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영근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역사의 한 페이지] 6.25전쟁과 고지전의 비극
        2018년 11월 07일 01:5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앞 회의 글 “원태우의 짱돌, 안중근의 권총 그리고 이재명의 비수!”

    “우리가 왜 악어중대인지 아는 사람?

    악어는 한 번에 약 50개의 알을 낳는다. 그 중 절반은 태어나기도 전에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된다. 또 알에서 깨어난 반 중에서 대부분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고 고작 한두 마리만 악어가 된다. 하지만 그 한두 마리 악어가 늪을 지배한다. 그게 악어다.

    12시간만 버텨라! 살아서 집에 가자!”

    -영화 [고지전]에서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신일영 대위가 중대원들에게 –

    화살고지에서 그가 돌아왔다. 이등 중사 박재권.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육신이 아니었다. 세월의 더깨가 두껍게 쌓인 차갑고도 딱딱한 유골이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65년 만인 지난 10월 24일이었다.

    이 날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반은 남북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철원군 DMZ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몇 개의 뼈 조각과 ‘박재권’이라는 이름이 적힌 인식표를 발견했다. 유골과 함께 발견된 수통에는 30여발의 총탄 자국이 있어 당시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 발굴은 6.25전쟁 후 비무장지대(DMZ) 내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 1호로 기록되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전사한 날이 화살머리고지 전투가 끝나기 하루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는 살아서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가 유골로나마 돌아온 65년 뒤 이 세상에는 그를 불철주야 기다렸을 부모도 이제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 박재권 이등 중사만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까? 6.25전쟁 당시 수많은 ‘박재권’이 고지전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사진] 박재권의 인식표를 배경으로 이등중사 박재권의 유해 발굴 소식을 전하고 있는 뉴스 화면. 고국’이라는 자막 표현이 다소 어색해 보인다. (MBC 뉴스 데스크 2018년 10월 25일)

    차영근…

    문득 차영근 상사가 떠올랐다.

    박재권 이등 중사가 아니었으면 나는 차영근 상사를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히 6.25전쟁 중 어느 병사가 남긴 수첩 하나를 수집하였다. 나는 역사적 사건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된 기록물들 수집을 좋아한다. 이 수첩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도 이런 맥락이었다. 이 수첩에는 1951년 3월부터 약 11개월간의 전쟁 상황과 부대 생활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고지전 형태의 전투가 주로 기록되어 있다.

    수첩을 열면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차영근’이란 이름이 이 수첩의 주인공이다. 이 수첩에 적힌 일기 내용을 토대로 추측해보면 그는 전북 김제 출신의 20대 청년이었다.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던 1948년 2월 군에 입대한 그는 그해 자신이 속한 부대의 일원으로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하사관 교육을 받고 하사가 된 이후, 1949년 4월 2등 중사, 1950년 6월 1등 중사가 되었다. 그 때 전쟁이 발발한다. 영근은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28일 낙동강 전투 중 청송에서 인민군의 기관총을 탈취한 공으로 무공 4등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상사로 진급하고 1951년에는 소대장으로 임관되었다. 고향 김제에는 부모와 세 형제가 살고 있었다. 군용 수첩에 그 날 그 날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는 꼼꼼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가 남긴 수첩에는 1951년 3월 2일부터 1952년 1월 22일까지의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강원도에서는 주로 고지전에 참가하다가 51년 겨울이 시작될 즈음에는 그의 부대는 배를 타고 후방으로 배치,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인민군 잔여 세력(‘共匪’)의 수색과 소탕 임무를 맡아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6.25전쟁 중 차영근이 남긴 전시 수첩이다. 이 수첩 속에는 11개월에 걸친 일기가 깨알같이 적혀 있다. 왼쪽은 수첩의 표지이고, 오른쪽은 수첩 안쪽에 적혀있는 일기의 한 페이지다. (박건호 소장)

    고지전의 비극

    차영근의 수첩 내용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6.25전쟁 중 왜 ‘고지전’이라는 형태의 전투가 치러졌는지부터 살펴보자.

    6.25전쟁은 발발 후 약 1년 만인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어느 측이 승리랄 것 없이 원점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이 38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을 벌이는 사이, 양측은 휴전 조건을 둘러싸고 지리한 공방을 벌이게 되는데,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사분계선 문제였고, 또 하나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이 중 군사분계선 문제는 4개월을 끌었던 쟁점이었는데, 공산군 측인 중국과 북한은 38선을 분계선으로 하자고 주장하였고, 유엔군을 대표한 미국은 휴전협정에 서명할 당시 양측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선, 즉 ‘현재의 전선’으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만약 공산군 측의 주장이 채택된다면 전쟁 이전 상태인 38선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그에 따라 그어지는 선은 직선이 될 것이었다. 반대로 유엔군 측의 주장대로 합의된다면 38선과 다른 새로운 선이 그어진다는 것이며, 그 선은 당연히 곡선이 될 것이었다. 이 쟁점은 결국 4개월 만에 유엔군 측의 주장대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런데 38선이 아니라 ‘현재의 전선’이라는 양측의 합의는 이후 전쟁 양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선이 그 선 같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38선으로 분계선을 삼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해보라. 그리되면 열심히 싸워 영역을 넓혀봐야 어차피 38선으로 선이 그어질 것이므로 치열하게 싸울 이유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전선은 자연스럽게 38선으로 수렴될 것이고, 무력시위 차원에서 가끔 공격을 가하는 정도의 저강도 전쟁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에서 ‘현재의 전선’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최종 휴전협정에 서명될 때까지 하나의 고지라도 더 차지해야 유리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전쟁은 막바지까지 치열하게 전개될 수 밖에 없었다. 통상 하나의 고지 점령이 인근 30∼40km의 지역을 점령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한다. 특히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휴전하는 것이므로 전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라도 양측은 하나의 고지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6.25전쟁의 마지막 2년은 38선 부근에서 하나의 고지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양측이 사생결단으로 싸웠던 것이고, 고지 하나의 주인이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뀌는 상황이 빈번히 일어났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고지 저 고지에 자신의 생명을 묻었던 것이다. 지금 휴전선 근처의 주요 고지들은 거대한 공동묘지라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이다. 글머리에 언급했던 박재권 이등중사도 이들 고지 중 하나인 화살머리고지를 뺏거나 혹은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했을 것이다. 수많은 전사자들이 분계선을 넓히는 과정에서 죽어갔다. 전선이 급격히 변동하던 첫 1년 동안에 희생된 군인들보다 고지전에서 죽은 군인들이 더 많다고 하지 않던가?

    [사진] 하나의 고지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전쟁 막바지까지 고지전 형태의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고지전의 비극을 그린 영화가 2011년 개봉한 [고지전]이다. 고수, 신하균, 이제훈, 류승룡, 김옥빈 등이 주연하였다. 왼쪽사진은 영화 포스터이고, 오른쪽 사진은 영화에서 고지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차영근 수첩 속 6.25

    이제 우리는 차영근의 수첩 내용을 통해 6.25전쟁을 만나볼 것인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먼저, 치열한 고지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과 전쟁에 대한 회의 같은 감정을 기록한 부분을 살펴보고, 이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기록한 부분도 살펴볼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약간 윤문을 하였으며, 해독이 되지 않는 부분은 ‘0’로 표시하였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당시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51년 3월 2일

    오전 4시 적의 불의의 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평창군 진부면 진부리에서 중대CP로부터 기습으로 인하여 고지 주력이 있는 데로 이동하여 날이 새였다. 그 후 연락 차 대대장에게 갔다. 또 다시 연락으로 고지에 왔다. 적에게 포위되어 1300고지에 6시간 몰래 엎드려 있고, 모 독립 가옥에서 11시간 몰래 숨어 있다가 아군이 재탈환할 때까지 있었다. 6차례에 걸친 인민군의 수색이 있었으나 천정 속에서 숨어 살았다. 그리하여 발에 얼음이 박히며, 천정에서 소변을 보았던 사실이다.

    아….잊지 못할 대관령…..

    아 나의 생명!

    8월 12일 일 비

    오늘도 비가 온다. 나의 호에서 00을 판다. 물이 난다. 이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8월 23일

    오늘은 우리 부대가 이동하는 날이다…오늘 이동하는데 벌써 비가 내린 지 1주일, 비가 와도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산악 80리가 넘는 이 험한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강원도 고성군 고수동면 984고지에 밤 8시 30분에 도착. 비를 맞고 산위에서 떨면서 날을 새웠다. 어찌나 인민군이 많이 죽었는지 냄새에 코를 들 수 없다. 호(壕) 속에 사체, 그 위에 앉았다. 아…인생의 일생 험하다.

    8월 24일 금 맑음

    오늘부터 교전이 개시. 중대는 부상자 8명 발생함. 전투는 치열함

    8월 25일 토 맑음

    924고지로부터 751고지로 전진. 계속 전투가 치열함.

    중대장 부상당함.

    8월 26일 일 맑음

    계속 전투. 적의 포탄이 심히 떨어진다. 눈코 뜰 새 없다.

    8월 28일 화 비

    비는 계속하여 내린다. 11사단 20연대는 884고지를 점령하였다. 오늘도 포탄은 계속 떨어진다. 호가 무너져서 2명 부상을 당하였다. 중대장이 없어 다른 날보다 더 바쁘다.

    8월 29일 수 흐림

    오들도 적은 끊임없이 포를 쏟아 포진지에 두 방이 떨어져 2명이나 전상(戰傷)당하였다. 전투는 계속된다. 6중대 공격하였으나 성공치 못하였다.

    8월 30일 목 맑음

    오늘은 비행기 보급을 많이 떨어뜨렸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였으며 일부 병사가 가서 주워왔다. 계속 포를 쏘며 떨어진다.

    9월 17일 월 맑음

    오늘 공격 차 오전 3시 30분에 배봉리를 출발 416고지에 도착. 적의 포탄이 막 떨어진다.

    [사진] 고지전에서 전사한 무명의 국군 사진이다. 그 옆에 떨어져 있는 구멍 뚫린 철모가 전쟁의 참상을 증언해 주고 있다(왼쪽, 인터넷 사진). 오른 쪽 자료는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 벌어진 고지전에서 전사한 소대섭 병장의 전사통지서이다.

    (출처는 https://blog.naver.com/gain_living/220773495882)

    9월 18일 화 맑음

    오늘도 전진. 약 2.4키로 진격하였다. 지뢰에 2명 부상당하였다. 지긋지긋하다.

    9월 20일 목 맑음

    175고지에서 대강리로 이동. 밤과 감자를 삶아 먹었다. 보급이 되지 않았다.

    아..배가 고프다. 그러나 군심(軍心)이다.

    9월 22일 토 맑음

    적의 반격. 야간 포사격을 실시함. 그리하여 미명(未明)에 적을 완전 격퇴시킴.

    10월 3일 수 맑음

    00 호를 완전히 구축하였다. 손바닥이 부러텄다.

    10월 12일 금

    월미산 공격이다. 중대는 포로 6명 장총2정, 88포판 1대를 노획하였다.

    금일은 1,2목표를 점령하였다.

    10월 13일 토 비

    오늘은 월미산 공격이다. 난공불락의 월미산이었지만 아군의 혈전에는 붙어있을 수 없다.

    오늘은 성공이다.

    10월 14일 일 비

    오늘은 어제의 공격을 계속하여 월미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성공이다.

    11월 1일 수 비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하루 종일 비가 와서 호가 샌다. 모두 골치를 앓는다.

    11월 2일 목 흐림

    오늘은 어제 비가 내린 것이 개의치 않고 계속 오나. 먼 산에는 눈이 하얗게 왔다. 백설이 날린다. 나는 공격준비의 포진지를 구축함

    11월 12일 일 비

    적의 기습이다. 약 1개 연대가 기습하여 반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도망쳤다.

    11월 13일 월 비

    적은 완전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나는 OP에 나와 처음의 적 기습이다.

    [사진] 안타깝고 슬픈 죽음이 남한 젊은이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북의 젊은이들 역시 한 식구의 아들이며 형제이며 아버지이며 남편이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어느 전사한 인민군 주머니에서 나온 사진이다. (미국 문서보관서 NARA 소장)

    치열한 고지전의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지시는가?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다.

    “그렇게 많이 죽였으니 당연히 지옥에 가야하는 건데,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없어서, 여기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영화 [고지전]에서 주인공 김수혁 중위(고수 분)가 죽어가면서 했던 이 말이 그래서 빈말로만 들리지 않는다.

    영근의 수첩에는 이런 전쟁의 상황 외에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후방 지역 작전을 하게 되는 51년 11월 말 이후에 자신의 고향과 친척집을 지나면서 잠시 들르지도 못하고 편지만 써놓고 가는 대목에서는 애잔한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아픔이 찾아온다. 영근은 1952년 1월 7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전쟁 중 군인이 그것도 소대장이 장례를 치르러 가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다. 영근은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그 날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아…자식이 아니다. 불효자다.”

    할 수 있는 것은 고향 쪽을 바라보고 아버지의 명복을 빌 뿐이었다.

    애당초 전쟁은 개인의 희노애락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전쟁은 난폭한 것이었다.

    1951년 7월 30일 월요일 흐림

    오늘 사단 3첩장과 경향신문사 기자단이 중대 일선 생활을 시찰하였다. 오늘도 집에서 편지가 아니 오는구나. 그리운 남쪽을 바라본다.

    8월 20일 월 비

    오늘은 0물을 만들었다. 손톱, 발톱, 머리카락 등 나는 이것을 만들 적에 문득 고향이 그리웠으며 모성(母性) 등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9월 15일 토 맑음

    오늘은 추석이다. 둥근 달을 바라보니 고향 산천이 새삼스럽게 생각나며 오늘도 소금을 찍어서 저녁을 먹었다. 탄식…

    9월 16일 일 맑음

    오늘도 저 달은 둥글다. 어머니 아버님은 더 달을 바라보시겠지.. 아…산악의 추석

    10월 20일 토 비

    형님과 동생의 서신을 받았다. 정근의 사진과 어머니 아버지의 사진 또한 받았다.

    사진을 손에 드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어머니…

    12월 17일 일 흐림

    다시 금산 방면으로 출발하여 금산 40리를 앞두고 하차하여 조식함. 고지 1개 배치되었다. 나는 백부집 앞을 지나면서 말 한마디 못하고 편지만 써서 떨어뜨렸다. 임실을 지나면서도 편지만 떨어뜨렸다. 그 심중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고향을 지날 때의 심중이야말로…

    [사진] 차영근의 수첩 중 1월 7일과 8일 일기 부분이다.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직후여서인지 다른 날에 비해 글씨체가 매우 거칠고 흐트러져 있다. 글씨도 울고 있다. ‘아….子息이 않이다. 不孝子다…’로 시작해서 ‘아….아버지’로 끝나고 있다. (박건호 소장)

    1952년 1월 7일 일 맑음

    아…자식이 아니다. 불효자다.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접하고 가지 못한 신세

    나는 한없이 상부(上部)를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고향을 향하여 아버님의 0000에 명복을 빌었다.

    1월 8일

    군인 생활이란 이런 것인가…

    아 아버지–

    1월 9일 화 맑음

    산청에서 진주로 하여 하동으로 하여 화개장 경유 신흥에 도착 방어.

    돌아가신 아버지에 무어라고 사죄하면 좋을지 솔직히 말하면 자식은 부모를 생각지 않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셔도 가보지 못한 이 불효자…

    비무장지대에 부는 평화의 바람

    이 일기가 끝난 시점 이후 우리는 차영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수첩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결국 전쟁은 끝이 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서명된 휴전협정 규정에 따라 쌍방 군대의 접촉면에 따라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 하구에서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 동해안에 이르는 총 248km의 선이다. 이 선이 바로 ‘휴전선’이다. 3년 전쟁의 결과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고, 주변의 고지들에 수많은 젊은이들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은 이제 역사가 되었고, 그 지역은 사람이 쉽게 출입할 수 없는 금단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사진] 휴전협정 체결 직후 휴전선의 모습.

    그리고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충돌을 피하기 위해 쌍방이 각각 2km씩 뒤로 물러나 양측 사이에 완충지대를 두게 된다. DMZ라고도 불리는 ‘비무장지대’이다. 이 비무장지대는 총 길이 248km, 면적 907㎢의 공간으로 ‘휴전선’, ‘판문점’ 등과 함께 현재 남북의 분단 상황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이 비무장지대의 넓이는 서울시 면적의 1.5배이며 한반도 전체면적의 250분의 1 수준이다. 6.25라는 이 비극적 전쟁은 큰 재앙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역설적이게도 세계 생태계의 보고를 한반도에 남겨주었다.

    남북의 합의에 따라 비무장지대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고지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에 대한 유해 발굴이 곧 시작될 것이다. 이제 곧 박재권 이등 중사의 뒤를 이어 수많은 당시 살아서 집에 돌아가지 못한 고지의 젊은이들이 65년의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곧 깊은 잠을 깰 것이다. 해원(解冤)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날 치열하게 총 들고 싸웠던 남북의 군인들은 곧 비무장지대에서 같이 삽과 호미, 브러쉬를 들고 고지의 외로운 넋들을 불러낼 것이다.

    너무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비무장지대는 이제 총을 내리고 평화를 모색하고 있다. GP들도 시범적으로 폐쇄를 하고 있다. 한반도에 찾아온 이 평화의 훈풍을 고지전에 죽어갔던 남북의 수많은 청년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사진] 전쟁의 상처를 삼킨 나무들은 그동안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흘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자연이 전쟁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듯 우리의 역사도 이 전쟁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사진출처 http://cafe.daum.net/shelter9/d3pA/709)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