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년 열심히 일했는데
    채용비리 범죄자로 낙인
    구의역 김군 동료, 정비노동자 등 교통공사 정규직 전환자들 목소리
        2018년 11월 08일 06: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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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같이 출근해서 열심히 설거지하고 밥을 짓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청년 일자리를 약탈하는 흉악범이 되어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으로 20여년을 일하다가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준다고 해서 그냥 그 말을 믿고 따랐을 뿐인데 우리는 사회적 지탄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최 모 씨는 1997년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올해로 21년째 서울교통공사 식당조리원으로 근무 중이다. 최근 서울교통공사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채용비리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최 씨와 같은 정규직 전환자들은 싸잡아 ‘채용비리 당사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최 씨는 친인척 채용비리 의혹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말과 이를 그대로 받아쓰는 언론 보도를 볼 때면 “가슴이 아프고 너무나 억울해서 잠을 다 못 이룰 지경”이라고 말했다.

    권수정 정의당 서울시의원과 서울교통공사노조는 8일 오전 서울시의회 별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회견엔 채용비리 의혹의 당사자인 최 씨를 포함해,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김군의 동료인 PSD(스크린도어) 정비원 박 모 씨, 전동차 정비원으로 12년간 서울교통공사에서 일한 한 모 씨 등 3명도 참석했다.

    권수정 시의원은 “행정사무감사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서울시와 서울시 산하기관에 대책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모습(사진=공공운수노조)

    21년 차 식당조리원
    “10년 넘게 비정규직으로 일한 우리가 비리 당사자라니…”

    최 씨는 “21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된 지금 연봉을 다 합쳐봐야 기껏 3,200만원 남짓이다. 그런데 신문에는 7,000만원이 넘는 고액 연봉자로 둔갑해 있었다”며 “도대체 그 7,000만원은 무슨 근거로 기사화 했는지, 그렇게 받는 식당조리원이 있다면 제발 알려달라”고 토로했다.

    최 씨는 10년간 식당조리원으로 함께 일한 동료가 채용비리 당사자가 된 사연도 전했다. 그는 “십수 년 전에 입사했던 친구는 입사 당시에 조리사 자격증을 가지고 면접을 거쳐서 떳떳하게 입사했고 얼마 전까지 10년이 넘게 비정규직으로 일했다”며 “식기 세척기도 없고, 냉난방조차도 없던 시절에 한여름에는 같이 땀 흘려가며, 한겨울에는 손을 호호 불어가며 일했는데 교통공사에 근무하는 친인척이 있다는 이유 한 가지로 하루아침에 고용세습으로 특혜를 입은 비리의 당사자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최 씨는 “10년 넘게 같이 일했던 동료이자, 가족과도 같이 지냈던 친구였는데 미안해하며 제 시선을 외면할 때면 그 친구를 이렇게 매도하는 현실에 슬픔을 넘어 울화통이 치밀 정도”라며 “서울교통공사에 친인척이 근무한다는 사실이 잘못된 건가. 그동안 ‘식당 아줌마’라는 오명을 써가며 묵묵히 일해 온 사실을 도대체 우리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그는 “저도 고용비리에는 단호히 반대하고, 고용세습은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하지만 서울교통공사에 근무하는 친인척이 있다는 사실 한 가지로 모든 사람들을 ‘비리 당사자’로 낙인찍는다면 그건 저희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또 다른 폭력”이라고 말했다.

    특히 최 씨는 정규직이 된 후에 달아진 건 ‘정규직 사원’이라는 간판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직원을 더 채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주 52시간 근무시간을 억지로 맞추다 보니 초과근무가 음성적으로 이뤄져 초과수당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 씨는 “해야 할 일은 예전과 다름없는데 오히려 조별 근무인원은 대폭 줄었다. 정시 퇴근은 꿈도 못 꾸는 게 현실이고, 초과 근무 수당도 받지 못하고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라며 “휴가는커녕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휴일조차도 서로 옆 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며 날짜를 조정해가며 쉬어야 하는 게 지금 저희가 처해있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증언을 하는 노동자들 모습

    구의역 참사 김군 동료
    “목숨 내놓고 십 수 년 일한 우리가 무자격자라고요?

    이날 회견엔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사망한 김군의 동료 박 씨도 참석했다. 그는 올해 초 정규직 전환이 결정되면서 김 군과 못다 한 약속을 지킨 것 같아 기뻤다고 말했다. 이들의 정규직화는 지난해 김군 사망 1년이 되던 날, 자유한국당이 요구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전업무에 대한 외주화를 금지한다는 사회적 합의 아래 정규직이 된 이들은 서울교통공사 채용비리 의혹 이후로 ‘무자격자’로 매도됐다.

    박 씨는 “김 군과의 약속을 지키자고 했던 저희의 노력이 김군을 이용해 채용 잔치를 벌린 파렴치한들, 일자리 도둑, 채용비리 당사자로 내몰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저희 중에는 처음 PSD가 도입된 2005년부터 근무한 분들을 비롯해 경력을 가진 분들이 많다. 2016년 업무직 전환 당시에도 이런 경력을 근거로 전환 채용됐다. 그런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십수 년을 일해 온 선배님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들어와 수년째 일하고 있는 동생들더러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무자격자’, ‘황당한 근본 없는 채용’이라고 하니 억울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안전업무를 외주화했던 사람들, 김군을 죽게 만든 구의역 참사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매를 맞지도 않았고 사과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갑자기 너무나 혹독하고 무서운 얘기를 들어야 했다”며 “정규직 전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행위를 제발 멈춰 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채용과정의 비리가 있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만약 드러나는 비리가 있다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청업체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이 직영 전환이 되고 정규직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일자리 도둑’, ‘채용비리 당사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김군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12년 차 전동차 정비 노동자
    5촌 친인척 있다는 이유로 채용비리 당사자 ‘낙인’
    “언론과 정치인의 무서운 얘기들…죄인 된 심정”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같은 자리에서, 그저 성실히 해 왔습니다. 12년 동안 전동차를 분해하고 정비하고 새것처럼 조립하면서 나름 기술력도 있다고 자부합니다. 거대한 쇳덩이 전동차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건 그 과정에서 저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부정하게 입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07년 입사했을 당시 한 씨는 용역업체 소속으로 5~8호선을 담당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일했다. 당시 1~4호선의 서울메트로는 정규직 노동자가 한 씨와 같은 자동차 정비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도시철도공사도 2009년 공사가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용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되는 와중에 한 씨는 자회사로 편입된 몇 안 되는 이였다. 한 씨는 구의역 참사 이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가 올해 7급보 정규직이 됐다.

    한 씨는 “제 친척 중에는 서울교통공사 직원이 있다”며 “하지만 그 분과 평소 왕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이라고 하니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인가 보다 하며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이 벌어진 후에) 5촌 친척이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번뜩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연일 언론과 정치인은 무서운 얘기를 했다. 저는 큰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평소 왕래도 없는 5촌이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아무 잘못 없이 마음을 졸이게 됐다”며 “제 주변의 다른 동료는 차마 지켜보기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한 씨는 “채용비리 없어야 한다. 하지만 저는 저와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누구라도 우리가 잘못한 게 무엇인지 말이라도 해줬으면 할 때도 있다”며 “더 이상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해달라. 저는 제가 좋아 하는 일을 지금과 같이 제 자리에서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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