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으로 흔들릴 믿음이라면 너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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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24일 11: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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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소설을 픽션(fiction)이라고 한다. 허구(虛構)라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은 예술이라고 한다.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 예술로 얘기될 수 있을까?

대표적인 예술이라는 미술에서 고도의 추상화조차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거나 실제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된다. 아마도 소설이 일정 정도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소설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소설의 현실성, 사실성이란 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역사소설이다. 지나간 역사, 그것도 먼 옛날의 이야기일 때 그 사실성 여부는 항상 논란거리가 된다. 그렇다고 하여 역사소설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실을 포함하고 있든 아니든 사람들은 그저 ‘소설’로서 즐길 뿐이다. 혹 역사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만큼 해악적이지 않느냐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 지난 18일 압구정동 한 영화관 앞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기쁜소식교회 교인들이 영화 ‘다빈치 코드’의 내용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피켓을 들고 서 있다./한상균/문화/2006.5.18 (서울=연합뉴스)

그러나 정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소설’과 사실을 구분할 줄 안다. 그리고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라는 광범한 교육시스템이 존재하기에 사실이 오도되거나 아니면 오도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각설하고, 되도 않는 소설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댄 브라운이라는 미국의 소설가가 쓴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이 소설은 출판 이전부터 논란을 일으켜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부가 판매된 오늘의 시점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논란인 즉 그 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고, 그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기독교(여기에서 기독교라 함은 구교와 신교 혹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의 근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이렇다.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고, 31세에서 33세에 이르는 3년 동안의 공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여 승천한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이다.’ 이런 내용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각 개인의 자유이다. 좁혀서 얘기하면 이것이 기독교의 공식입장이다.

그런데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에서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소설은 기독교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든다.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神性)에서부터 출발하는 데, 댄 브라운은 예수가 신이 아닌 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은 이제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갔다. <다빈치 코드>가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는 상영금지를 요청하였고, 일부의 신자들은 상영 극장으로 몰려가 항의 캠페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단지 내용을 둘러싼 논란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억압 논란이 되어버렸다.

기독교계의 우려는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이, 영화가 혹시 믿음을 신앙을 흔들리게 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 한 편에, 영화 한 편에 흔들릴 믿음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가벼운 믿음 아닐까?

복음서에 보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너의 믿음이 그렇게도 약하냐” 하며 질책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쩌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갈대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믿음을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는 것에 그렇게도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왜 기독교 신자가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고 있는가? 신자들 중에도 냉담자가 늘어나는 것일까?

이런 근본 질문에 대해 기독교계는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말한다. 그러면 그 구원의 대상은 누구인가? 성경에서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즉 구원의 대상이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사회적 약자이다. 그런데 기독교계는 이러한 예수의 말씀에 충실하여 왔는가? 한 예로 얼마 전 사학법 파동에서 보여준 기독교계의 모습은 기득권 집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에 열광하고 기독교에 귀의하려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부터 예수의 말씀에 보다 더 충실해야 하는 게 아닐까?

<다빈치 코드>의 사실성 논란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소설의 결말을 보면서 쓴웃음을 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 결말이야말로 댄 브라운 스스로가 자신이 쓴 소설의 사실성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두고 항의성명을 내고 항의 캠페인을 하다니, 언젠가 한 전문직종 종사자의 사생활을 부정적으로 그린 영화의 상영을 앞두고 그 직종 종사자들이 들고 일어나 항의하고 시위하고 재판까지 벌였던 일이 떠오른다. 그로 인해 영화감독들이 “힘깨나 쓰는 직업 사람들 눈치 보느라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없다”고 푸념하던 말이 생각난다.

<다빈치 코드>는 한 편의 추리소설이고 모험소설이다. 그것에 충실해 만든 영화는 한 편의 추리영화이고 모험영화이다. 그런 장르의 소설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부담감 없이 즐기면 될 뿐이다. <다빈치 코드>를 다빈치가 읽었다면 시간 때우기 좋은 소설이라고 껄껄 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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