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우의 짱돌, 안중근의 권총,
그리고 이재명의 비수!
[역사의 한 페이지] 이토 히로부미 노린 3명의 다윗
    2018년 10월 26일 12: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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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김유신은 어떻게 유신의 아이콘 되었나?”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그 블레셋 사람(골리앗)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사무엘상 17장 41~49절

작년에 수집한 자료 중에 『일로전쟁(日露戰爭) 사진화보 제39권』이 있다. 명치 38년(1905년) 12월 8일 일본에서 간행된 러일전쟁 관련 화보집 중 하나로 을사늑약 체결 직후에 나온 것이다. 을사늑약은 이 책이 나오기 대략 20일 전인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되었다. 그런지 이 책에는 ‘경성회의’라는 이름으로 2장의 그림이 게재되어 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정작 관심이 가 수집까지 한 이유는 딴 데 있었다. ‘경성회의’ 그림의 뒤쪽에 실려 있는 흥미로운 그림 하나 때문이었다. 갓을 쓴 한 조선인이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그림 위에는 ‘가소로운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사진] 왼쪽은 러일전쟁 관련 화보집으로 일본에서 간행된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박건호 소장), 오른쪽은 ‘가소로운 한국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이게 뭐지…?

단순히 기차에 돌멩이 던지는 한국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제목 아래 붙은 영문 제목을 보고 알 수 있었다.

‘A foolish Korean offering an insult to Marquis Ito’.

분명히 Ito(이토)라고 썼다. 이 당시 이토라면 이토 히로부미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토를 공격하는 한국인이라면 꽤나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부연 설명이 이 그림 왼쪽 날개에 붙어있다.

“11월 22일, 이토(伊藤) 대사가 하야시(林) 공사와 함께 한국 수원으로 사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탑승한 기차가 오후 7시경 영등포 정거장 부근에 접어들자, 한국의 폭도 한 명이 대사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졌는데 돌은 겨우 유리창을 깼을 뿐으로 대사 일행은 무사했다. 폭도를 체포하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으로서 대사가 탄 기차인 줄도 모르고 술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던졌다고 한다.”

일본이 애써 의미를 격하시키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이 사건에 대해 역사 공부를 꽤나 한 것으로 나름 자부하는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역사 교과서에 실린 적도, 일반 개설서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리 저리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이 ‘가소로운 한국인’은 원태우(元泰祐)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온 나라가 비분강개할 때 원태우라는 농민이 이토가 탄 기차를 돌멩이로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닷새 뒤였다. 나도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성공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만 주목했지, 실패한 의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었다.

“의기(義氣)는 이뤄지기도 하고 이뤄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이 매우 분명하고 자신들의 뜻을 바꾸지도 않았으니, 그들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어찌 망령된 일이겠는가”

일찍이 사마천이 『사기』의 ‘자객 열전’을 쓴 까닭을 밝히며 한 말이다. 그 의거가 실패했든 성공했든 우리가 그 이름을 알고 뜻을 새기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번 글은 원태우 의사를 포함하여 이토를 노린 세 사나이를 정리해 보려 한다. 원태우 의사, 안중근 의사, 이재명 의사이다. 특히 안중근 의사보다 덜 알려진 원태우, 이재명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제국의 전 내각총리대신이자 추밀원 의장, 그리고 초대 한국통감이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을사늑약을 강요한 장본인,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인식되지만, 일본에서는 1963년부터 1984년까지 20년 가까이 일본 천엔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들어갈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박건호 소장)

원태우 의사 – 짱돌로 이토에 맞서다

원태우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1882년 3월 4일 안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태근으로도 불렸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당시 23세 나이였던 원태우는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에서 사냥을 하고 그곳에서 기차로 안양을 거쳐 서울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날은 11월 22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1월 17일로부터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전 민족의 울분과 분노가 천지를 진동하던 때였다. 원태우는 동리 친구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과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선로에 커다란 돌들을 깔아 기차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거사 장소는 서리재로 오늘날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 방면으로 약 400미터 지점인 안양 육교 아래였다.

그들은 저녁 무렵인 오후 6시경 어둠을 이용해 큰 돌들을 선로에 깔고 이토가 탄 기차를 기다렸다. 계획대로라면 곧 이토가 탄 철도는 6시 15분 경 이곳을 지날 것이고, 기차는 선로에 깔아놓은 돌들로 인해 그대로 선로를 이탈해 공중으로 치솟아 전복할 것이었고, 이토는 죽거나 큰 부상을 입을 것이 분명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기 몇 분이 지났을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기차가 다가올 시간이 되기 직전 친구 이만려가 목숨을 건 이 거사에 겁을 먹고, 갑자기 뛰어 내려가더니 선로에 깔아놓은 돌들을 다 치워버렸다. 당황한 원태우는 다시 돌을 깔려고 했으나 이미 기차가 시야에 들어오는 상황이라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일행들이 도망을 하는 가운데 원태우는 단독 거사를 결심하는데, 짱돌로 이토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시 열차의 속도는 시속 20∼30킬로미터 내외로 오늘날처럼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원태우가 위치한 곳은 약간 높은 비탈길이었으므로, 그 아래 선로로 달리는 기차를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기차 창문 안에 이토로 보이는 인물이 보이자 원태우는 분노의 마음으로 그를 향해 짱돌을 힘껏 던졌다. 창문이 깨지고 그 창문 파편이 이토의 얼굴 여덟 군데에 박혔다. 이토가 뇌진탕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실제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토 일행은 크게 놀랐고, 기차는 응급처지를 위해 한 시간 이상 멈춰 섰다. 사건 직후 원태우 지사와 동료들은 안양역에서 일하던 철도 노무자의 제보로 잡혔다.

이튿날 전보를 통해 이토 피습사건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일본 증시가 한때 폭락하기도 했다. 『일로전쟁 화보집』에 실린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사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술 취한 우매한 농민의 우발적인 행동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이 사건을 접하고 즉시 사과 서신을 이토에게 보내고, 사건 책임을 물어 시흥군수를 파직하고, 경기도 관찰사를 견책 처분하였다.

[사진] 안양 역사에 있는 원태우 의사 부조상(浮彫像)이다(왼쪽),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다윗)상이다. 거인 골리앗에 돌을 던지기 전의 팽팽한 긴장감을 표현하고 있다. 원태우 의사가 이토를 향해 짱돌을 던질 때도 저런 비장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오른쪽)

이후 원 의사는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대의 처벌을 받고 이듬해 1월 석방되었다. 사건에 비해 약한 처벌 수위였다. 이는 원 의사에 대한 가혹한 처벌로 한국인들이 자극받을 것을 우려한 이토가 처벌 수위를 낮추도록 지시한 결과였다. 당시는 민영환, 조병세의 자결, 을사의병의 발발, 학생들의 동맹 휴업, 상인들의 철시 투쟁 등 을사늑약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이 강렬할 때였다. 석방된 원 의사는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으며,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으로 평생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중 타계했다. 당시 그의 나이 69세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90년 8월 15일 노태우 정부는 원태우 의사의 의거 85주년이자 원 의사 서거 40주년을 맞이하여 원 의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 후 평촌 자유공원에 원 의사의 동상이 세워지고, 짱돌을 던진 곳에 표지석이 설치되고, 안양역 계단 벽면에 원 의사의 부조 조형물이 새겨지는 등 그의 뜻을 기리는 각종 기념물이 조성되었다.

한국인의 이토 공격 1호로 기록될 이 사건은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원태우 의사의 의기는 안중근 의사 못지않았다. 만약 원태우 지사의 의거가 성공하여 이토가 죽었다면 우리가 아는 안중근 의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태우 의사의 한(恨)과 과제는 그대로 안중근 의사에게 넘겨졌다. 이제는 안 의사를 만나보자.

안중근 의사 – 이토를 쏘고 ‘코레아 우라’를 외치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하여 제거한 안중근(安重根) 의사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라 자세한 언급을 피한다. 대신 거사의 취지와 그 날의 상황 등을 안중근 의사가 직접 기록한 글을 통해 들여다보자. 제3자의 어떤 말이나 글보다 훨씬 생생하지 않겠는가?

[사진] 안중근 의사의 모습으로 거사 당시 31세였다. 단지동맹을 맺으며 손가락을 잘라 손가락 한마디가 없다.(왼쪽),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이탈리아 화보신문으로 1909년 11월 7일자이다.(박건호 소장)

“9시쯤 되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와서 닿았다. 나는 찻집 안에 앉아서 그 동정을 엿보며 생각하였다. 어느 시각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 십분 생각하였으나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즈음 이윽고 이토가 차에서 내려오자, 각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터져 일어나고 3천 길 업화(業火)가 머리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가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어찌하여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다시 더 말할 것 없이, 나는 곧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나가,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에까지 이르렀다. 앞을 보니,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횡행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저것이 필시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하며 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신속히 4발을 쏘았다.”

– 안중근, [안응칠 역사] 중에서-

“내가 발사하자 곧 러시아 헌병들이 나를 잡으려 덮쳤고, 그와 동시에 나는 그 곳에 나뒹굴었으며, 그때 가지고 있던 총을 던져 버렸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각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로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라고 외치고 ‘대한국 만세’를 삼창했다.”

– 안중근의 법정 진술 중에서 –

“하늘이 사람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의례히 문명한 시대라 일컫지마는 나는 홀로 그렇지 않은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 잘난 이 못난 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라.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사회의 고등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한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기계라.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랴.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멸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 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안의사가 1909년 11월 6일 옥중에서 작성한 ‘한국인 안중근 소회’에서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業)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차가워짐이여 장사(壯士)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伊藤)이여 어찌 목숨이라 할 수 있을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事勢)가 본디 그러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 직전에 지은 시 장부가(丈夫歌) –

이재명 의사 – 이토 대신 이완용이라도….

이재명하면 사람들은 경기도지사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109년 전 을사오적 중 한명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인물의 이름도 이재명(李在明)이었다. 그런데 이재명의 원래 제거 목표는 이완용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였다.

1890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의 이재명은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라의 존망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귀국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1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후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 제거를 계획하던 중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이재명의 목표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먼저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이에 이재명은 목표를 바꿔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 친일 매국노 제거를 계획하였다. 당시 동지들과 친일 매국노 처단에 대해 의논하기를, 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동지 김정익이, 송병준은 동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사진] 이재명 의사(왼쪽)와 이완용(오른쪽)

그리하여 1909년 9월 상경하여 기회를 엿 보던 중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이재명은 군밤 장수로 변장하여 성당 문 밖에서 이완용을 기다렸다. 오전 11시 30분경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자기 앞을 지나는 순간, 재명은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돌진했다. 자신을 제지하려는 인력거꾼 박원문을 한칼에 찔러 쓰러뜨린 후 곧바로 이재명은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이완용은 인력거 아래로 떨어졌고, 이완용은 재빨리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와 등을 사정없이 난자했다. 인력거 주변에 유혈이 낭자했다. 이재명 의사는 거사 성공을 확신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일경들과 격투를 벌인 끝에 이재명은 하체에 상처를 입고 체포되었다. 오른쪽 폐를 크게 다친 이완용은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에서 대수술을 받은 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10년 재판정에서 사형을 확정 받았다. 형이 확정되자 이재명 의사는 재판장을 향해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1910년 9월 13일 24살의 젊은 청년 이재명 의사에 대한 사형이 집형되었다. 나라가 식민지가 된 지 보름이 지난 때였다. 사형 집행 보름 전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은 인물은 이재명이 제거하고자 했던 바로 그 이완용이었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다.

10월 26일의 역사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날이었다. 이토 제거는 안중근 의사 혼자의 소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태우, 이재명, 그리고 이름 없는 수없이 많은 한국인들의 소망이었다. 그 의지가 안중근의 거사를 통해 구현된 것일 뿐이다. 누구의 거사는 성공했고, 누구의 거사는 실패했지만, 그 의기만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10월 26일은 한국사에서 또 한 번 중요한 기록을 남긴다. 70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유신체제가 극악한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던 때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를 쏘았다. 이 날을 기점으로 박정희 시대는 종결을 고하고, 이후 1981년 3월 전두환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16개월 동안 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민주시민진영과 권력을 찬탈하려는 신군부 세력과의 치열한 대립이 전개된다. 그래서 안중근의 10월 26일도 중요하지만, 김재규의 10월 26일도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도 업보라고 해야 하나.

박정희가 죽은 지 37년 후,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을 하던 때였다. 2016년 10월 24일 JTBC 뉴스룸에서 최순실의 태블릿 PC 내용이 폭로되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다음날인 10월 25일 당황한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함으로써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붕괴하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10월 26일과 교묘하게 겹친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박근혜의 유사(類似) 유신체제는 10월 26일 언저리에서 똑같이 붕괴된 것이다.

오늘은 다시 10월 26일이다.

[사진] 100년도 더 지난 옛날 우리의 원태우, 안중근, 이재명이 골리앗 일본에 맞서 다윗이 되어 싸웠지만, 지금 이 시간 어느 곳에서 다윗이 되어 골리앗과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우리가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사진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시위자가 한 손에는 팔레스타인 깃발을, 다른 한 손에는 돌팔매를 들고 이스라엘군에게 맞서고 있는 장면이다. (터키 사진 기자 무스타파 하수나 사진)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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