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화성,
    정조의 꿈 실린 복합도시
    [나의 역사 기행] 팔달산을 걸으며
        2018년 10월 26일 09: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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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정조를 조선의 개혁군주라고 말한다. 왕조시대 민중들이 삶의 도탄에 빠져 신음하던 때에, 그나마 한줄기 생명수 같은 선정을 베풀었던 임금이라는 뜻일까.

    그 정조가 끊을 수 없는 애착을 가지고 연례 행차했던, 수원 화성으로 갔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현 화성시에 있는 화산으로 이장하여 모셨다. 능행(현륭원)을 하자면 임금의 행차는, 한양 도성을 출발해 부교로 한강을 건너고 동작나루에서 재정비했다. 다시 남태령을 넘고 과천을 경유 인덕원에서 1박을 했다. 다음날 군포, 의왕을 거쳐 수원 화성에 도착, 장안문(북문)으로 진입 행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셋째 날, 팔달문(남문)을 빠져나가 화산 현륭원에 도착하고, 비명에 죽은 아버지를 애도하며 기렸다고 한다.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함에 몸서리쳤을지 모른다.

    그 정조의 업적으로 수원이라는 도시는 조선 후기의 역사와 현대가 교류하는 현장이 되고 있다. 정조는 팔달산을 기점으로 5.7km에 이르는 화성을 축성했다. 팔달산 동쪽 기슭에 행궁을 건설하고, 그 앞 너른 평야지대에 원형 모양으로 4대문과 포대 및 성곽을 축성하였다. 그 지역은 교통으로도 요지다. 성 밖 인근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만석거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을 발전시켰다.

    화성 성내에는 장용외영 군대가 주둔했다. 화성은 첨단 무기와 무력을 집중시킨 핵심 거점이며, 한양 도성을 남쪽에서 엄호하는 강력한 군사도시라 할 수 있겠다. 만약 임진왜란이 정조 당대에서 발발했다면,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되는 사태는 모면했을 것이다.

    나는 새벽에 군포 집에서 자가용을 타고 20여 분만에 화성 행궁 주차장에 도착했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팔달산 정상 서장대를 바라보며 산책로를 따라 곧장 올라갔다. 높지 않는 산이다. 적송이 울창하다.

    산책하는 사람들, 강사의 지도에 따라 몸을 경쾌하게 흔들며 에어로빅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원 화성은 시민들이 생활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잠시 뒤 화성장대(서장대)에 다다랐다. 뒤에는 쇠뇌를 발사할 수 있는 서노대가 있다. 산 밑에 있는 행궁과 장안문 방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화성장대(서장대) : 팔달산 정상에 있는 화성 서쪽 방면 지휘소.

    정조는 1795년 현륭원을 참배하고, 화성장대에서 장용외영 군대가 성을 수비하고 적을 공격하는 주간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야간 훈련을 할 때에는, 어떤 표식으로 지휘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또 쇠뇌와 대포를 실제 발사하였을까.

    서장대에서 팔달문(남문) 방면으로 성곽길을 걸었다. 서암문이 보인다.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과 가축이 드나들고 비상시 군수품을 조달하고자 만들었다 한다.

    서포루(군사 대기소 및 망보는 용도)를 지나고, 서삼치가 나타난다. 치는 성곽 일정한 거리마다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한 시설로, 성벽으로 달려드는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다 한다. 그러나 지금 성곽 밖으로 보이는 것은 울창한 숲이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성곽 주변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었을 것이다.

    서남암문이 나타났다. 비교적 규모가 큰 문이다. 하단 부분은 돌로 쌓았고 위는 벽돌이다. 벽돌, 정조대에 이르러 비로소 축성에 벽돌이 등장한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벽돌의 여러 우수성을 상찬하고 조선에는 그것이 통용되지 않음을 개탄했는데 정조가 수용한 것이었나. 구습을 개혁하고 실질을 숭상하고자 했던 당시 집권층, 축성 총책임자 채제공, 신진관료 정약용 등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서남암문 : 돌과 벽돌로 축성된 화성이 잘 드러남.

    화양루 : 팔달산 서남암문과 장안문 사이에 위치. 그 방면 군사지휘소.

    용도를 따라 쭉 나가보았다. 끝에 화양루 라고 편액이 걸려있는 서남각루가 있었다. 평소에는 휴식을 취하고 비상시에는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라 한다.

    드디어 남포루가 나타났다. 화성의 5개 포루 중 팔달문과 서남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팔달문과 화양루 방면으로 몰려드는 적진으로 화포를 발사하는 시설이다. 1795년 정조가 직접 지휘하는 훈련 당시에, 이 포대 포신들에서도 불덩어리를 토해 내었을 것이다.

    나는 팔달문 방면으로 성곽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바로 옆 적송 숲에서 청설모 한 마리가 나무줄기를 타고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성곽 : 팔달산에서 팔달문(남문)으로 내려오는 성곽

    팔달문, 사통팔달이라는 글에서 따왔다 한다. 도로가 사방팔방으로 통해 있어 교통의 요지라는 뜻이다. 정조는 화성 행궁을 출발해 화산 현륭원으로 가기 위해 팔달문을 통과했는데, 그 때 모습 그대로 지금 보존되어 있는지는 모른다. 화성성역의궤(축성 총보고서)라는 보물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그에 명시된 대로 고증하고 재현, 복원하였다고 하니 믿을만하다.

    정조는 화산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모셨다. 화성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리 아버지 묘를 그 옆에다가 이장해 놓은 것일 거다. 그 시대 기본 윤리이자 사상의 근간인 효를 실행하겠다는 것을, 그것도 임금이 하겠다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었을까. 국가 1년 예산과 맞먹는 공사비가 들었고, 1794년 1월에 시작해 33개월 만인 1796년 9월에 축성을 완료하였다 한다.

    팔달문 : 앞부분은 옹성으로 둘렀다

    나는 팔달문에 도착해 그 곳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팔달문을 둘러싸고 원형으로 도로가 나있다. 시내버스 등 차들이 빈번하게 통행하고 있어, 팔달문 사진을 한참 만에 찍었다. 도시 한가운데서 유적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듯 했다. 문 앞에는 옹성이 설치 되어 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옹성이 수원 화성에는 있었다.

    화성은 당대 선진 기술을 총 집약시킨 군사도시이다. 인근의 물산과 사람들이 교류하는 활발한 상업도시로도 기능했다. 만석거 저수지를 보듯이 농업도 발전해,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한다. 시대 상황에 맞추어, 석수-목수-기술자-인부 등에게 노임을 지급하고 공사 효율성을 높이고자 성과급 방식을 가미했다.

    정조가 화성을 축성한 주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왕조가 영속적으로 유지 번창하기를 강구했을 것이다. 그러자면 자신의 왕권이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었고, 그 목적이 축성의 진짜 이유일 것이다.

    행궁 : 홍살문 전방에서 바라본 행궁과 팔달산.

    나는 팔달문에서 행궁 쪽으로 걸어갔다. 두 줄기 붉은 기둥이 뻗은 홍살문 뒤로 행궁 건물들이 보였다. 건립 당시에는 21개 건물 576칸 규모였다 한다. 그 안에 장용영외영 북군영과 남군영이 있었다.

    정조는 아들인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 행궁에 거주하며 그 세력으로 수도 한양을 보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필자소개
    서울교통공사 기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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