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신문' 노동기자의 노동운동을 보는 관점
    By tathata
        2006년 05월 19일 05: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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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신문>의 윤기설 노동전문기자가 오랫동안 ‘노동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제 5의 권력」을 출간했다.

    ‘제 5의 권력’이란 노동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노동계가 입법 사법 행정과 언론에 이어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뜻한다. 윤 기자는 “한국의 노동세력은 거의 견제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다는 점에서 제 5의 권력으로 지칭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총 270여페이지의 분량의 이 책은 ‘군림하는 노동권력’, ‘노동 이데올로기의 폐해’, ‘생동하는 노동현장’, ‘지구촌 신자유주의 열풍’의 4부로 엮어져 있다.

    책의 일관적인 기조를 요약하면 한국의 노동운동은 ‘공공의 적’인 대기업 노조의 ‘집단이기주의’가 판치고 있으며, ‘투쟁만능주의’ ‘폭력만능주의’ ‘습관성 파업’으로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부자신문들의 틀에 박힌 논리를 새로울 것 없이 반복하고 있다.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서서히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나온 이 책이 노동계를 한국사회의 ‘제 5의 권력’으로 명명하는 것은 과연 무슨 연유에서일까라는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 독서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노동계가 ‘제 5권력’이라면 대접은 어디로?

    왜냐하면 윤 기자의 말대로 노동계가 ‘제 5의 권력’이라면 노동자가 왜 손배가압류를 철회하라며 분신자살을 해야 하며, 비정규직의 차별을 철폐하라며 100미터에 이르는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여야 하는 것인지, 왜 21세기에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고, 시위현장에서 경찰에게 폭력진압을 여전히 당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계가 “무소불위의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라면 ‘권력답게’ 대우받아야 할 테지만,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자’임을 선언하는 순간 노동자에게는 구속 수배, 집단해고, 손배가압류, 용역깡패의 폭력, 생계의 위협을 받는다. 그런데도 왜 ‘제 5의 권력’이라는 말인가.

    윤 기자가 보기에 “노조는 여러 노조원들의 불만을 한꺼번에 모아 회사 측과 교섭을 통해 풀어가는 완충역할을 한다”(147쪽). 즉 노조는 작업장 내에 노동자들이 가지는 불만을 단체교섭을 통해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창구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노조는 작업장 내의 고충을 처리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노동자는 ‘공장의 담장’에 만족해야 한다는 말이다.

    직접고용과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노동조건 개선과 경영참가를 주장하고, 산별노조를 건설해 산별교섭을 추진하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노조는 노조가 아니라 ‘권력’이라고 그는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윤 기자는 노조가 ‘고충처리위원회’ 이상의 요구를 하고 있으므로 ‘제 5의 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노조가 그 이상의 행동을 할 경우에는 손배가압류를 해서라도, 최루탄을 동원하는 진압을 해서라도 막아야 한다. 그리고 부자신문의 기자로서 때로는 사실을 왜곡해서라도 막아야 한다.

    “민주노총이 배달호 열사의 죽음을 조직했다”

    “파업만능주의에 빠진 노동계도 배(달호)씨의 사망에 일말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배씨가 죽은 뒤 노동현장에는 노동자의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한 마디로 출동적인 자살이 아니고 조직적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얘기다…노동자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긴다면 민주노총도 하루빨리 투쟁방식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129~130쪽)

    두산중공업의 배달호 열사는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저항해 파업을 하고 해직을 당한 후에도 회사 측의 손배가압류로 6개월 이상 월급을 받지 못해 분신으로 저항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윤 기자는 노조의 불법파업으로 이같은 문제가 일어났으며, “파업문화만 제대로 형성됐어도 한 노동자가 목숨을 벌이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본문 어디에도 노동조합의 당연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기업이 손배가압류를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나아가 배달호 열사의 죽음에 민주노총이 책임이 있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공공의 적’인 대기업 노조를 도마에 올릴 때에도 윤 기자의 사실 축소와 왜곡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를 말할 때마다 단골소재로 지금은 GS칼텍스가 돼 있는 LG정유 파업의 사례를 든다.

    대기업 노조는 이기적이어야 한다”

    “연봉 7,000여만 원으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이 회사 노조가 파업을 벌인 이유는 임금 10.5% 인상과 5조3교대 등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27쪽)

    그는 파업 당시 노조가 “임금인상보다 다른 요구 합의가 더 중요하다”며 지역사회발전기금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주요 교섭 요구안으로 내놓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대기업노조 이기주의를 말하기 위해서 노조가 이기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또 LG정유가 파업복귀를 선언한 이후에도 서약서와 경위서 작성, 노조와 민주노동당 탈퇴를 강요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LG정유가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 23명을 해고하고, 235명을 감봉하는 등 총 647명의 대규모 징계를 강행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야 할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축소와 은폐를 넘어 왜곡에 가깝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버거울 만큼 많은 사례들이 이에 속한다. 그는 현대자동차 부품협력업체의 납품단가 인하가 현대차노조의 임금인상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직접적인 근거를 대지 못한다. 현대차가 ‘비상경영’을 선언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은 없다. 현대차노조는 ‘파업중독증’에 빠졌다는 말을 되뇌일 뿐이다.

    공무원노조가 파업을 하는 것은 “법을 우습게 아는 풍토”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필수공무를 제외하고 파업이 허용되지만, 정부에서 파업중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64쪽). 물론 그렇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소방직과 경찰직 공무원에게도 노동기본권을 인정하며, 단체교섭의 범위도 정부 예산과 정책에 이르기까지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한국의 공무원노조특별법이 선진국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그는 말하지 않는다.

    울산플랜트노조원들이 물리력을 동원한 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맨 바닥에서 더 이상 점심을 먹을 수 없다”며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불법다단계 하도급을 근절하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수개월동안 교섭에 응하지 않았고 해고로 맞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왜’를 묻지 않는 기자

    그의 글에는 ‘왜’가 없다. 기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왜’라는 질문이 생략된 채 현상만이 열거돼 있다. 고공농성, 단식농성, 삭발, 점거시위, 분신 등에 대해 노동자의 과격시위를 질타할 뿐 노동자들이 왜 투쟁할 수밖에 없는 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외면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경찰의 안이한 대응방식이 폭력을 불러온다는 지적이 많다. 사회 전반에 부는 민주화 바람을 타고 경찰이 최루탄 등을 동원한 공격적 시위진압을 지양하고 방어에만 주력하다보니 시위문화가 더욱 거칠어졌다는 분석이다.”(122쪽)

    윤 기자는 이제 물대포와 용역깡패도 모자라 “최루탄 등을 동원한 공격적 시위진압”마저 주문하는 섬뜩함마저 보이고 있다. 그리고 무노조, 신자유주의를 노조도 받아 들어야 한다는 ‘숙명론’을 제시하고 있다.

    애초의 ‘제 5권력’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품었던 것이 잘못된 것일까. 노동계를 향해 ‘몸에 좋은 쓴 소리’를 조금은 기대하며 경청할 부분이 없을까를 살펴보았지만, 허탕만 치고 말았다. 노동계의 비리는 아무리 비판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윤 기자의 글에는 새로운 관점이나 대안은 없고 환기 이상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민주노총의 정파분석 또한 과잉정치화에 대한 비판은 있지만 노동조합 내부의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되살릴 고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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