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신은 어떻게 유신의 아이콘 되었나?
    [역사의 한 페이지] 남북 대화와 유신 체제의 역설
        2018년 10월 17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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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정약용, 지석영의 한글날 번개모임”

    근래 수능에서 한국사가 중학교 수준으로 쉽게 출제되면서 질문하러 오는 학생이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많아져서 좋긴 한데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학생들의 좋은 질문은 선생을 끊임없이 분발하게 만드는데 그런 노력과 분발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올해 받은 질문은 겨우 하나였다. 그것도 수능 시험과는 관련없는….

    어떤 학생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질문한다. 두 달 전이다.

    “선생님! 진짜 궁금해서 하는 질문인데요….조선은 유교사회이고 효(孝)를 중시하는 사회였잖아요. 그래서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면서 머리카락 자르는 단발령도 크게 반발했는데요…그렇다면 대머리들은 사회적 차별이나 천시를 당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학생의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웃을 수도 없었다.

    지금은 이런 상황이지만 그래도 이전에는 한국사 관련 질문이 꽤 많았다. 그 중 단연 많았던 질문이 하나 있다. 박정희 정권 때 유신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독재를 뒷받침한 헌법이라고 하는데, 왜 그런 헌법을 당시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찬성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신헌법은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는데 당시 유권자 91.9%의 높은 투표율과 91.5%의 압도적 찬성으로 확정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찬성의 이유가 당시 국민들의 무지함 때문으로 설명한다. 물론 당시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수준이 지금보다 다소 낮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 그것으로 이런 압도적 찬성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 압도적 찬성 배경을 설명해 주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유신 선포일인 10월 17일을 맞아 오늘은 이 사진을 꺼내 본다.

    [사진]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의 압도적 지지 배경에 대한 답이 들어있는 사진이다. 197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박건호 수집사진)

    이 사진은 재작년에 수집한 사진인데, 어떤 젊은 신사가 전시회 매표소에서 표를 사는 장면이다. 연도도 없고, 장소 정보와 주인공의 인적 정보도 전혀 없다. 김유신 장군 동상 사진이 걸려 있는 매표소에는 어른 20원, 학생 10원이라는 입장료가 적혀 있다. 이 신사는 지폐로 돈을 지불하고 있다. 전시회의 이름은 매표소 오른쪽에 서있는 개선문 형태의 구조물 위에 적혀있는데 ‘김유신 장군 일대기 기록화전’이다. 매표소의 김유신 장군의 동상 사진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구조물 가운데에 한 여성이 책을 읽고 있으나 이 젊은 신사와 같이 온 동행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사진의 어떤 부분이 당시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유신헌법을 지지했는지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일까? 이제 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사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개선문 형태의 구조물 양 옆에 씌어져 있는 구호들이다. 이 구조물 오른쪽에는 “화랑정신 이어받아 싸우면서 건설하자”라 씌어져 있고, 왼쪽에는 “김유신장군 얼 이어받아 남북통일 이룩하자”라 씌어져 있다. 이 구호들 중 특히 왼쪽 구호는 유신 헌법과 유신 체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구호이다. 왜 그러한가?

    박정희, 유신을 선포하다.

    먼저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고려한 배경부터 살펴보자. 박정희의 유신 선포에는 라이벌인 김대중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7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634만표를 얻어 라이벌 김대중 후보에게 95만표 차이로 승리했다. 나름 큰 격차로 볼 수도 있겠으나 김종필, 이후락 등 측근들이 최소 100만 표 이상, 심지어 200만표 차로 압승할 것이라고 보고하던 터라 박정희의 실망감은 매우 컸다. 게다가 선거에 당시 국가 예산의 10%가 넘는 액수인 600∼70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썼던 터라 더더욱 그랬다. 김종필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사진] 1971년 7대 대선 당시 후보들의 선거포스터를 보고 있는 시민들. 당시 기호1번이 박정희, 기호2번이 김대중이었다. (인터넷 사진)

    “(대선 직후 박대통령은) 창밖을 내다보며 한참 ‘음…’ 하고 있더니, 말문을 열었다. ‘이것 봐. 내가 그래도 그동안 잠자고 있던 국민이 일어서서 일하게 하는 세상을 만들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여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김대중씨가 뭐를 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안 나? 내가 이름이 나도 김대중보다 더 났고, 선거비용을 써도 김대중보다 훨씬 더 많이 썼는데 말이야. 행정력은 또 얼마나 사용했나. 선거라는 게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긴 하지만 이게 큰일 날 수도 있어.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선거를 하다 보면 앞날을 제대로 내다보고 건전하게 나라를 열어 갈 위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뽑힐 수 있어. 그럴 땐 조국 근대화라는 혁명 과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 그러니 내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이런 김대중에 대한 불안감 말고도 장기 집권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점차 강하게 표출되는 것도 문제였다. 그 결과 1971년 대선 한 달 뒤 실시된 5.25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의석이 이전에 비해 2배가 늘어나 ‘실질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3선 개헌으로 대통령이 된 터라 당시 헌법으로는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정말 ‘특수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차피 총선에서 국회의원 3분의 2 의석 확보에 실패한 이상 다시 국회의 헌법 개정 절차를 밟아 장기 집권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1971년 10월 15일의 위수령, 12월 6일의 ‘국가비상사태’ 선언, 12월 27일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발동했다. 유신 체제로 가는 전주곡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새로운 권력 체제를 만들 수 없었다. 보다 강력한 한방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절대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개헌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리가 필요했다. ‘이러이러해서 개헌이 필요하고, 새 헌법은 강력한 리더십을 보장해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런 논리 말이다.

    박정희와 측근들은 당시의 안보 현실과 남북관계를 개헌을 위한 명분으로 삼고자 했다. 어떻게 프레임을 구축하는가에 따라 개헌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를 추진하였다. 대선이 있던 1971년 3월에도 닉슨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주한미군 7사단 2만2000명이 철수했다. 이에 맞서 박정희는 ‘자주 국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내외신 합동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72년 5월 4일간 북한을 다녀왔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성명은 북한에서도 동시에 발표되며, 북한 측의 박성철 부수상이 5월말부터 4일간 서울을 방문하여 회담을 가진 사실도 공개하였다. 그리고 남북한이 무력도발을 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자주적 통일을 추구하자는 데 합의했다고 발표하였다.

    이 성명이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여기에서 남북한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을 천명하면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여 다방면적 교류와 대화를 확대하기로 합의하였다. 7․4공동성명은 오랜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던 한국인 모두에게 방금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환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 남북 대화의 복음이 유신 선포의 명분이 될 줄 당시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위해 결국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 선포와 함께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였다. 흔히 말하는 10월 유신 선포이다. 여기에서 박대통령은 자신의 새 체제를 유신(維新)이라 부르며 남북 대화가 시작되어 평화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주한 미군 철수라는 냉혹한 국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대통령 중심의 강력한 지도체제 아래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구실로 자신의 조치를 합리화했다. 이 날 발표된 특별 선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등 현행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다.
    2.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3.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붙여 확정시킨다.
    4.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말 이전에 헌정 질서 정상화시킨다.

    [사진] 유신 선포를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오른쪽에 세로로 ‘평화통일 지향 개헌’이라는 글이 보인다. 박정희는 이렇게 남북대화를 권력 연장에 악용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세 번째 항목으로 시대 상황에 맞게 헌법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헌법은 평화 통일을 위한 헌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제 본격적으로 ‘평화 통일’ 마케팅을 시작할 터였다. ‘개헌할 헌법은 남북대화가 시작되었으므로 평화 통일을 위해서 꼭 필요한 헌법이고, 주한 미군도 철수하는 상황이라 국가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 번영을 위해서도 필요한 헌법이다. 통일과 번영을 위해서는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을 보장해줘야 한다.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을 보장해주는 것은 다 통일과 번영을 위한 것이지, 독재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이다.’ 대략 이런 논리였다. 박정희의 말을 들어보자.

    “이번 비상조치는 결코 한낱 정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국권을 수호하고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성실한 대화를 통해 전쟁 재발의 위험을 미연에 막고, 나아가서는 5천만 민족의 영광스러운 통일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실로 우리 민족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불가피한 조치라고 확신한다.” (박정희, 10월 유신 선언 중)

    10월 유신은 안팎으로 곤경에 처한 박 대통령이 자신의 영구 집권을 달성하기 위해 내 놓은 카드로 그것이 이루어진 과정에서 보나 그것이 추구한 목적에서 보나 사실상 제2의 5.16쿠데타였다. 과거에는 반공을 위해 독재가 필요했다고 했다가 이제는 평화통일을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이어서 박 대통령은 새로운 헌법 개정안을 내놓았는데, 그것에 따르면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되고, 임기는 6년으로 연장되었으며, 종신집권이 가능하고,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권을 가지며,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할 수 있었다. 이 헌법은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보장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의 기본 원리인 3권 분립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헌법안은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 공고되었다. 뒤이어 국민투표 계도 요원들의 찬성 발언만이 가능한 상황에서 11월 21일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사진]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당시의 홍보물이다. 이 헌법을 찬성하면 번영과 통일이 오고, 반대하면 혼란과 분열 그리고 파멸이 온다는 이분법을 들이대며 찬성을 강요하고 있다.(박건호 소장자료)

    이 국민투표를 앞두고 유신 헌법 지지의 당위성이 언론을 통해서나 공무원들을 통해서 울려 퍼졌다. 이 헌법을 지지하는 것은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것이고, 이 헌법을 반대하는 것은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나 독재냐의 프레임이 아니라 통일이냐 반통일이냐의 프레임이 설정되었다. 당시가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고 남북 대화가 막 시작되어 통일의 희망이 싹트고 있었던 시대 상황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이 헌법을 지지하는 것은 국가 위기상황 극복과 민족 번영을 지지하는 것이고, 이 헌법을 반대하는 것은 민족의 운명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반민족행위인 것으로 간주되어 민족이냐 반민족이냐의 프레임도 덧씌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대놓고 유신 헌법을 반대할 수 있었겠는가? 이 헌법 지지하면 통일이 되고, 민족 번영이 이루어진다는데…… ‘평화 통일’이라는 레토릭은 정권 입장에서 보자면 꽤 근사한 것이었다.

    이순신과 김유신을 페르소나로 삼은 박정희

    그러면서 대통령과 측근들은 우리 역사의 한 영웅을 주목하였다. 바로 김유신이었다. 참으로 탁월한 발굴이었다. 1960년대 박정희가 주목한 인물은 단연 이순신이었다. 영웅을 넘어 성웅으로 이순신을 신격화하였다.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 장군 = 가난과 정쟁, 구악에서 나라를 구한 군인 출신의 박정희’ 이런 등식을 원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박정희는 매년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 현충사를 참배했으며 1966년부터는 ‘현충사 성역화 작업’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탄신 기념일 제정, 세종로에 이순신 동상 건립, [난중일기] 국보 지정 등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일들이다.

    [사진] 이순신에 대한 성웅화 작업의 일환으로 서울 세종로에 이순신 동상이 건립되었다.(위, 연합뉴스 사진) 어느 학교의 기념 사진으로 현관 위에 ‘충무정신 바탕삼아 민족중흥 앞장서자’라는 구호가 보인다. 이순신 성웅화의 시대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196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아래, 박건호 수집사진)

    그런데 유신헌법을 홍보하는 데는 이순신보다는 김유신이 더 나아 보였다. 일단 유신(庾信)이라는 이름이 유신(維新)과 발음이 같고, 민족의 평화통일을 표방하고 헌법을 바꾸는 마당에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절묘한가. 당시 정부가 어린 학생들에게 유신 홍보용으로 퍼뜨린 노래 가사에는 그들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산토끼] 노래에 가사만 바꾸어서 부르게 한 것으로 빠르고 경쾌한 노래라 당시 고무줄놀이에도 적격이었다.

    [사진] 경주에 있는 김유신의 무덤과 김유신 동상이다. 박정희에 이어 김유신도 박정희 체제를 뒷받침하는데 호출되었다.

    “십일칠(10. 17)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하듯이
    남북통일 되고요
    근대화에 목말라 바가지에 물 떠서
    목마른 자 물주는 바가지를 믿어요.”

    갑자기 ‘바가지’(박정희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주목)가 좀 생뚱맞지만 이 노래는, ‘김유신은 삼국통일, 10월 유신은 남북통일, 유신은 근대화와 민족번영을 위한 것, 유신은 근대화에 물을 긷는 바가지 같은 것, 바가지는 박정희, 박정희는 김유신’ 이런 인식을 은연중에 심어주고 있다.

    유신 홍보에는 김유신만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전봉준도 동원됐다. 물론 유신헌법이 확정되고 3년이 지난 1975년 유신헌법 찬반투표 때이긴 하지만 말이다. 1975년 경기도 교육위원회가 만들어 전국에 보급시킨 노래인 [유신새야]는 기존 동학농민운동의 역사가 새겨진 [파랑새]에 가사만 바꾼 것이었다. 그 가사 내용은 몇 년 전 김유신과 박정희를 연결시킨 노래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새야 새야 유신새야. 푸른 창공 높이 날아
    조국중흥 이룩하고 자주통일 달성하자.
    새야 새야 유신새야. 너도 나도 잘 살자는
    유신헌법 고수하며 국력배양 이룩하자.
    유신 유신 우리 유신 우리 살림 오직 살림 오직 유신
    유신체제 반대하면 붉은 마수 밀려온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박정희가 유신헌법이 통일과 번영을 위해 필요하다고 점잖게 홍보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유신선포 당시 국민들에게 이 헌법이 부결되면 뒷일은 책임질 수 없을 거라는 투의 협박까지 분명한 어조로 밝혀 놓았다. 평화통일을 지지하지 않으면 전쟁을 통한 통일을 모색하겠다는 뜻일까?

    “통일과 번영을 바라는 국민들은 이러한 비상조치를 지지할 것으로 믿으며, 그러나 만일 국민여러분이 비상조치에 따른 헌법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 국민들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박정희, 10월 유신 선언 중)

    어쨌든 이런 전방위적인 홍보와 ‘협박’속에서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유권자 91.9%의 높은 투표율과 91.5%의 압도적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그 후 ‘유신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2월 23일 단독 출마한 박정희 후보를 99.9%의 찬성(2359명 중 2명이 기권한 2357명의 찬성)으로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보장하는 유신체제의 막이 올랐다. 결국 박정희 영구 집권을 위한 그들의 10월 쿠데타는 성공을 거두었다. 유신 헌법을 지지하고 유신 체제 형성에 기여했던 국민들은 이후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혹독한 독재를 감당해야 했다. 대가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그런데 강력한 독재체제 수립은 남쪽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싸우면서 서로 닮아간다고 북쪽의 김일성 역시 1972년 12월 주석직을 신설하고 그 주석에 막강한 권력을 집중시킨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김일성 절대권력 체제를 구축하였다. 역시 남북대화의 전개라는 상황 변화를 악용한 것이다. 1972년 12월 한반도는 남북 모두에 쌍둥이처럼 비슷한 절대권력 체제가 확립된 그런 시기였다. 더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기 직전, 북의 김일성에게 이러한 사실을 미리 통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적대적 공생’을 했던 것이다.

    [사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기 전 그 사실을 사전에 북한에 통지했음이 2012년 밝혀졌다. 그림은 당시 이를 풍자한 것이다. (2012년 10월 18일 한겨레 그림판 그림)

    ‘김유신 장군 얼 이어받아 남북통일 이룩하자’

    이제 처음의 그 사진, 매표소에서 신사가 표를 사는 사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위에서 소개한 김유신 나오는 동요의 내용을 이해했다면, 사진 속에 보이는 김유신 기록화 전시회가 왜 열렸는지, 또 ‘김유신 장군 얼 이어받아 남북통일 이룩하자’라는 구호가 무슨 의미를 담았는지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1970년대 유신 체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혹은 유신 체제가 만들어진 후의 사진으로 보인다. 한옥 건물인 것으로 보아 경주의 ‘통일전’(統一殿)이 아닐까 추측되는데 이 사진만으로는 장소까지 알기는 쉽지 않다. 통일전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문무왕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남북통일의 의지와 염원을 밝히기 위해 유신 시기인 1977년 건립된 곳이므로, 사진 속의 한옥 건물이 통일전이라면 1977년 이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매표소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은 경주에 1977년 건립된 것이므로 종합해보건대 1977년 통일전과 김유신 장군 동상이 건립되는 것을 기념한 전시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소는 경주였을 것이다.

    [사진] 1972년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당시의 홍보 표어들이다. 이 헌법에 찬성을 해야 평화통일과 민족번영,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가 토착화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왼쪽, 박건호 소장), 문화공보부에서 제작한 표어이다. 박정희는 60년대 반공을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72년 유신을 선포하면서 갑자기 평화통일을 위해 독재(물론 자신은 이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표현했지만)가 필요하다고 버전을 바꿨다. ‘반공’과 ‘평화통일’ 두 구호 모두 박정희에게는 자신의 체제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매우 어색한 이런 조합의 구호도 만들어졌던 것이다. ‘반공으로 평화통일’ (오른쪽, 박건호 소장)

    박정희는 673년 죽었던 김유신을 1300만년에 살려내 유신 헌법과 유신 체제의 홍보 도우미로 활용했다. 이 사진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유신 체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집권자들이 역사 속에서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끄집어내 변형해 썼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국민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었다기보다는 집권자들이 영악하고 교활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유신시대에만 권력자들이 영악한 것이 아니다.

    유신시대로부터 40년이 지난 2012년 대선 당시의 ‘국정원 댓글사건’!

    권력자들은 늘 영악하다. 그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속이고 조작한다. 여론을 만들어낸다. 멍청하게 눈만 뜨고 있으면 당한다. 유신시대의 국민들을 무지몽매하다고 비판할 수 있으려면, 우리들은 무지몽매에서 벗어나 있다고 떳떳하게 자부할 수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2012년 대중 역시 1972년 대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51.6%의 국민들이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에게 표를 던져, 신성한 주권을 위임했다. 그로 인한 대가 역시 참혹했다. 집권 4년 동안 국민들은 ‘박근혜’라는 허깨비에 속은 대가로, 국정은 농단되었고 정의는 무너졌고, 정경유착과 경제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안보 현실은 참담해졌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2010년대의 우리들은 과연 유신시대의 국민들보다 덜 무지하고 더 깨인 시민들일까?

    시민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권력자들은 늘 역사를 왜곡하고 현실을 왜곡한다. 그리고 영악한 말로 속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시민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유신시대의 신민이 따로 있고, 2010년대 민주 시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노대통령 묘지석 앞에도 새겨져 있다.

    [사진] 유신헌법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일가족. 큰 딸 박근혜가 투표함에 표를 넣고 있다. 이 시기를 ‘유신공주’로 살았던 박근혜는 이후 대통령이 된 2010년대의 대한민국을 유신시대로 되돌리려하다가 시민들의 촛불혁명으로 탄핵 당했다. 2010년대에 김기춘이라니…2010년대에 국정교과서라니… 시대착오적인 대통령이었다.(왼쪽), 창원에는 현재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10월 유신 기념탑이 있다. 군관민 그리고 학생이 유신헌법이 실린 책자를 떠받치고 있는 장면이다. 이 기념탑은 없애지 말고 두고두고 보존하여 유신시대의 역사를 증언하는 유물로 기념해야 할 것이다. (오른쪽, 경남도민일보 사진)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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