 싸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여 싸움의 양상도 복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서지만 마오쩌둥의 말처럼 “그냥 쓰고 자꾸 고치면 된다.”는 정신으로 용기를 내겠습니다. 기록된 사실에 충실하도록 쓰겠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여러 에피소드들도 소개하여 지루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연재물이 현대 중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한지나 삼국지, 수호전을 통해 중국을 이해하는 것처럼 현대 중국이나 중국인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였거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곧바로 지적하여 주십시오. 전문가가 아니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정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연재물을 읽는 모든 분들의 건강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초겨울 철도 노동자 이영민 드림

    * 이영민(필명, 철도노동자) : 철이 들고부터 철도 노동운동 활동가 및 철도노조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정년을 앞두고 있으며 여러 차례 중국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위해 중국어를 공부하다 번역까지 하게 되었다. 도서출판 한내에서 ‘펑더화이 자서전’을 내었으며 도서출판 앨피에서 펑더화이 자서전을 수정하여 ‘나 펑더화이에 대하여 쓰다.’를 다시 출판하였다. ‘마오쩌둥과 한국전쟁’을 번역하여 한내 웹진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국공내전의 한 장면

    내전이 있기까지

    (2차) 국공내전은 1946년 6월 26일, 장제스(將介石)가 영도하는 국민당이 공산당의 중원 해방구를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6.25가 그랬듯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8월부터 이미 양측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길게 보면 국공 간 군사대결은 1927년 장제스가 1차 국공합작을 깨뜨리고 상하이에서 공산당원들과 노조원들을 학살할 때부터이다.

    노동운동과 북벌을 통해 세력을 키워가던 공산당은 이 탄압으로 수많은 당원들과 선진 노동자들을 잃게 되었다. 공산당은 자신들 표현으로 난창기의(南昌起義), 추수기의, 광저우 기의, 핑장(平江)기의 등을 잇따라 일으키며 총을 들고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분노와 보잘 것 없는 무기, 중과부적의 병력으로 상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기의마다 실패하고 유랑하다가 후난성 징강산 해방구, 장시성 루이진 해방구 등을 건설하며 간신히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노동운동과 폭동을 중시하는 당 지도부와 소련의 엉터리 지도 때문에 천신만고 끝에 마련한 초가삼간마저 내주고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다. 이른바 2만 5천리 대장정에 나서게 된 것이다.

    공산당은 구이저우와 윈난, 쓰촨 등 변방을 떠돌며 발붙일 곳을 찾았다. 말이 좋아 대장정이지 싸우다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도망치며 싸우는 고생 끝에 각지에서 출발한 총 23만명의 병력이 3만명으로 줄어드는 그야말로 천신만고의 행군이었다. 하지만 이 고생길이 지도부와 당원들에게 잡초처럼 억세고 고무줄보다 끈질긴 투지를 갖게 만들었다. 인민들의 지지와 성원이 없으면 발붙일 곳이 없기에 철저한 대중노선을 걷게 되었다.

    공산당이 산시성 옌안에서 자리를 잡고 한 숨 돌리려 할 때 장제스는 먼저 내정을 안정시키고 외적과 싸우기로 하였다. 공산당의 뿌리를 캐고자 한 것이다. 장제스는 서북군의 장쉐량(張學良), 동북군 양후청(楊虎城) 등에게 공산당 소탕을 명령하였다. 마오쩌둥이 “천하의 일을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하고 말했듯 (원래 항우의 삼촌 항백이 한 말이라고 한다.) 일이 엉뚱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코민테른은 각국 공산당들에게 통일전선 방침으로 소련을 보위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장쉐량과 양후청 등에게 ‘내전중지, 공동항일’을 호소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외적과 싸워야지 어찌 중국인이 중국인을 공격할 수 있는가?”하는 호소는 광범위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장쉐량이 시안 화청지에 장제스를 감금하는 ‘서안사변’을 일으켜 공산당은 천우신조로 소탕을 면할 수 있었다. 곡절 끝에 2차 국공합작이 진행되어 홍군은 국민혁명군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재편되어 공동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기까지 공산당은 심혈을 기울여 근거지 확대와 병력보충 등 세력을 키워 나갔다. 기록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당 간부들에게 “7할은 우리의 발전을 위해 쓰고, 2할은 국민당에 대응하며, 1할은 일본군에 대항하는데 써여 한다.”고 말했다 한다. 지금도 중국의 CCTV나 각 성의 지역방송을 보면 날마다 게릴라들이 일본군과 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희생당한 쪽은 장제스의 중국군이다. 중국군은 320만명이 사상당하는 희생을 치렀으며 전쟁기간의 공출로 인한 인민들의 반발, 인플레로 인한 민심이반 등을 안게 되었다. 보다 결정적으로는 그러고도 “항일에 적극적인 것은 공산당”이며 장제스는 자꾸 일본과 타협하려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안게 되었다. 팔로군은 펑더화이가 지휘한 ‘백단대전’을 제외하면 일본군과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TV드라마에서 보듯이 소규모의 유격대 전투는 있었겠지만 그야말로 해방구를 건설하고 확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공산당은 총병력 3만여명에 불과했던 것이 1945년 8월에 이르면 정규군 100만명과 200만명의 민병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인 산시, 허베이, 산둥, 안후이, 후베이, 장쑤성등 18곳에 해방구를 건설하여 장차 벌어질 내전에서 근거지를 선점하게 되었다.

    왼쪽이 마오쩌둥 오른쪽이 장제스

    마오쩌둥(毛澤東)

    마오쩌둥은 후난성 상탄현(湘潭縣 : 현은 우리의 군과 대비된다.) 샤오산(韶山)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오순셩(毛順生)이고 어머니는 원치메이(文七妹)이다. 어머니는 남송 때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후손이다. 집안의 자매 중 일곱째여서 칠매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는 15무(畝 1무는 200평이다.)의 땅을 가진 중농이었다. 해마다 87석의 쌀을 수확해서 자꾸 땅을 늘릴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마오가 어릴 때 걸핏하면 두들겨 팼다고 한다. 어린 마오가 곡식을 말리다 소나기가 와서 비를 맞게 하면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마오는 집 앞에 있는 방죽으로 뛰어 들곤 하였다. 아버지는 헤엄을 칠 줄 몰랐다. 우물 앞으로 달려가 뛰어들어 죽겠다고 위협한 일도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 때리지 않겠다.“고 타협했다 한다. 마오쩌둥은 인정이 많고 현명한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으며 별로 존경심을 갖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공부했다. 고전은 좋아하지 않고 ‘악비전’ ‘수호전, ’수당연의‘ ’삼국지‘ ’서유기‘등 전기소설과 반란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다. 마오쩌둥은 어릴 때 기근으로 굶주린 양민들이 현장(縣長)에게 항의했다가 잡혀 죽는 것을 목격했다. 마오는 그런 현실에 대하여 강한 분노를 느꼈다고 술회했다.

    마오쩌둥은 창사 사범학교에서 은사 양창지(梁昌濟) 교수를 만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딸 양카이후이(梁開慧)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양카이후이는 나중에 국민당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마오쩌둥은 베이징 대학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공산당 창당대회에 후난성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27년에는 ’추수기의‘를 주도했다가 징강산으로 피신하여 혁명근거지를 건설하였다. 1928년 4월 난창기의(南昌起義)에서 실패한 뒤 피신해온 쭈더(朱德), 천이(陳毅)등과 만나 농민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즉 중국 공농 홍군을 창설했으며 곧 중화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그때부터 마오쩌둥의 개인사는 중국 공산당의 당사와 궤를 같이하게 된다. 천두슈(陳獨秀)의 기회주의, 치추바이(瞿秋白), 리리싼(李立三)의 모험주의는 모두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있었다.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수도인 장시성 루이진(瑞金)에서 장제스의 네 차례에 걸친 포위토벌을 물리쳤으나 28인의 볼세비키에 의해 지도력을 박탈당하고 유명무실하게 된다. 상하이에서 목숨을 구해 도망쳐 왔지만 소련을 등에 업고 보따리까지 빼앗은 것이다.

    공산당은 결국 5차 포위토벌에서 국민당군에 밀려 장정을 떠나게 되고 홍군은 장정 도중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게 되었다. 장정 도중 구이저우성 쭌이(遵義)회의에서 왕밍(王明)과 리더(李德)의 잘못된 영도를 강력히 비판하며 군사지도권을 되찾았다. 이때 마오쩌둥은 펑더화이, 천이등 군 지도부와 왕자샹, 저우언라이등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옌안에 도착한 뒤 정풍운동등을 통해 지도력을 확고히 하였다.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은 사실상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판단과 노선에 따라 중국 혁명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노선과 방향, 군사방침 등 모든 분야에서 직접 저술하며 중국혁명의 등대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성격이 활달하고 호방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하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라도 무조건 따르는 법이 없었다. 마오는 대범하였으며 포용력이 있었다. 적이나 경쟁자라고 할지라도 의기투합하거나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만들기를 잘하였다. 마오는 또 뛰어난 시인이어서 평생 수많은 시를 지었다. 철학에도 관심이 많아 밤새도록 철학책을 읽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마오는 정확한 현실분석과 피아간 역량을 타산하는데 특히 뛰어났다. 그의 수많은 저작과 논문들은 중국혁명에서 지침이 되었으며 중요한 전투에는 빠짐없이 개입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마오의

    이런 성격과 자질은 중국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국공내전을 시작하던 해 마오쩌둥의 나이는 52세였다.

    장제스 (將介石)

    장제스의 본명은 중정(中正)이며 제스(介石)는 자(字: 관례 뒤 이름 대신 부르는 별명)이다. 장제스는 1887년 저장성(浙江省) 펑화(奉化) 시커우진(溪口鎭: 진은 한국의 면과 대비된다.)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가게를 열고 소금을 팔았다. 아버지가 일찍 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손에서 컸다. 장제스는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고향 인근에서 중학까지 마친 그는 19세이던 일본에 가서 천치메이(陳其梅) 등과 사귀며 반청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해 귀국한 장제스는 1907년 바오딩(保定) 군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다음 해에 다시 일본에 가 도쿄 진무振武학교에 입학하였다. 도쿄 진무학교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중국 유학생을 위해 개설한 군사학교이다. 이때 장제스는 쑨원(孫文)이 설립한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중국의 민주혁명에 투신하여 손중산의 신임을 받았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장제스는 상하이로 귀국하였다. 그는 천치메이의 지목을 받고 선봉대 100여명을 인솔하여 항저우(杭州)로 가 저장성 광복에 앞장섰다. 천치메이로부터 상하이 5연대장을 물려받은 장제스는 천치메이, 황푸(黃郛)와 의형제를 맺었다. 1912년에 그는 천치메이의 지시에 따라 자객을 고용, 광복회 영수인 타오청장(陶成章)을 암살하였다.

    일본으로 피신한 장제스는 1913년 2차 혁명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청나라의 병기 제조공장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천치메이가 암살된 뒤 장제스는 쑨원으로부터 중화혁명군 동북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죽은 뒤 중화혁명군이 해산되었고 장제스는 상하이의 비밀조직 청방 두목들을 사귀게 되었다. 1917년 손중산이 중화민국 군정부(中华民国军政府)를 세우자 장제스는 광둥군 작전과장을 거쳐 광둥군 2지대 사령에 취임했으나 장교들로부터 배척당했다. 그는 상하이에 거주하며 거래소에서 투기를 하기도 하였다. 1922년 광둥군 총사령 천종밍陈炯明이 반란을 일으키자 쑨원은 군함인 융펑함(永豊艦)으로 피신하였다. 그때 장제스는 광저우에서 이 배에 올라 40일 동안 쑨원 곁에서 보호하여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다. 장제스는 그 일을 기록한 책 ‘쑨 대총통이 다행히 난을 피한 기록’을 펴내기도 하였다. 쑨원으로부터 대원수부 참모장으로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하던 장제스는 소련에 대표단으로 파견되어 정치와 군사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1924년 국민당이 황푸 군관학교를 개설하자 장제스는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광둥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겸임하였다. 이때부터 양성한 장교들이 그의 핵심세력이 되었으며 평생의 정치, 군사적 자산이 되었다.

    장제스는 황푸 군관학교 졸업생과 생도들을 주력으로 군벌들과 싸우며 승승장구하여 쑨원 사후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올라 군권을 장악했다. 그는 펑위샹(馮玉祥), 리쭝런(李宗仁), 옌시산(閻錫山) 등 군벌들과 싸우기도 하고 정치력으로 타협하기도 하면서 점점 국민당안에서 권력을 장악해 갔다. 1927년 상하이 4.12사변을 일으켜 공산당과 동조세력을 일소한 장제스는 그에 반대한 왕징웨이(王精衛)등의 우한정부에 맞서 난징에 또다른 국민정부를 설립했다. 그는 결국 펑위샹, 리쫑런, 왕징웨이가 연합한 우한 정부에 밀려 1927년 난징정부 주석직을 사임했으나 이해 본처와 이혼하고 쑹씨집안의 셋째딸인 쑹메이링(宋美鈴)과 결혼하여 상하이 자본가들과 혼맥을 형성했다. 이 결혼으로 장제스는 자신의 집안과 쿵상시, 쑹즈원,천궈푸 형제 등으로 이른바 4대 가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정치경제 독과점 체제는 장제스의 기반이 되었지만 그를 비난하는데 좋은 재료가 되기도 했다.

    장제스는 자신들과 싸웠던 리쫑뤈, 펑위샹, 옌시산 등과 연합하여 베이핑에서 북양군벌 통치를 이어가던 장쭤린(張作霖)에게 승리하여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그는 군사적 기반과 상하이 자본가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국민정부 정치위원회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을 겸임하고 육해공군 총사령까지 겸임하여 비로소 1인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이때부터 그는 공산당에 대한 다섯 차례 포위토벌을 진행하하였다. 4차까지는 “근거지 깊숙이 끌어들여 운동전으로 맞서는” 홍군에 잇따라 패배하였으나 5차 토벌에서 마침내 장시성 루이진을 비롯한 각 근거지에서 모두 쫓아내었다. 옌안에 자리잡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에 최후 공격을 준비하던 그는 뜻밖에도 장쉐량, 양후청 등에 의해 서안사변을 만났다. “죽일 테면 빨리 죽이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던 그는 부인 쑹메이링과 처남 쑹즈원(宋子文)이 비행기로 시안에 날아오고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주선으로 2차 국공합작을 이루게 되었다. 즉 항일을 위해 홍군을 팔로군으로 재편, 함께 싸우도록 한 것이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장제스의 중국군은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밀렸다. 윈난과 구이저우, 쓰촨으로 밀려난 국민정부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승전을 맞이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국공내전을 시작하던 1946년 그의 나이는 이미 58세가 되었다.

    장제스는 평생 일기를 썼다. 의지가 굳고 강인하여 한번 마음먹은 일이면 반드시 해내는 성격이었다. 수많은 군벌들과 싸워 권력을 쟁취했으며 죽을 때까지 그것을 유지했다. 쑹메이링과 결혼하기 위해 본처와 이혼했으며 기독교로 개종했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