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 실업률, 최저 출산률 "부산 내게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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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22일 09: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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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5월 15일, 부산에 유세 지원을 위해 내려온 노회찬 의원은 부산 남구로 향했다. 한참 시민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칠순의 한 할매가 노의원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요새 김석준이 잘 있나?”

    민주노동당 대표 선수된 신동 김석준

    아니, 부산의 칠순 할매가 ‘노회찬’을 알아보고, ‘김석준’ 안부를 묻다니.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 노 의원은 그 할매에게 “우째 잘 아시냐”고 물었다.
    할매, 과거를 회상하듯 먼 산을 바라보며 하는 말씀.
    “내 김석준이 어릴 때부터 잘 안다. 우리 동네 ‘신동(神童)’이었지”

       
     

    아닌 게 아니라 5대 종손인 그는 경북 봉화에서 부산 우암동, 감만동 양철지붕 ‘뜨거운 집’에 터를 잡은 어린 시절 이후 가족들과 주변의 지대한 관심을 온몸으로 받으며 커왔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던 동네. 대문에서 바라보던 북항과 영도 봉래산의 세 봉우리.

    김후보의 할아버지는 약주 한잔 걸치시면 어린 손자를 불러놓고 “세 봉우리가 보이는 집에서는 정승이 난다”고 하시면서 ‘가문을 일으키고 큰 인물이 되라’고 하셨단다. 그 소리를 또 하시고, 또 하시고 했단다. 하지만, 인생에는 평탄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만동 신동은 감만동 출신으로는 최초로 부산중학교에 붙겠다고 자신했지만 입학시험에서 낙방했다. 2차로 동아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절치부심을 거듭하여 부산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 라이벌로 여기는 부산중학교 학생들 중 누가 공부를 잘하나 알아봤다. 그의 라이벌은 네 명으로 압축되었다. 부산중학교의 라이벌 중 하나가 지금은 의원이 되어 자신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러 내려온 노회찬 의원이었다.

    그러나 이 네 명의 경쟁자는 다들 서울에 있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김석준의 부전승으로 끝났다.

    네 명 중 세 명은 대학에서 만났지만, 고대에 입학한 노회찬은 만나지 못했다. 다시 김석준에게 노회찬이라는 이름이 들려온 것은 바로 ‘인민노련’이 등장한 그때.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김석준 후보는 ‘얼굴 없는 라이벌’이었던 노회찬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김석준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다. 둘의 관계는 맞수(?)에서 동지로 바뀌었다.

    우공(寓公)의 선택, 진보정당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신동(神童) 김석준의 자호(自號)는 우공(寓公), 어리석은 늙은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은 그의 인터넷 필명이다.

    전국 최연소 교수가 되었고, 촉망받는 연구자의 길을 박차고 민주노동당이라는 길로 들어선 것만 보아도 그의 호는 잘 지은 듯도 하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바라는 그와 필자의 견해로 봐서는 민주노동당은 ‘남는 장사’이기도 한데, 그리 보면 우공(寓公)인지 현공(賢公)인지 헛갈린다.

       
     

    2000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정책위원장의 역할을 하던 그는 박순보 선생에 이어 부산시당의 대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당시 연제구에 출마한 박순보 선생이 예상보다 못한 8% 지지에 머물고, 당은 등록해소가 되면서 일정하게 패배감이 엄습하던 시기였다.

    그는 당의 해결사 역할을 자처한다. “2년 남은 2002년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에 걸맞게 지방선거 준비팀을 꾸렸고.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두툼한 지방선거 공약집도 만들었고. 부산지역의 힘으로. 그러다가 부산시장 후보까지 나가게 되었고 지부장까지 하게 된 거지.”

    당시 그는 16.8%라는 높은 지지율로 민주노동당의 최대 승부처였던 부산, 울산, 경남 ‘진보벨트’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김석준 후보가 진보정당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동료들과 당시 김철이 이끌던 ‘사회당’의 강령을 구해 학습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그가 진보정당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은 ‘국민승리 21’이 만들어지던,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를 본격화하던 그 시기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노동자, 민중이 중심이 되는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97년, 민주노총의 개량화에 대한 우려들이 조금씩 싹트고는 있었고 정치세력화에 대해 수많은 문제제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결의를 했다. 입맛 맞는 거 찾으려면 어느 세월에 되겠나. 부족하더라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 노무현을 향한 일갈, “진보정당을 만들자”

    때는 1990년 1월 22일, 노동자 대중운동이 전노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던 순간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은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공표했다.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의원은 부산 신선성당 주임신부였던 송기인 신부에게 부산지역 재야 세력을 모아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전교조 교사들, 민교협 교수들, 민변 소속 변호사들, 청년학생들이 모여 비공식 연석회의 또는 간담회 형식으로 모였다. 민주당 잔류를 선언한 노무현, 김광일, 김정길 의원도 참석했다.

    이날 발제를 한 노무현 당시 의원은 “국민이 만들어준 여소야대 지형을 배신하고 3당이 합당했다. 야당하라고 했는데 여당으로 간 것은 시민을 배신한 것이다. 현재 민주당은 무주공산이다. 변호사, 교수, 교사, 청년학생 모두 민주당에 들어와서 지구당 하나씩 차지하자. 그러면 다음 선거에 모두 당선된다”고 말했다.

       
     

    김석준 후보는 노무현 의원을 정면에서 비판한다.
    “87년 대선 당시도 YS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노태우가 31%를 득표했다. 31%는 골수 보수층이다. YS 찍은 55%는 YS가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30%가 따라간다. 지금부터 정치지형이 바뀌는 거다. 부산은 이제 야당도시가 아니고 여당도시, 보수도시가 되는 거다. 노무현 의원이 정말로 노동자들을 위해서 싸운 국회의원이라면 민주당 같이 하자고 할 게 아니다. 기왕 3당 합당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참에 노동자 민중과 함께 진보정당 만들자고 제안하는 게 맞는 거다.”

    그날로 노무현 의원은 ‘삐껴서’ “교수, 재야하고는 다시는 같이 일 안 한다”고 선언했으며 판은 깨졌다.

    어쩌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리고 운동진영 전체에게 가한 일갈일지도 모른다. 거창에서 일어난 민주노동당 후보의 돈봉투 사건은 진보정당운동의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김석준 후보는 노무현 정부의 허점을 “사회 전체를 경영하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다.”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에게도 해당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복지 예산 30% 확대…임산부와 12세 이하 무상의료 실시

    민주노동당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의 선거 슬로건은 ‘서민행복특별시’이다. 지난 선거 때의 ‘4번타자 김석준, 부산을 바꾸자’의 슬로건에서 진일보한 느낌이다. 그만큼 민주노동당은 4년 전에 비해 부산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정책을 생산했다.

    “지난 선거 때 공약 중 많은 부분은 부산시나 중앙정부에서 상당 부분은 이미 시행하거나 시행을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 준비 과정에서는 빠진 부분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할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복지예산 30% 확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부산시 차원의 ‘임산부와 12세 이하 아동에 대한 무상의료 실시’이다.

       
     

    흔히 얘기하듯이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극히 미미하고 조세의 개혁을 수반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게 지역의 현실이다. 전국 최고의 (청년)실업률과 전국 최고의 비정규직율, 전국 최저의 출산율(0.98)을 자랑하는 부산에서는 무엇보다 복지공약이 필요한 조건이다.

    한나라당 허남식 후보는 2020년 부산 인구를 450만으로 예상했지만, 김석준 후보는 이러한 과도한 인구 예측이 난개발과 재정 낭비를 부추긴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고용평등과 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지자체의 계약준수제,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단계적 철폐, 중소기업 취업보조금을 통한 1만 명 청년 일자리 창출, 대형할인점 진입규제와 영업시간 제한 등도 내세우고 있다.

    부산시의 가용예산 8,000억 원 중 60%가 길 닦는데 들어가는 조건, 이것을 포기해야만 부산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부의 실업대책 예산 중 1/10만 부산에서 쓰면 청년실업을 상당히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노동당 부산시당의 돋보이는 점은 부산시 ‘자체 예산 확보’가 ‘가능하다’, ‘대안이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는 김석준 후보와 함께 1년 이상을 함께 해 온 부산시당 정책위원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 김석준 후보는 ‘부산박사’라는 별칭답게 1년 넘게 정책위원회 활동에 빠짐없이 결합해 왔다.

    민주노동당, 정파 구도 운동권적 선민의식 벗어나야

    사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참여정부로 많이 흡수되었고, 지식인운동의 양적인 노력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학생운동도 거의 소멸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할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김석준 후보 역시 이런 부분에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처방을 제시한다.

    “이제 대학에 기댈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대학의 교수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기대왔지만 이제는 할 사람도, 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다른 ‘진지’를 고민해야 한다. 당과 노동조합에서 일정하게 경험이 축적된 사람들, 검증받은 사람들을 우리는 당이라는 진지를 통해서 실력을 쌓도록 해야 한다. 20년 앞을 내다보고 운동사회와 당의 인적자원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인적망을 마련해 나가는 것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일할 사람도 없지만, 그나마 있는 사람들조차 정파와 이해관계 속에서 소통이 어렵거나 아예 없다.

    “인력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방선거 이후에는 이런 상황이 온다. 사회 내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자기내적 한계, 예를 들어 정파구조나 운동권적 선민의식 등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은 싫건 좋건 요구받게 되어 있다.

       
     

    당내 대중정치 지도자도 의도적으로라도 키워야 한다. 우리의 이상한 풍토중 하나는 자기보다 크면 눌러 앉히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 열린 마음을 가지고 크게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를 끌어올려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당의 외연도 넓어지고 실력도 커지는 것이다.”

    “실력 있는 대중정치 지도자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도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아닌 말로 ‘봉기’를 통해 집권한다고 해서 국민들이 인정해 주는 게 아니다. 확고부동한 지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을 ‘우공훈련소’로 만들어 한국사회 방향을 바꾼다

    지방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마련하고, 지방정부에서의 당선과 집권을 통해서 자기 역량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민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진보가 과격하고, 어설프고, 촌스러운 게 아니라 세련되고, 능력 있는 게 진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야 한다. 정책도 제일 낫네, 사람도 제일 낫네 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울산이나 부산 또는 광역단체가 아니라도 거제와 같은 기초단체 등에서 단체장이나 의원으로서 검증받고 실험하고 공유하고 실천해 나가는 진보적 지역정치의 광범위한 실천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김석준 후보는 지난 2000년 이후 지방선거 이전에는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지방선거팀을 준비했었고, 2002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진보를 위한 부산정책연구소’를 만들었다. 현재 여러 조건 때문에 연구소 활동이 도중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는 지역의 집권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그야말로 선두에서 고민하고 실천해 왔다.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외국 진보세력의 지방전략에 대한 책을 번역 작업하기도 했다. 만약 이 책이 조금 더 일찍 출간되었더라면 얼마 전 출간된 진보정치연구소의 『런던 플랜』과 함께 당원들의 필독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석준 후보의 눈에는 민주노동당이 명실상부한 ‘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우공훈련소(寓公訓練所)로서의 당을 만드는 것, 이 훈련소가 한국사회의 경로를 ‘역사적인 회군’을 통해 수정하는 꿈을 그는 지금도, 예전에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자기관리와 겸손의 대명사 김석준

    김석준 후보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겸손함에 놀란다. 어디서든 얼굴 붉히는 일이 없다. 점잖게 얘기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진보의 겸손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어떻게 보면 돌아가신 故 김진균 선생님의 풍모가 느껴지기도 한다.

    본인 스스로는 설레설레 손사래를 치겠지만. 자기 스스로를 우공(寓公)으로 낮추는 것, 그 능력이 그를 노동자 민중의 지도자로 붙잡아 두는 힘일 것이다. 노동자 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은 확실한 대안이고, 그는 민주노동당의 확실한 대안이다.

    그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세 번의 선거를 치러내면서 부산의 당원들은 그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여, 부산에서 김해까지 축구 원정경기를 다니고, 탁구, 달리기 등 못하는 운동이 없는 그다.

    등산도 즐겨하고 운동도 즐겨한다. 얼마 전 지명(知命, 50세)에 이른 그가 아직도 민주노동당 체육대회에서 각종 종목의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것을 보면 당으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직 당은 그를 부릴 수 있다. 그의 체력은 곧 부산당원들의 자존심이다. 부산시당 소식지에 실릴 예정인 어느 당원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난 2003년 민주노동당에는 ‘진사달’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이름 하여 ‘진보사랑 달리기 모임’. 김석준 후보와 더불어 음주가무로 상태 안 좋은 몇 명의 당원들이 주요 회원이었다. 마라톤 1시간 하고 뒷풀이 술을 몇 곱절 시간으로 마셨다. 술 마시기를 철인마라톤대회 수준으로 했으니 살이 빠질 이유가 완벽히 없다.

    결국 ‘진사달’ 모임도 반년 정도 유지되다 흐지부지 됐다. 하지만 김석준 후보는 매년 주요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달리기를 계속했다. 마지막 남은 ‘진사달’ 회원이었다. 지난 5월 7일 노동절기념 마라톤대회가 다대포 해안도로에서 있었다. 김석준 후보도 10km 코스에 참가했다. 김석준 후보의 전력을 잘 모르는 참모들은 대회가 있기 전부터 5km만 뛸 것을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석준 후보는 이날 10km코스를 59분34초99의 기록으로 완주해 참모들의 우려를 잠재웠다. 이 날 열린우리당 오거돈 후보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지만 500미터 정도 뛰고 말았다고 한다. 김석준 후보는 매년 노동절기념 마라톤대회와 각종 대회에 참가해 노동자, 서민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마지막 남은 ‘진보사랑달리기’ 회원 김석준 후보, 그가 진짜 노동자, 서민 후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박진현 부장)

       
     

    그는 오래 전부터 운영하던 자신의 홈페이지에 꾸준히 일기를 써오고 있다. 홈페이지 주소도 부산시장답다. 선거운동 하느라 새벽 한 두시에 귀가를 하지만 자신의 활동을 인터넷 공간에 꾸준히 알리고 있다.

    “어제는 밀린 거 이틀 치 쓰는데 정말 졸려가지고, 자판 두드리는데 눈이 감기더라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봤어요. 횡설수설한 거 같아서. 보니까 문장은 되더라고. 그래서 놔뒀어.”

    그의 세심함. 그의 자상함. 그의 겸손함. 그의 굳건함. 70년대 긴급조치 9호 세대인 그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에 투신한지 30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이력과 성품으로 봐서는 여전히 그에게 한국사회와 부산은 애증의 교착점이며 변화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을 탓하지 않는다. 무릇 우공에게 산을 옮기는 일은 단시간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한국 사회의 변화는 애초부터 자신의 평생의 과업이었다. 업보다. 그 업보를 모두가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것, 세대를 이어 해 나가는 것, 이것이 우공의 꿈이 아닐까? 더 많은 우공들, 젊은 우공들을 그와 내가, 우리 모두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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