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빠르게 바꾸는 느림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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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22일 01: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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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빨리 가기

    서울에 돌아왔다. 지난 12일 동안의 일정을 돌아보았다. ‘지도부(지도를 들고 걸으며 길을 체크하는 임무)’를 맡았던 지라 그간 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속도’였다. 당일 일정이 끝난 저녁이면 다시 삼삼오오 모여 지도를 펼쳐든다. 다음날 일정의 거리와 속도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 목표는 명확했다. 빠르게! 안전하게! 걸어서 그날의 숙소로 이동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겨우 1-2번 답사한 길을 완전히 파악하기란 힘들다. 갓길이 거의 없다시피 한 좁은 길,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차들, 만만치 않은 이동 거리. 끊임없이 지금 위치를 체크하면서 거리를 계산하고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안전한’ 이동경로를 탐색한다. 그래야 해지기전에 숙소로 도착한다. 제 때 밥 먹는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면 밤에는 힘을 잃는다. 정작 해당지역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약 먹은 병아리마냥 꾸벅꾸벅 졸 수 밖에.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더, 내일의 부푼 기대와 희망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의문이 생겼다. 대체 왜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는가? 고속도로로 가면 3시간도 안 걸릴 거리, 30분이면 도착할 숙소까지 8시간씩이나 걸려 열하루 동안 죽어라 걸어가는 이유는 뭔가?

    1. 중력과 속도

    그건 조금 다른 의미의 ‘속도’를 가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속도란 중력을 이겨내고 가로지르는 힘이다. 세상이 정해준 삶의 규칙들, 지향해야 한다고 말해지는 가치들은 우리를 끌어당기는 무거운 중력처럼 어디에나 존재한다.

    뒤쳐지지 않고 학교를 가고, 직장을 구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중력에서 벗어나 뛰어오를라치면 부모의 만류가, 다른 이들에게 뒤지고 있다는 열패감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라는 수많은 광고들이 우리를 압박한다.

       
     

    많은 사람들이 중력에 얽매여 있다. 미국 없이는 우리 다 죽는다고 대추리를 홀랑 밀어 미군기지로 내주자는 사람들. 졸속이건 뭐건 간에 한미 FTA를 체결해 (농민들은 죽더라도) 미국처럼 삶을 바꾸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는 사람들. 인근 공단의 입주율은 30%도 안 되고, 농토는 남아도는 데도 개발만이 살길이라며 간척사업을 강행하는 이들. 정부에 찰싹 붙어 이를 선동하는 지식인들.

    벌어도 벌어도 돈이 모자라다는 생각, 미국이 나를 버릴까 하는 두려움에 강박적으로 얽매인 사람들에겐 하루하루가 얼마나 바쁠까. 강을 막아 만든 방조제와 산을 헐어 만든 고속도로 위로 하루에도 몇 십번씩이나 시속 수백 킬로를 넘나들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여기 저기 더 빠른 길을 뚫어 또 다른 개발거리를 만들어낸다.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삶의 중력이 사람들을 계속 달리게 한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전혀 빠르지 않다. 상자 안에서 쳇바퀴를 죽어라 돌리는 다람쥐가 전혀 빠르지 않은 것처럼. 정해진 선로 위로 달리는 기차 안에 앉아있는 사람이 빠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영역과 삶의 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열심히 달리면 달릴수록 늘 제자리에 서 있다.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행진을 하는 동안 도처에서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만났다.

    수매가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농약을 쓰지 않기를 고집하는 접산리의 농민. 서로 얼굴도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적 삶이 아닌, 함께 사는 마을을 복원하자며 수십 년째 생태마을을 만들고 있는 홍성의 활동가들. 매향리에서 미군을 몰아낸 후 이제는 간척사업을 중단시키겠다는 전만교 위원장님. 대추리의 땅을 지키기 위해 감당하기 힘든 만큼의 논에 씨앗을 뿌리는 농민들. 내/외국인이라는 국가의 분류를 넘어 우리 모두의 삶의 권리를 찾고자 투쟁하는 이주노동자들.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은 물리적으로는 너무 느릴지도 모른다. 좋은 차도 없고, 차가 있어도 기름값이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들에겐 무엇이 우리 삶에 소중하고 무엇이 해로운지 알아채는 민감한 귀와 눈이 있다.

    새만금을 홀랑 밀어 버리고 만드는 땅은 이미 죽은 것임을, 개발의 환상에 살해당하는 갯벌의 소중함을 안다. 몇 푼 더 벌기 위해 도시로 올라가 무한경쟁의 쳇바퀴에 올라타는 것 보다 서로 아끼며 함께 사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시세라는 잣대로 대추리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의 황당함을, 거기에 들어설 미군기지의 무서움을, 그 땅에 일군 우리의 삶이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안다. 이들은 세상이 겁주고 닦달하는 소리에 겁먹고 뛰어가지 않는다. 대신 주위를 세심히 살핀다.

    이들의 움직임은 시속 4km도 안된다. 하지만 심지어 한 곳에 머물러 있을 때조차 어마어마한 속도를 가진다. 세심한 눈으로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아갈 길을 찾기 때문에, 즉 중력을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천천히 날고 있는 독수리, 중력과 바람을 버티는 독수리가 느리지 않은 것처럼 그들은 빠르다. 중력을 이겨내고, 어디에서든 우리를 옥죄는 이 무거운 공간을 가로지른다. 주어지는 삶의 방식에 저항하고 전혀 다른 삶을 꾸리는 이 사람들. 얼마 전 한강대교에서 6시간 동안 300m를 기어가(시속 0.05km) 활동보조인제도를 쟁취해 낸 장애인들을 기억하는가. 이들의 섬세한 움직임은 세상을 뒤흔드는 무서운 빠르기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2. 다시 걸으면서 묻자

    걸으면서 수없이 외친 말이 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무기란 속도를 가지는 것이다. 속도가 없는 무기는 없다. 그리고 그 속도는 주어진 삶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작은 걸음에서 나온다.

    행진을 시작한 것도 나의 찌들어 있는 삶을 살피고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그 곳으로 한걸음 걷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죽어라 달리고 있는 길의, 철로의, 쳇바퀴의 바깥에 있는 너른 들판을 보고 그곳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말은 아직 미약했다. 곳곳에서 만난 무시무시한 속도를 가진 분들, 그분들의 내공에 댈 게 아니었다. 어딘가로 갈 때 마다 정보과 형사가 붙어서 길을 안내해주려 하고(물론 거절했다^^;) 심지어 대추리로 가는 길을 ‘안전하게’ 열어줄 정도이니 할말 다 했다. 아마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과 약간의 노파심 때문이었으리라. 우리의 속도는 아직 이 정도다.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앞에 펼쳐진 들판은 우리의 시야만큼 넓어질 것이고, 길에서 벗어난 샛길은 우리의 걸음만큼 무궁무진할 것이다. FTA를 체결해야 산다는, 미군 없이는 안 된다는, 대추리를 내주자는, 개발을 해야만 살 수 있다는, 새만금을 기어코 메워야겠다는 그 고속도로 위의 맹목적인 질주를 잠깐 멈추자. 그리고 고속도로 옆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자.

    내 삶에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진짜 잘 사는 삶이 무엇인지 묻자. 그곳으로 걸어가자. 속도를 가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미 길 위에 있다. 우리의 행진은 서울에 왔다고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걸으면서 묻기는 이제 시작이다. (끝)

    ps. 오늘(22일) 저녁 7시 광화문 동아일보 앞에서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모든 소수자들의 목소리와 문제를 담아 촛불문화제가 진행된다. 다들 꼭 함께 했으면 좋겠다!

    ps 2. 또한 토요일(27일) 5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우리의 미래를 팔아먹지마!>
    FTA를 반대하는 시끌벅적 난장

    이 진행된다. 1시에 연대 정문부터 대학로까지 함께 하자는 목소리를 높이며 걸어간 후 5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시끌벅적하게 한미FTA에 반대하는 난장을 벌일 작정이다. 다양한 프로그램에 준비될 예정이니 자세한 사항은 한미FTA에 반대하는 ‘에프키라’의 네이버 까페(http://cafe.naver.com/ftakiller.cafe)에서 확인해주기 바란다. 어디서든, 어떤 방식이든 좋다. 까페에 구체적인 참가 계획을 남겨주면 더욱 좋다. 그냥 함께만 해도 좋다. 작은 발걸음 모두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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