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
    2006년 05월 19일 12: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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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출판된 첫 한글 번역본의 표지

<코스모스>는 원래 TV다큐멘터리가 먼저 기획되고 방송을 위해 준비한 자료들을 덧붙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동명의 다큐멘터리는 국내에서도 방영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책이 나온 지 26년이 지났고 그 사이 저자인 칼 세이건 박사도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천문학과 관련 과학의 발달정도를 고려하면 이 책은 이미 낡아도 한참 ‘낡은’ 이야기가 됐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코스모스>를 꾸준히 읽고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저 밤하늘에 저 너머에 있는 별나라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우주에 있는 무수한 별나라들 중 하나인 우리 ‘지구’와 그 별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지구인들의 미래로 끝맺고 있다.

예를 들어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저자는 12세기 일본의 내전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처럼 쉬운 이해를 위해 동원된 예시들은 그리스의 철학자들부터 20세기 미국의 공상과학소설 작가들까지 다양하다.

칼 세이건은 저 머나먼 별들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별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인류에 관해 이야기하는 완벽한 철학책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비유가 날아가는 우주선만큼이나 비약적이기는 하지만, 인류가 달에 다녀온 세상에서도 여전히 플라톤의 책이 읽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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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코스모스>를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외계인의 존재에 관해 논증하는 대목이었다.

칼 세이건은 책을 쓴 1980년 당시의 천문학과, 생물학과, 지질학의 성과들을 총동원해 우주 공간에 지적 생물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여러 가지 변수를 가지고 계산하는 공식을 선보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은하계의 별의 수에서 생물이 살만한 조건을 갖춘 별들을 추려내는 식으로 계산이 진행된다. 저자가 직접 고안한 것은 아니고 ‘드레이크 방정식’이라는 유명한 가설을 이용한 것이다.

여기서 지적인 생명체란 로마시대 정도의 기술수준이 아니라 20세기 인류 정도의 기술수준, 그러니까 전파 망원경을 써서 지구와 교신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문명을 가리킨다. 아무리 발달된 외계 문명이 존재해도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산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답이 0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최소한 ‘지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답은 1과 같거나 큰 수이다.  칼 세이건의 생각으로는 답은 ‘10개 이하’다. 즉, 이 우주에서 월드컵 경기를 위성중계 할 수 있을 만큼의 기술문명이 ‘과거에 멸망하지 않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별은 지구뿐이거나 아니면 최대 10개까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칼 세이건 자신도 책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변수들을 최대한 ‘희망’적으로 대입했을 때의 결과다. 드레이크 공식은 변수의 폭이 워낙 엄청나기 때문에(이 공식의 첫 번째 변수 값은 은하계에 존재하는 4천억개의 항성이다!) 초기 변수에 조금만 변동이 생겨도 계산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사실 드레이크 공식의 값은 ‘1’, 즉 ‘지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현대 천문학계의 정설이다.

드레이크 공식은 외계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높지만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해 문명을 만들고 지금까지 오는 시간이 우주의 시계로는 재채기 한번 할 만큼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기술문명이 우주의 같은 시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설혹 존재한다하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 UFO같은 건 과학적으로 볼 때 실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칼 세이건 조차도 이 인정하기 힘든 ‘사실’을 솔직히 기록하고 있다. 그게 과학이니까.

그런데 칼 세이건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또 다른 책을 썼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콘택트>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 별들을 동경하던 마음을 담아 외계의 문명과 전파망원경을 이용해 접촉(콘택트!)하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과학자로서 외계의 문명이 실재하기 힘들다는 ‘실체적 진실’을 인정하지만 ‘인간’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간직했고 그의 일생을 별들에 대한 연구에 투신하게 만든 그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견 모순돼 보이지만 그 모순이 인간을 지구에 머무르지 않고 우주로 향하게 하는 ‘힘’이라고 두 권의 책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한 사람이 또 있다. 50년 먼저, 미국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한 감옥에 수감된 공산당의 지도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신을 감옥에 가둔 파시스트들이 활개치는 세상을 보며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노트에 기록했다.

과학적 이성으로 무장한 냉철한 사회주의자의 눈으로 볼 때 혁명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러시아와 같은 후진적인 사회구성체에서는 볼셰비키의 방식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이탈리아와 같은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은 어려운 일이다. 사기꾼이 아니라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면 내일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식의 망상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반면, 두뇌가 아니라 심장으로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이 독점과 독재로 얽힌 현대사회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도 없다. 내일 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1년 뒤에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10년 뒤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 자본주의가 철폐될 날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버텨야 한다고 그람시는 믿었다. 비록 주의주의자라는 욕을 먹더라도 혁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과학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들여다보니 어린 시절의 꿈은 ‘부정’되어 마땅했지만 그게 가슴 한 구석에 품은 ‘희망’을 포기할 이유는 아니었다는 칼 세이건과 감옥 안에 갇혀서 파시스트들의 행진을 바라보면서도 그 군화발 밑에서 희망을 보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렇게 서로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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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과학자로 알려진 칼 세이건은 80년대 핵무장해제운동과 특히 레이건 행정부가 인공위성을 통해 미사일방어시스템을 만든다는 ‘스타워즈’계획에 앞장서서 반대했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코스모스>의 또 다른 발견은 외계인의 존재를 가지고 ‘타자’의 개념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에 써있는 것보다 100배는 더 쉬운 방식으로 ’타자‘의 존재와 타자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곳 원주민들의 접촉 방식부터 SF소설에서 외계인이 다루어지는 방식까지를 훑어보고 저자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외계인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만큼 우리 스스로는 ‘다른 것들’, ‘이질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을까?”

그가 책을 쓸 시점에서는 불과 얼마 전의 사건이었던 미국의 대규모 흑인폭동을 생각해보면 외계인들의 입장에서 과연 지구인들과 접촉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의문이다. <코스모스>에서 칼 세이건은 존재하지 않는 우주인들을 통해 ‘타자’에 대한 우리 문명의 폭력성을 조용히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고 있다. 저자는 정말로 우리 인류가 외계의 문명과 만나고 싶다면 우선 우리 문명이 멸망하지 않고 유지돼야한다는 간단한 진리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그가 책을 쓴 1980년은 여전히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로 서로를 겨눈 채 긴장을 유지하던 냉전시대였다. 사소한 충돌이 인류를 한번도 아니고 수십번이나 멸종시킬 수 있는 양의 핵무기가 발사준비상태로 대기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칼 세이건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과학이 별들을 탐사하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대륙간탄도탄의 기술을 발전시키고, 레이건 정권 아래서 ‘스타워즈’라는 요상한 이름의 군사기술로 이용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두께가 제법 되는 <코스모스>의 마지막은 “단 하나뿐인 지구”가 어떻게 하면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 될 수 있는지 경고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양심적 과학자였던 그는 철학과 역사 이야기로 시작한 이 과학책의 결말을 결국 정치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늘에 빛나는 별들에 대한 사랑은 결국 “이 지구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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