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문막 ‘동화역’ 옛이야기
[철도이야기] 어느 한 허름한 철도 역사의 운명
By 유균
    2018년 10월 22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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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3리. 중앙선의 역사 중에 하나인 동화역의 주소입니다. 옛 동화역에는 많은 분들이 근무했었습니다. 1975년 당시, 동화역 직원은 10명(78년 8명), 선로반 8명, 전기 2명, 보안 2명이 근무하였고 대한통운의 인부들이 30여 명으로 총 50명 정도 동화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승,하차 인원은 일평균 250-260명으로 동화리, 문막면, 부론면 등에 거주하는 주민이었습니다.

동화역의 모습(1975년)

동화역에서 근무했던 분 중, 생존에 계신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의 말에 의하면 1965년에 입사했을 당시 월급이 3,600원 정도였는데, 그 돈으로 쌀 한 가마를 못 샀다고 말하십니다. 당시는 공채시험은 없었고 아는 사람의 소개를 통해서 들어왔으며 후에 정식발령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을 ‘오투’라고 불렀으며 대부분은 그렇게 입사를 했답니다. 1974년부터 대규모로 공채사원을 뽑기 시작했으며 간부는 철도고등학교나 철도전문교육기관인 전수부 출신이었습니다.

원주에서 새벽 5시경에 출발하는 비둘기열차는 주로 장사꾼들이 이용했었습니다. 집에서 재배한 고추, 잡곡, 채소, 숯 등을 서울(경동시장)에 팔기 위해서였죠. 열차가 도착하는 시간 무렵에는 광장이 꽉 찼을 정도였답니다. 그리고 서울로 가는 일반 손님들은 걷거나 버스를 타고 동화에서 도착한 후 열차를 이용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서울로 직접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도로가 그리 발달하지 못했고 또 불편하다보니 당연히 값싼 철도를 많이 이용했답니다.

1975년 수입은 년간 여객 500만원, 소화물 50만원, 대화물 300-600만원 정도였으며, 일간 원주행, 제천행, 부전행 비둘기 열차가 왕복 6회 운행하였으며 발송8량, 도착 1-2량 정도였습니다. 버스는 동화를 기점으로 원주나 문막을 가는 데 30분 정도였고, 지금은 20분 정도 걸립니다. 현재 동화역 앞 42번 국도는 85년경에 포장된 듯합니다. 하지만 영동고속도로 진입로는 이미 1971년 10월에 깔렸으며 지금 문막으로 이전하여 폐 도로로 되었습니다.

목재 사진(1980년. 이하 사진은 필자)

취급하는 화물은 정부미, 비료, 무연탄, 장석, 시멘트, 모래, 원목 등이었으며, 그 중 무연탄은 연탄을 만들기보다는 주위 마을에서 담배를 찔 때 진흙과 섞어 쓰는 용도였답니다. 주요 화물은 석탄공사에서 사용하는 갱목이었으며 원목 중에서 소래목(눈으로 쓰러진 소나무)은 6-8m로 목재로 최고로 인기가 좋아 서울로 보냈는데, 그 소래목이 동화에는 많았답니다.

목재가 있으니 당연히 목상(木商)이 있었을 테고, 목상은 항상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쫓아 술집이 역 주변에 들어섰다고 하죠. 가게 2곳과 식당이 5곳이나 있었는데, 그 식당의 이름은 공근식당, 화성식당, 역전집, 일도집, 선산집으로 식당이라기보다는 목상을 상대로 색시를 2-3명씩 고용한 술집이었습니다. 당시는 ‘왕대포집’으로 불렸습니다.

강원연쇄점 모습(2012년)

사진의 가게는 ‘강원연쇄점’으로 40여 년 살고 있으며 당시 약국도 같이 운영했습니다. 그 때는 손님이 얼마나 많았는지 계란을 미처 삶지 못할 정도였고, 명절에는 종합선물세트를 평상(平床)에 쌓아놓고 팔았다고 합니다. 특히, 여름방학 때면 ‘쥬쥬바’가 잘 팔려 냉장고에 하루에 두 번씩 채울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답니다. 그 당시 동화역 앞은 최고의 요지로 한 마디로 ‘노가 났다’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랬던 가게가 85년 이후부터 도로가 포장되고 손님이 서서히 줄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열차손님은 있어 근근이 유지되었지만 남편이 돌아가셔서 약국도 할 수 없고 또 완행열차가 없어지고 통일호마저 운행 중단이 되면서 손님이 딱 끊겼답니다. 물건을 해 놓으면 안 팔려 자꾸 반품을 시키고 계속 그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미안해서 못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폐업’신고를 했답니다.

‘강원연쇄점’이 장사가 잘된다고 하여 집 팔고 논 팔아서 그 맞은편에 가게(이름 없음)를 냈는데, 처음에는 아주 잘됐답니다. 5-6년 그렇게 벌어먹더니 지금은 ‘이 모양’이랍니다. 담배나 사려고 몇 명 들를 뿐 ‘매상은 거의 없다’는 표현이 맞을 듯합니다,

그랬던 동화역이 1978-80년을 정점으로 80년대 중반부터 도로의 발달로 손님이 점점 줄어들더니 93년에 매표를 없애고 98년 비둘기 열차를 중지시켰습니다. 2004년 KTX를 개통시키면서 통일호마저 사라졌습니다. 현재 1일 2회 무궁화열차가 정차하여 주말이면 ‘숯가마’ 손님이 7-8명 정도 이용하지만 여객을 위한 역할은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70-80년대 동화역은 문명으로 가는 관문이었고 주변 마을의 이야기를 소통시키는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도로의 발달로 지금은 보잘 것 없는 곳으로 전락했지만 그 원인이 꼭 도로만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같이 공존할 수 있었음에도 한 쪽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정책 때문이겠지요.

현재는 원주까지 중앙선 개량공사를 위한 자갈을 발송하지만, 그 공사가 끝나면 앞으로 동화역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역사를 부수는 데는 하루도 채 안 걸립니다. 하지만 역사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삶이나 추억도 함께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개발이라는, 수익이라는 명목하에 그것을 용인하고 있습니다.

2004년 4월 시속 300km의 KTX에만 광분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자랑할 때 다른 한 편에선 그동안 서민들의 발이었던 통일호가 말없이 사라졌습니다. 더불어 힘없고 돈 없는 시골 어르신들은 다닐 차가 없어진 겁니다. 어느 할머님이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푸념하시는 데 “평생을 기차역 옆에서 살았건만, 나 어렸을 때는 돈이 없어서 기차를 못 탔고, 조금 커서는 애들 뒷바라지 때문에 못 탔고, 지금은 기차가 서질 않아 못 탄다네” 라는 말이 귓전을 때립니다.

1980년의 동화역

1940년 4월 1일 중앙선 개통과 동시 보통역으로 영업개시

1950년 12월 8일 6.25동란으로 역사 소실

1956년 5월 10일 현 역사 신축

1968년 10월 10일 열차 집중제어장치 개통(CTC)

1973년 6월 23일 중앙선 전철개통

1993년 4월 15일 여객 차내취급

1998년 2월 15일 비둘기열차 운행 중지(본선), 2000년 11월 14일 비둘기 정선선 중지

1998년 6월 1일 철도 도상용 자갈발송

2004년 3월 31일 통일호열차 운행중지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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