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참한 피해자에서 새로운 전사로-외국인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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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21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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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듬거리며 어눌하게 말한다. 얻어맞는다.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린다. 임금을 받지 못한다. 도처에서 덮쳐대는 폭력. 쫓기는 삶. 벌써 10년 전쯤의 일이다. 텔레비전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주 노동자를 처음 보았을 때, 비통함에 숨이 막혀 채널을 돌리고 말았었다.

    비통함에 숨 막혀 채널을 돌리고 말았던 10년 전, 지금은?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한국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건 그 때보다도 무려 10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2006년, 우리는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그들과 종종 스친다. 불편한 이질감 혹은 절대적인 무관심으로.

    지난 4월 30일. 우연히 이주노동자 누르 푸아르씨를 추모하는 집회에 갔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단속 추방에 쫓기다가 죽었다. 1999년에 산업 연수생 제도를 통해서, 2004년에는 고용 허가제를 통해서 한국에 들어왔다 하니 대한민국의 이주 노동 정책을 두루 경험한 셈이다. 그 끝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집회에서 내가 만난 건 텔레비전이 보여주던 비참하고 불쌍한 약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거기엔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차분히 웅변하는 연설가가, 압도적인 슬픔의 순간에조차 유머를 잃지 않는 건강한 라커들이 있었다. 침묵조차 힘이 셌다.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이 한국에 가면 돈 벌 수 있다고 이주를 권장한 건 88올림픽 이후부터라고 한다. 고향에서 대학을 마쳤거나 교사이기도 했던 그들은 환율의 마법에 이끌려온 먼 나라에서 그 나라의 국민들이 기피하는 단순 제조업과 3D업종에 종사한다. 자본과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필요로 했다.

    현대판 노예제도 싸워서 깨는 수밖에

    그러나 91년, 최초로 수립된 산업 연수생 제도는 ‘현대판 노예제도’였단다. 기술이나 문화, 언어 교육을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장시간 노동에 저임금을 강요당했을 뿐, 노동자로서의 어떤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연수생이었지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03년 도입된 고용 허가제는 노동3권을 보장하는 척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업장 이동을 할 수 없었다. 노동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끔찍한 사업장을 도망치면 그들은 ‘불법 체류자’가 되고 만다.

       
     

    불법적 인간. 자본은 그들의 노동력만을 필요로 한다. 정부가 그들의 존재를 불법으로 규정하면, 자본은 불법적 존재를 주워 먹는다. 임금이 체불되어도 하소연할 곳 없고, 몸을 다쳐도 보상은커녕 치료조차 요구할 수 없는 존재들.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임금을 떼먹고, 여차하면 신고해서 강제 출국 시키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일까! 자본과 국가의 절묘한 공모 관계. 하지만 놀랍게도 이주 노동자들은, 명목적인 노동 3권을 보장 받느니 차라리 합법적 인간이길 거부했다. 저들이 만든 제도 바깥으로 나가기.

    이주노동자들 ‘제도 바깥으로 나가기’

       
     

    불법적인 존재는 없다. 존재의 능력을, 생명을, 권리를 차압하고 사지절단 하는 권력과 법이 있을 뿐이다. 단속 추방 중지! 노동 비자 쟁취! 자유로운 출입국 허용! 이주노동자는 전 지구적 자본이 불러낸 노동력이었지만, 그들은 자본과 국가에 권리를 구걸하지 않는다.

    자본은 모든 존재를 오직 불구로만 요청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주 노동자들은 스스로 권리를 만들고 있다.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서 일할 권리,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자신의 삶을 구성할 권리를.

    오늘 우리는 안산의 원곡동에 갔다. 거기에 90개가 넘는 나라의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국경 없는 마을이 있다. 영어가 아닌 다양한 외국어들로 쓰인 간판, 갖가지 피부색, 가지각색의 차림새, 그 웅성거리는 에너지에 가슴이 뛰었다.

    내일의 집회를 알리는 유인물이 서너 가지의 언어로 만들어져 뿌려졌다. 시민단체가 그들을 보호해야할 대상으로 상정하고, 노동 단체가 최소한의 포즈로만 대응하는 동안 이주 노동자들은 이미 이라크 파병과 비정규직 문제, 동성애 인권문제에까지 결합하고 발언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 ‘웅성임의 에너지’는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물론 해결해야할 문제는 끔찍하게 많다. 거리에 나가는 것조차 무서운 현실, 태어나긴 했지만 학교에 가지 못하는 많은 아이들, 한국인의 국가주의가 그리는 분할선과 인종차별, 끝없는 구별 짓기. 그러나 이 무서운 배제와 차별을 가로지를 수 있는 건 통합이 아니다. 무수한 이질성의 상생이다.

    모든 이질성들이 와글거리며 솟아오르는 원곡동 거리의 한 가운데서, 문득 예전에 보았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떠올랐다. 자본만이 자유로운 미래의 코스모폴리탄에서 모반을 꿈꾸는 건 인간이 아닌 사이보그였다. 자본은 새로운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해 사이보그를 제작했지만, 어느새 그들을 추격하고 뒤쫓아 다닐 수밖에 없다는 역설.

    한편 영화의 주인공-인간은 자신이 사이보그인지 인간인지 헷갈려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주 노동자들이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외칠 때,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뛰어 넘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한국인이길 뛰어넘으라고 요구한다.

    우린 외국인을 넘어서고 당신들은 한국인을 넘어서라 

    우리가 길에서 만난 모든 소수자들의 싸움 또한 그러했다. 그 외침들은 한국인으로 표현된 것도, 심지어 인간으로 발화된 것도 아니다. 단지 모든 만물은 들끓어 오르는 하나라고 외칠 뿐.

       
     

    우리는 오늘 이질적 도시 안산에서 이주 노동자로써 말했다. 그들의 짧고 강한 언어를 빌려 외쳤다. 자본과 국가는 자꾸만 우리를 호명하고, 우리의 권리를 한정하려 하지만 이름을 잊은 새로운 전사들, 만남을 통해서만 새로운 이름을 얻기 원하는 전사들은 외친다. “스탑! 크랙다운! (Stop! Crackdown!)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불법적 인간은 없다!” 우리는 모든 이름과 권리를 가로질러 새로운 권리를 창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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