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스콜리니코프와 오늘,
    초인의 치외법권적 권능
    [소설로 읽는 한국 사회] 『죄와 벌』
        2018년 11월 19일 04: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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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 아래 국정농단이란 피켓이 광장을 뒤덮었다. 최후의 상식선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170만 촛불로 현현했다. 촛불 정부를 세우고 책임자를 구속 수감한 지 2년. 다시금 양승태 사법 농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재판도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적폐를 청산해 줄 법이 적폐에 동원된 사회, 이쯤 되면 한국 사회를 적폐 사회로 불러도 무방하리라. 법의 한계인가. 인간 이성의 한계인가. 누가 ‘죄’를 짓고 누가 ‘벌’을 받는가. ‘법’ 없는 ‘법’의 시대에 실존적 곤경을 느낀다.

    도포를 뒤집어쓴 그의 머리에 총탄이 박히기 직전,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된다. 법이 생과 사를 가르고 철저한 우연에 의해 죽음이 지연되며 삶이 지속된다. 이제 그는 써야 한다. 농노들에게 맞아 죽는 아버지에 대해, 10년간의 유형 생활에 대해, 페테르부르크의 범죄, 사형과 사법제도에 대해,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당대 최고의 법학자였다.

    『죄와 벌』(1865년)은 1865년 1월 모스크바에서 27세 청년이 두 여성을 죽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사법개혁을 주장했던 그는 합리적 이성이 손쉽게 ‘죄’를 묻고 ‘벌’을 선고하는 과정에 의구심을 갖는다. 농노제를 기반으로 한 제정 러시아는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를 모방하며 계급 분화가 첨예해졌다. 그의 작품은 이성의 절대성을 회의하고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을 따라 하는 기존 법질서의 딜레마를 주 소재로 다뤘다. 어떤 면에서 그의 소설은 ‘법’이라는 ‘상징질서’에 대한 공박이며 언어로 위시되는 ‘법’의 심판 앞에 맞선 서사적 자기 진술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중범죄를 다루고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와 <죄와 벌>은 심문과 선고, 형벌이라는 사법 절차와 재판의 희생자들을 다루고 있다.

    『죄와 벌』의 중심 갈등은 법을 전공한 청년이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해 노파의 돈으로 수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추악한 ‘이’와 다름없는 인간을 제거해 다수를 이롭게 한다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공리는 노파 살해로 이어진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죄 이론에 관한 논문을 게재하고 ‘초인’ 사상을 내세워 실정법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 하지만 결국 “나란 놈은 미학적인 이에 불과할 뿐, 더 이상 아무것도”(p. 496) 아님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이 살해된 ‘이’보다 훨씬 더 추악하고 더러운 놈일지 모른다”(p. 497)는 생각에 괴로워 자살과 자백의 기로에 선다.

    노파는 약자들의 피를 수혈하여 모은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해 구원을 받고자 했다 “범죄는 비정상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이며 오직 그뿐” 슬럼화된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법은 강자 편이며 약자에겐 늘 위반의 가능성을 내포했다. 한국 사회에 흔한 ‘유전무죄’는 계급 갈등과 분화, 자본주의와 권력의 결탁 속에서 법은 당대 권력 유지에 도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5.16 쿠데타와 군부독재는 ‘법을 내세운 법의 중단 상태’였다. 군주의 비상상태 발령 하에 지배세력의 변수에 따라 법의 쓸모가 사후적으로 구성되었다. 오랜 시간 언어의 헤게모니를 쥔 자들은 법의 상징폭력을 설계했다. 한국의 근현대사 저변에 깔린 법의 공백은, 일상적 사회적 의미의 이데올로기 속에 부조리라는 질병으로 지금까지 전유되었다.

    양승태 국정농단이 폭로되었음에도 언론과 국회는 미온적이었다. 오랫동안 법이라는 상징적 폭력 앞에 영문 모르게 호명 당한 주체가 무산자, 노동자라는 계급적 약자였기 때문이다.

    상식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해석의 권한을 가진 자는 그들만의 상식을 상정하고 실체 없는 풍문을 유포한다. 양승태 대법원 산하의 전략가들은 ‘정부 운영에 기여한 판결’을 자료화하고 대통령에게 실질적인 상고법원의 통제권을 쥐여줄 재판 거래가 가능함을 어필하기 위해 98건의 문건을 작성한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의 법의 수행력이 권력의 사용처에 있음을 재확인시킨 사건이다.

    자본과 권력의 공모관계에 합류한 법관은 라스콜리니코프가 끝내 되지 못했던 ‘초인’이 된다. 쌍용차 노동자와 KTX 승무원 노동자, 전교조, 강제징용 피해자, 국가폭력 피해자, 중소상공인, 그리고 강제 해산당한 진보정당의 의원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사건, 사안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수십 년간의 호소를 일거에 짓밟았다.

    1865년 러시아 사회에서도 주체를 호명하는 법의 부름 앞에 ‘유전무죄’는 통용되었다. 폭력을 통해 자기 이론을 입증하려고 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심리적 파탄에 이른다. 필연적 죄가 발생했고 형법상 체포가 지연될 때, 그는 죄의식이라는 질병에 시달린다. 이는 벌의 지연 자체가 비로소 진짜 ‘벌’임을 상징한다. 위대한 법학자를 꿈꿨던 그는 ‘몽상’에 사로잡혀 고립되다 센냐의 거리로 나왔지만, 결국 그가 세상을 향해 내민 한 발은 ‘플레소토 플레네’. 러시아어로 ‘한 발을 내딛다’라는 뜻을 지닌 ‘죄’였다. 사는 것 자체가 형벌인 계급적 약자에게 실존 자체가 죄인 셈이다.

    이성과 정신이 튼튼하고 강한 자가 그들의 지배자라는 걸 알겠어! 많은 것을 감행할 수 있는자, 그가 그들 사이에서는 옳은 거야. 보다 많은 것에 침을 뱉을 수 있는 자, 그가 그들 사이에서 입법자이며, 제일 많은 것을 감행할 수 있는 자, 그가 제일 옳은 거야! – 『죄와벌 2』 (p. 260)

    기울어진 세상에서 ‘옳음’을 입증하는 행위 또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불평등한 세상에 마지막 보루인 법은 주체의 외부에 있으며, 비상식과의 타협 만이 내부에 있다. 하여 언어를 지배하는 이들에 의해 역사는 흘러왔다. 죄 없는 이의 죄도 ‘있게 한’ 초인의 치외법권적 권능은 사람들 사이에 정의의 가능성을 폐기하고 더불어 최후의 정의에 대한 희망마저 꺾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8년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왔기에 구원이 기다리리라 믿지만, 작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혹자들은 마지막 6부가 <죄와 벌>의 오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되묻는다. 속죄를 통해 갱생할 수 있는가? 고통만이 자기 구원의 필수적 도정인가? 소설가의 질문은 죄와 벌의 간극에 처한 라스콜리니코프로 육화된다.

    그리하여 에필로그는 필요하다. 시베리아행과 고통 속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오만한 인간을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구원의 가능성이 유예된 자리에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다”(p. 265)라는 고백만 남는다.

    라스콜리니코프를 시베리아까지 이끈 것은 이데올로기, 이론, 신이 아닌 소냐였다. “모든 것을 내주고…… 온순하고 조용한 눈으로 바라 본”(p. 497) 소냐는 “정녕 죄스러운 것”(p. 507)은 “과연 하나의 악을 통해 수천, 수만 개의 선을 행하고 나아가 ‘공동의 행복’이 보장되는 유토피아”(p. 508)란 어디에도 없고, 불평등은 인류 전체의 죄이며 그것을 함께 짊어질 누군가 곁에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죄형 법정주의가 무화된 거짓 상식의 세계, ‘파기’의 권력을 쥔 자가 재편하는 사회 질서가 풍문이 아닌 사실이 되어버린 시대에 위선의 법정에 맞선 위반자만이 법이 종용하는 거짓 앞에 묵비권으로 저항할 수 있다.

    양승태 사법 농단의 심부에는 사법부를 단단한 결속으로 묶어 둘 할당된 부정이 예비되어 있었다. 혹여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사전에 단속하면서 일사불란한 관료조직을 기획했고, 이를 통솔하는 대법원장의 직권을 남용해 거래에 나서려고 했다.

    사실 모든 농단의 변수는 인간이었다. 진실을 재현하고 증언하는 통제 밖의 인간, 말할 수 없을 때 말하고자 하는 미약한 인간만이 권력의 정점에서 재판도 거래할 수 있는 초인을 저지할 수 있다.

    진실을 밝히는 데 무능하고 취약한 법은 이제 자기 처벌이 필요하다. 이에 목격자 스스로 진실의 입법자로 나서야 한다. 차라리 고통이 구원의 길로 이어진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전언이 맞는다면, 오랫동안 이 세계를 지탱해 온 거짓 법정에 서서, 무죄를 증명해야만 하는 기만적 자유를 짊어진 이들에게 진실을 되찾아 줄 때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험난한 노정에 함께 해줄 소냐가 필요하다. 구원은 그런 연대에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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