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진교회와
    역사적인 부산의 10월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부마민주항쟁과 기독교 민주세력
        2018년 10월 24일 04: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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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변호인은 『역사란 무엇인가』를 비롯해서 피고인들이 읽었다는 불온서적 10여권을 오늘 아침 서점에서 사 갖고 왔습니다. 시중에서 아무나 살 수 있는 이 책들은 서울대에서 권장도서로 추천도 했습니다. 이 책들이 불온서적이면 대한민국 최고대학이라는 데도 불온단체라 이 말입니까? 판사님, 검사님, 거 불온단체 출신이신데, 이 어찌 된 겁니까? 이 엉터리 감정처럼 이 사건은 온통 엉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좋은 책 읽기모임은 그냥 독서모임일 뿐입니다. 책 살 돈 모자란 학생들이 책 돌려보고, 토론하고, 지들 공부한 거 나눠주고, 잘 했다고 박수칠 일이지요.”

    천백만 관객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억하게 영화 ‘변호인’의 재판정에서, 변호사역의 배우 송강호의 열연이 감동적입니다. 이 영화는 부산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답니다.

    부림사건은 전두환 정권 시절 1981년 9월에 발생한 부산지역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입니다. 공안당국이 사회과학독서모임(양서협동조합)을 하던 대학생과 교사, 회사원 22명을 불온서적을 학습했다고 영장 없이 체포, 불법구금 후 가혹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넘겨 5명이 징역 5-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잘 나가던 변호사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김광일, 이흥록, 이돈명 번호사와 함께 이들을 변호하였고, 이를 계기로 험난한 인권변호사의 길에 들어섭니다. 이 사건은 나중에 무죄로 최종판결을 받았습니다.

    부림사건의 뿌리는 양서협동조합입니다. 새문안교회 대학부 시절, 우리에게 신학 공부를 시킨 선배 김형기 목사님(현 경주 팔복교회 담임)이 당시 부산민주화운동의 거점이던 중부교회(최성묵 목사)에서 청년회를 지도하면서 양서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78년, 회원 141명이 창립총회를 열었는데, 이듬해 570여 명으로 늘어났고 독서운동을 통해 깨어난 조합원들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섭니다. 그해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군사독재권력은 양서협동조합을 부마항쟁의 배후로 몰아 조합원 300여명을 연행합니다. 10.26 사건이 일어나 모두 풀려나기는 했지만 다음날 강제해산을 당합니다. 해산된 이후에도 회원들이 계속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고 부림사건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는 긴급조치로 억압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하여 민심의 이반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79년 10월 4일, 부산 지역구 의원인 제1야당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한 것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거기다가 석유파동 등으로 부산과 마산 지역의 경제가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10월 16일, 부산 광복동 일대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이 ‘유신 철폐’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자 노동자, 빈민, 식당 종업원에다가 재수생, 고등학생까지 합세하여 시위대는 5-7만여 명에 달하였습니다. 투쟁양상도 달라져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서, 도청, 세무서 등과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기관을 공격하였습니다. 마산의 투쟁은 부산보다 격렬했습니다.

    나중에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부마항쟁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등이 복합된 민란의 형태였다고 증언했습니다. 군사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병력을 투입해 위수령을 발동하는 등 위법을 저질렀는데, 급기야 부마항쟁 진압방식을 놓고 권력내부에 균열이 생겼고,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집니다.

    부마민주항쟁을 가능케 한 것은 기독교민주세력이었습니다. 부산도시산업선교회, 국제사면위원회 부산지부, 양서협동조합, 사회정의구현부산기독인회와 부산교회인권선교협의회, 부산EYC, 부산YMCA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중부교회는 수, 금요기도회와 시국강연회를 열고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한완상 교수, 강원용 목사 등을 강사로 초빙하여 대학생들의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제 군사독재를 종식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에 가톨릭 신부들까지 적극 협력합니다.

    교회의 적극적인 민주화운동은 불교가 주류인 부산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였습니다. 당시 문재인 변호사도 노무현 번호사 등과 함께 부산YMCA 이사와 시민중계실 법률자문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림=이근복

    부산의 첫 교회인 부산진교회는 1891년 미국 배위량(W. Baird) 선교사가 공관에서 예배드리며 시작되었고, 호주 맥케이(Mackay) 선교사 등이 합류하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경남지역에서 복음화와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한 호주 선교사 3인방이 있었습니다. 왕길지(Gelson O. Engel) 선교사는 부산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신학지남을 창간하고 구약성서 개역작업을 하였고, 멘지스(Isabella B. Menzies) 선교사는 버려진 아이들과 장애아동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하고 1893년에는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를 세웠습니다. 매견시(James N. McKenzie) 선교사는 나환자를 위한 상애원을 세워 헌신하였고, 그의 두 딸(Helen과 Catherine)은 일신병원을 세웠습니다.

    부산진교회는 일신여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에 앞장섰는데, 1919년 3.1독립운동 때, 부산진교회의 교인이자 이 학교의 선생들의 주도로 여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경남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결국 두 교사가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11명의 학생들이 6개월 징역형에 처해지자 학생들은 10일간 동맹휴업으로 밀제에 저항하였습니다.

    부산진교회를 중심으로 선교를 전개한 호주교회는 제가 1980년대에 일한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늘 전임선교사를 파송하여 노동자 권익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라벤더(Sthephen Lavender) 선교사는 1978년에 추방당하였고, 차민희 (Debra Carstens) 선교사는 한국에서 임기를 마치고 호주 시드니로 돌아가서 베트남 등에서 온 아시아 이주여성노동자를 지원하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부산지역 기독교의 특징은 교파 간 균형이 유지되어 예장 고신, 통합, 합동측이 절묘한 세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13년 WCC(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부산총회가 거행되었지만, 역사적인 대회에 고신과 합동측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부산진교회에서는 강성두 목사님과 YMCA 이사장 우창웅 장로님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최근엔 생태환경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2017년 말에 새로 부임한 신충우 담임목사님은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는 교회’란 기치로 부산에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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