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빵정신’이 아니라 ‘함께 맞는 비’
    [기고] 전태일정신의 실천적 함의는 무엇인가
        2018년 10월 31일 02: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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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팔이, 구두닦이, 솔·조리장사, 리어카 뒤밀이 등 거리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전태일은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인 1965년 가을, 마침내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시다로 취직했다. 이미 봉제공장 경험이 있는 전태일은 남달리 기술을 빨리 익혀 미싱사가 되었다. 길거리를 배회하던 전태일로서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눈에 비친 평화시장 노동현실은 지옥과 같았다. 특히, 겨우 나이가 15·16세 어린 노동자들이 먼지구덩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하루 14시간씩 노동하면서 저임금에 허덕이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전태일은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밤늦게까지 시다 작업을 할 때면 자신이 대신 해 주기도 했다. 돈이 없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어린 노동자들을 볼 때는 자신의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서 나눠주고 정작 자신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도봉구 쌍문동까지 걸어가다 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 신세를 지고 출근하기도 했다.

    전태일의 이 같은 선행(善行)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태일은 ‘시들어가는’ ‘나약한 생명체들’을 살리기 위해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선행을 베풀었다. 그런데 만약, 전태일의 선행이 여기에서 발전하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 속에서 살아있는 전태일이 아니라 ‘착한 청년’ 전태일로 기억되다 잊혔을 것이다.

    전태일의 선행은 실천을 통해 계속 진화했다. 동료의 밀린 일을 대신 해 주고 굶주린 동료를 위해 풀빵을 사주는 것에서 출발해 공장 내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작업조건 결정에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 재단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해 기능공 대우를 받는 미싱사를 포기하고 재단 보조가 되었다. 이후 재단사가 된 전태일은 시다와 미싱사 등 약한 노동자의 입장에 서보았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개별 공장단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청계천 제품업계 전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을 비롯해 힘을 가진 기관에 호소도 해 보고 진정도 해 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사탕발림과 속임수뿐이었다.

    평소 자신과 법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전태일은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즉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하면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근로기준법 준수 운동을 하는 전태일은 또 다시 좌절하게 된다.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고 도리어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다는 것이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것에 분노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더러운 부자의 거름이 돼야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 부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인간, 노동하기 좋은 환경에서 거부당하고, 사회라는 기구는 나이 어린 사람들을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부자가 더 살찌기 위한 거름으로.”

    전태일은 실천을 통해 자신이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인간’의 문제는 결국 사회 구조적인 문제임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침내 전태일은 이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스스로 각성하고 단결하고 투쟁을 통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전태일은 이것을 호소하기 위해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 스물 두 살의 육신을 불태워 산화한 것이다.

    청계천 평화시장 근처의 전태일 동상

    전태일 정신은 전태일이 온 생애를 바쳐 투쟁하고 그 투쟁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정신을 말한다. 아울러 전태일 분신 이후 48년간 전태일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투쟁해온 노동자, 농민, 서민 그리고 민주시민들의 투쟁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전태일 정신은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중생존권 투쟁의 상징이며 고귀한 역사적 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이런 ‘전태일 정신’을 이른바 ‘풀빵 정신’으로 치환(置換)시키고 있다. 전태일재단은 언제부터인가 전태일 정신 대신 전태일이 시다들한테 자신의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준 것에 집중해 이른바 ‘풀빵 정신’을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 더해 문성현 노사정위원장은 “전태일은 재단사였고 지금으로 치면 잘 나가는 정규직이었는데, 자기 차비를 아껴서 일명 ‘시다'(보조)로 불리던 비정규직들한테 풀빵을 사주곤 했다”면서 “우리가 최저임금 1만원을 실현하려면 전태일의 ‘풀빵 정신’으로 가야 한다” 며 이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노동자들이 열심히 투쟁한 성과를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전태일의 그 많은 실천에서 ‘풀빵’ 건만 빼내서 ‘정신’을 갖다 붙인다는 것은 전태일 정신을 거세(去勢)시켜 전태일을 ‘착한 청년’으로 한정시켜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른바 ‘풀빵 정신’에서는 구조적인 모순을 볼 수 없다. 거세된 전태일 정신에는 노동 대 자본 관계가 없다. 이것은 지배논리에 이용되기 쉽고, 자본의 입맛에 딱 맞는 구도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교훈이 ‘근면·검소·성실’이었다. ‘근면·검소·성실’이라는 말 자체야 나쁜 말이 아니지만 독재 권력이 가르치면 지배논리가 된다. 어린 학생들이 근면하지 못하면 얼마나 게을렀을 것이며, 촌뜨기 어린애가 사치스러우면 얼마나 사치스러울 것이며 한창 뛰놀 시기에 불성실해봤자 신나게 놀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 제도교육에서 노동교육이 없다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이른바 ‘풀빵 정신’ 역시 저임금, 고용불안, 노조 할 권리 박탈 등 자본의 횡포는 근본적인 원인이 총자본에 있다는 것을 숨기고 노동자 내부의 문제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음모가 누구에 의해 왜 생기는 것인가? ‘풀빵 정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노동운동을 청산한 자들이거나 상층 노조운동에 몸담고 사회연대를 외치는 자들이다. 자본의 입맛에 맞게 이런 따위의 풀빵 옆구리 터지는 소리를 고안해 뭔가를 얻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전태일이라는 상징성 있는 상품을 요리해 시장에 내놓았고 권력과 자본이 이것을 이용하고 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연대의 의미를 고 신영복 선생이 ‘함께 맞는 비’로 표현했다. 전태일 정신은 ‘풀빵정신’이 아니라 ‘함께 맞는 비’가 맞다.

    필자소개
    전 청계피복노조 위원장.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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