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동집단 수괴로 몰려 쓴
    중국 혁명 영웅의 자술서
    [책소개] 『나, 펑더화이에 대하여 쓰다 』(펑더화이/이영민(옮긴이)/앨피)
        2018년 10월 20일 02: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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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책의 주인공인 펑더화이(팽덕회彭德懷)가 직접 쓴 자술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서전이 아닌 ‘자술서’다. 어떤 사건에 관해 본인이 겪은 바를 직접 진술했다는 말이다. 펑더화이라는 중국 공산혁명의 영웅과 자술서의 역설적인 조합이 이 책의 묘미이자 가치라 할 수 있다.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한국전쟁의 판세마저 뒤집은 중화인민공화국 원수로 평생 마오쩌둥 곁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완수했던 펑더화이는, 1950년대 후반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중국 경제가 파탄나고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참사를 겪는 상황에서 마오쩌둥에게 직언을 했다가 반당집단으로 몰려 국방부장직에서 해임당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홍위병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온갖 고초를 겪는다.

    이 책은 “우경 기회주의, 반당·반사회주의”라는 억울한 누명을 쓴 직후인 1962년 그가 당 중앙과 마오쩌둥에게 쓴 8만 자의 편지와,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에 특별심사조에게 심문을 받으며 3차에 걸쳐 작성한 장문의 이력자료 등을 바탕으로 펑더화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처절한 역경을 딛고 혁명을 완수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중국혁명에 관한 희귀한 자료이다.

    더할 수 없이 담백한 자기비판

    이 책의 내용은 건조할 정도로 담백하다. 어떤 과장이나 자랑도 없다. 심문 과정에서 “공로를 써서는 안 되며 잘못을 반성하는 취지로” 장문의 생애 이력을 거듭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빛나는 이력도, 조금의 과장도 없이 본인의 삶을 담담하게 기술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악명을 떨친 홍위병들의 심문은 황당할 정도로 모욕적이었다. 펑더화이는 혁명가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기본 자질마저 의심받았다. 그러나 심문조의 악랄한 모욕과 치욕적인 강압도 펑더화이라는 인간이 지닌 기개를 꺾지 못했다. 펑더화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책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지만, 펑더화이는 안타까울 정도로 담백하고 강직한 사람이다. 펑더화이의 기억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지는 중국 공산혁명의 큰 그림과 더불어,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한 인간의 처절한 내적 투쟁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묘미를 제공한다.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군사지도자 펑더화이

    펑더화이 사망 4년 후인 1978년, 중국공산당은 펑더화이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고 정중하게 추도회를 거행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원과 민중들이 모두 펑더화이 동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 그는 작전에는 용감했으며 어떤 곤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스스로 엄격하게 기율을 지켰다. 개인의 득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무거운 책임을 거리낌없이 맡았다.”

    과연 펑더화이는 군사 업적 면에서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이력을 지닌 군사지도자이자 참군인으로 지금까지도 중국 인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과 중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한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을 이끌고 내려온 인물, 북진통일을 방해하고 1·4후퇴로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 정도가 우리가 아는 전부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으로 북한의 남일, 미국의 클라크와 함께 휴전협정에 조인한 당사자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참전은 그의 화려한 군사 업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이름은 중국공산당사는 물론이고 중국 현대사에 넓고 깊게 새겨져 있다.

    펑더화이라는 사람

    펑더화이는 지금 중국에서 한창 선양되고 있다. 전기와 소설, 각종 일화집 등이 쏟아지고 있으며, 2년 전에는 CCTV에서 그의 일생을 드라마로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드라마로 제작될 만큼 인간 펑더화이의 일생은 극적이었다.

    비운의 혁명가 펑더화이는 소학교도 마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고 먹고 살기 위해 병사가 되었다. 하지만 타고난 정의감과 용감함, 탁월한 군사 능력으로 ‘신중국 10대 원수’ 중 두 번째 반열에 올랐다. 주더가 경력과 상징성으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면, 펑더화이는 오로지 그의 능력과 실적, 선당후사의 헌신적인 태도를 인정받아 군부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직설적이고 주위를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항미원조의 영웅’은 ‘반당집단의 수괴’로 전락했다.

    모든 것을 혁명에 바친 대가

    중국 근현대사에서 펑더화이는 유방의 한신이나 유비의 관우, 송나라 충신 악비에 맞먹는 군사가이자 애국자로 평가받는다. 초강대국 미국을 비롯한 UN군과 싸워 승리한 인물이니 이러한 평가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걸고 쟁취하려 한 사회는 그에게 처절한 절망만을 안겨 주었다.

    문화대혁명 후 죽을 때까지 연금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암에 걸려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헤어진 아내를 만나게 해 달라는 소망도 이루지 못했다. 그가 부인 푸안슈와 억지로 이혼하면서 배를 두 쪽으로 잘라 나눠 먹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펑더화이는 어린 시절 함께 구걸하던 두 동생도 혁명에 바쳤다. 동생들은 고향인 후난에서 지하당 활동을 하다 국민당 특무에 잡혀가 처참한 고문을 당한 뒤 살해당했다. 펑더화이 본인도 사후 ‘왕촨’이라는 이름으로 화장을 당했다. 일생토록 마오쩌둥과 함께 군벌, 일본 군대,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맞서 남들이 가장 꺼리는 임무를 도맡아 완수한 혁명가의 말로는 그렇게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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