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시즘의 기로에 선 브라질
    [국제정치] 28일 결선···극우파 집권 가능성 높아
        2018년 10월 12일 05: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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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7일,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는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있었다.(관련 기사) 투표는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로의 회귀를 공공연히 주창하는 사회자유당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후보가 1위,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이하 룰라) 전 대통령을 대신해 노동자당 후보로 출마한 페르난도 아다지 후보가 2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보우소나루가 46%를 득표해 29%를 득표한 아다지를 큰 격차로 따돌렸지만 과반 획득에는 실패함으로써 결국 오는 28일 결선 투표를 앞두게 되었다.

    극우 파시스트 대통령이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이번 브라질 대선을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1차 투표 결과는 어쩌면 조금은 위안이 되는 소식일지로 모르겠다. 아직 결선 투표라는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도하기는 어렵다. 보우소나루가 줄곧 1위를 달려 왔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번 결선투표가 극우 세력과 좌파 진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진검 승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운명이 결정되기까지 채 20여일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결선에 오른 사회자유당 보우소나루(왼쪽)와 노동자당 아다지(방송화면)

    ‘룰라’의 대통령 선거

    아다지가 노동자당 후보로 나섰지만 이번 선거는 사실상 룰라와 보우소나루의 대결이다. 아다지가 2003년 룰라의 노동자당 정부가 출범한 이후 2005년부터 6년 반 동안 교육장관을 지냈고, 2016년까지 상파울루 시장을 지낸 룰라의 복심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8월 31일 브라질 연방선거법원의 판결로 룰라의 옥중출마가 좌절되는 바람에 부통령 후보였던 아다지가 룰라를 대신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는 점 때문만도 아니다. 지난 9월 옥중출마 포기를 선언하면서 룰라가 지지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것처럼, 룰라는 이미 고유명사가 아니라 수백만 브라질 민중의 꿈을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우소나루가 되살리고자 하는 파시즘과 금융독점자본의 지배에 신음하는 수백만의 꿈 말이다.

    지난 4월, 브라질 금속노조 건물 앞에서는 룰라에게 12년 1개월의 중형을 확정한 연방법원의 결정을 집행하려는 경찰과 룰라의 지지자들이 위태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2016년 9월 부패 혐의로 기소된 룰라는 2017년 7월 1심 재판에서 징역 9년 6개월 형을, 그리고 금년 1월 2심에서 징역 12년 1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룰라는 일체의 혐의를 부인하고 상고했지만, 3월 26일 연밥법원은 룰라 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2심 형량을 확정했다.

    룰라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4월 4일까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던 연방법원은 4월 5일 심리를 열어 이튿날인 6일 오후 5시까지 연방경찰에 자진 출두할 것을 명령했고, 룰라 측은 시한을 넘겨 금속노조 건물에 머무르면서 형 집행 일시중단을 요청했지만 이 역시 기각됐다. 결국 룰라는 금속노조 건물을 걸어 나와 구속 수감되었고, 10월 대통령 선거에 옥중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8월 15일 대통령 선거 후보자 등록을 마친 후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룰라는 37.3%의 압도적 지지로 18.8%의 지지율을 기록한 보우소나루를 두 배 가까이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운명의 8월 31일, 브라질 연방선거법원은 부패혐의로 형 집행 중인 룰라에게는 후보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고, 노동자당에게는 9월 12일까지 후보를 교체하라고 명령했다. 9월 11일, 룰라는 출마를 포기했고 부통령 후보로 그와 함께 선거에 나선 아다지가 노동자당의 새로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룰라의 혐의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2009년 당시 브라질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의 건설 계약 수주를 도와주는 대가로 13억 원 상당의 호화 아파트를 선물 받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도 룰라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자신의 혐의가 우파와 결탁한 사법부와 언론 재벌의 작품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가 음모의 당사자로 지목한 브라질 연방법원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2011년 1월 8년 동안의 대통령직을 마치고 퇴임할 때 9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기록했고, 2009년 당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라 칭송받던 룰라는 이미 칠순이 넘은 나이에 12년 1개월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부패 스캔들과 탄핵

    룰라가 부패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다. 부패 스캔들과 연루된 전력도 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룰라의 최측근 보좌관이 금품을 이용해 국회의원들의 표를 매수한 사건으로 처벌받은 바 있었다. 당시 룰라는 이 사건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종결되었지만,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매관매직은 물론 의회의 투표조차 금품으로 매수하는 일이 빈번한 것이 브라질의 정치풍토이다. 룰라는 이에 맞서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 왔다. 따라서 자신은 2009년의 뇌물과 무관하다는 룰라의 주장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룰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혐의에 비해 12년 1개월이라는 형량은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다. 최근 룰라를 면담하고 돌아온 노암 촘스키의 말처럼 12년 1개월의 형량은 룰라의 부패 행위에 대한 사법적 처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를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키려는 정치적 처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옥중 출마를 선언한 그가 지지율 1위의 대선 후보였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룰라가 연루된 부패 혐의는 2014년 이후 브라질 정국을 강타한 폭풍의 눈이었다. 그 시작은 2012년 이른바 “세차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브라질 연방경찰의 돈세탁 사건 수사였다. 당시 브라질 연방경찰은 브라질 연방의회 건물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한 주유소를 돈세탁이 벌어지는 장소로 지목하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주유소에서 세탁되는 돈이 국영 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와 연관되어 있음이 확인되면서 수사는 페트로브라스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부패 사건 수사로 확대되었다.

    페트로브라스의 고위 임원들이 특정 건설업체들과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리베이트를 챙겨 온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수사가 확대되면서 이 사건은 이내 정치권의 부패 스캔들로 확대되었다. 페트로브라스를 매개로 한 거액의 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가 선거자금과 의원의 표를 매수하는데 사용되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선거과정에서는 물론 의회의 입법과정에서도 공공연히 돈거래가 오가는 브라질 정치의 오랜 민낯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정치권으로 수사가 확대되면서 브라질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2016년 3월 300만 명의 브라질 민중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부패한 정치권을 규탄했고, 너나 할 것 없이 부패에 연루되어 있던 정치권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룰라에게 적용된 2009년도의 부패 혐의는 이 와중에 불거져 나왔다. 그리고 2016년 4월 17일, 룰라의 뒤를 이어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우마 호세프의 탄핵안이 하원에서 가결되었다.

    부패 스캔들의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정작 그녀는 부패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은 바 없었다. 게다가 탄핵을 주도한 미셰우 테메르 당시 부통령과 사회자유당의 보우소나루를 비롯해 탄핵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부패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셰우 테메르는 호세프 탄핵 후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지만, 금품을 이용해 뇌물 혐의로 수감된 정치인의 입을 막으려했던 것이 들통 나면서 2017년 의회에 탄핵안이 상정되기도 하였다. 유력한 대선 주자인 보우소나루는 현재 부패 사건으로 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 누구를 탄핵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호세프의 탄핵 사유는 엉뚱하게도 그녀가 201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부의 경제실적을 부풀릴 목적으로 국영은행의 자금을 정부 재정에 사용한 후 되돌려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하기도 했던 호세프는 2001년 브라질 노동자당에 입당, 2010년 대통령 선거에 룰라의 후계자로 나서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2014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 집권 2기에 들어선 터였다. 브라질의 재정회계법 상 국영은행의 자금을 재정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법의 소지가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녀의 주장대로 브라질의 역대 어느 정부도 재정 목적으로 국영은행의 자금을 사용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당연한 통치행위가 탄핵의 사유로 둔갑한 것이다.

    조용한 쿠데타

    표면적으로만 보면 호세프의 탄핵은 부패 스캔들의 와중에 살 길을 찾아 몸부림치던 브라질의 부패한 정치인들이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은 결과였다. 그러나 늘 그렇듯 실상은 이보다는 복잡하다. 그녀의 탄핵 사유가 재정회계법 위반이라는 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녀가 법을 위반하면서 사용했다는 국영은행의 자금은 2014년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급격히 수요가 늘어난 사회보장비용에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근저에는 고금리 정책을 둘러싼 브라질 금융자본과 호세프 정부의 대결이 자리하고 있었다.

    룰라가 집권하던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브라질은 연평균 3.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2010년에는 7.5%로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빈민층에게 매달 일정액의 금액을 직접 지급하는 ‘보우사 파밀리아’ 등 룰라 정부의 대표적인 복지정책은 이러한 경제사정에 힘입은 바 컸다. 그리고 2011년, 호세프 정부는 전임 룰라 정부의 복지정책을 확대 계승하겠다는 포부로 제 1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사정은 더 이상 좌파 노동자당 정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2010년 최고치를 기록한 경제성장률이 2011년부터 둔화세로 돌아서면서 실물경제의 침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서 비롯되었다. 2013년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이 이른바 양적완화 정책의 종료와 금리 인상을 내비치면서 브라질의 통화와 증시가 급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 신호가 브라질에 있는 금융자본을 일거에 빨아들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환율 방어와 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자본 유출을 막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브라질의 선택은 금리를 급격히 인상하는 것이었다. 이자 소득을 좇는 금융자본의 속성에 기대 자본 유출을 막자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위험부담도 컸다. 실물경제가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급격한 금리 인상은 심각한 불황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2013년 이후 브라질의 금리 인상은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만큼 너무도 급격했다. 2012년 7.25%였던 브라질의 기준 금리는 2013년부터 급격히 인상되어 2015년 그 두 배 가까운 14.25%까지 치솟았다. 금리 인상의 여파를 확인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2014년 브라질 경제는 급격한 불황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브라질의 고금리 정책은 승자와 패자를 확연히 갈라놓았다. 금융자본은 승자였고, 호세프 정부와 브라질 민중은 최대 피해자였다. 본격적인 불황이 시작된 2014년도에 브라질 주요 은행의 수익률은 25%에서 30%에 달했다. 중소기업과 영세업자의 폐업이 속출하고 실업자가 양산되는 동안 브라질의 금융자본은 최고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금리 정책으로 브라질 사회의 모든 돈은 금융자본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면 호세프 정부와 브라질 민중은 늘어나는 이자 부담에 신음해야 했다. 2013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던 브라질 정부의 이자부담은 2015년도에는 GDP의 9%까지 치솟았다. 정부의 재정적자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복지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고금리와 경기침체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재정적자의 부담이 만만치 않았지만 호세프 정부는 이러한 복지 수요를 무시할 수 없었다. 탄핵 사유가 된 재정회계법 위반은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국영은행 자금을 전용하는 것보다 근본적인 해법은 당장 이자율을 낮추는 것이었다. 당연히도 호세프 정부는 2013년 말부터 다양한 금리 인하 조치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내 브라질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금융자본의 막강한 힘에 맞닥뜨려야 했다. 금융자본과 그에 결탁한 우파 정치세력들은 집요하게 금리 인하 조치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금리 인하 대신 재정 축소, 복지 축소를 완강히 고집했고, 어정쩡한 자유주의자들까지 여기에 가세했다. 금융자본의 이익 수호를 위한 일종의 반 복지, 반 좌파 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호세프 정부, 나아가 좌파 노동자당 정부는 만악의 근원이었다. 기회만 된다면 통째로 들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노암 촘스키의 지적처럼 지난 몇 년간 브라질 정치권을 온통 들쑤셔 놓았던 역사상 최대의 부패 스캔들은 이 조용한 쿠데타를 실행하기 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와 파시즘

    2016년 4월 17일 호세프에 대한 탄핵안이 하원에서 통과되던 날, 보우소나루는 자신의 탄핵 찬성투표를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브릴랸치 우스트라 대령에게 헌정한다고 말했다. 우스트라는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도이코지’ 고문단을 이끌고 반정부 인사들을 잔학하게 고문하기로 악명 높았던 자이다. 호세프도 반정부 게릴하 활동을 하다 체포된 후 이 고문단에서 구타와 전기고문은 물론 벌거벗겨진 채 방치되는 수모를 당한 바 있었다. 호세프 탄핵안이 가결되는 날 보우소나루가 그 악명 높은 우스트라를 다시 호명해 낸 것이다. 호세프의 탄핵이 1970년대 파시즘의 시대로 돌아가는 첫 걸음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보우소나루는 1970년대 쿠데타를 일으킨 브라질의 군부와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쿠데타의 주역들이 그랬듯이 보우소나루 또한 자신의 목적이 부패한 정치권을 일소하고 건전한 사회질서를 복원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군부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권좌에 올랐다면 그는 권좌에 오른 후 폭력을 행사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과거의 군부가 그랬듯이 보우소나루도 브라질을 신자유주의의 실험실로 만들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계획이 없다는 점이다.

    스스로 경제에는 문외한이라고 한 보우소나루는 집권 후 경제학자 파울로 게데스가 모든 경제정책을 맡을 것이라고 했다. 파울로 게데스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본산이라 일컬어지는 시카고학파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시장개혁을 주장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1970년대 칠레에서 피노체트 정권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자신들의 시장만능주의 교리를 마음껏 실험하던 시카고학파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게데스가 브라질 경제에 대해 내리는 해법은, 모든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러하듯 경제학자라는 직함에 비해 차라리 소박하다. 그들에게 민영화 외에 답은 없다.

    그들이 칠레에 내린 민영화라는 처방은 독약이었다. 멀쩡한 국가를 환자로 몰아세운 그들은 민영화라는 독약을 처방하고 있었다. 독약을 먹으니 병세가 호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되었지만, 그들은 아직 민영화라는 약을 충분히 주사하지 않은 탓이라고 우겼다. 피노체트는 독약을 먹은 칠레 민중들이 신음소리 하나 내지 못하도록 총칼로 짓밟는 역할을 맡았다. 총칼 아래에서 그들의 민영화 실험은 계속되었다. 민영화라는 약이 결국 칠레를 빈사상태에 이르게 했을 때 그들은 또 다른 실험실을 찾아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칠레가 실험을 견뎌내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았다는 불만과 함께.

    이제 보우소나루가 브라질을 기꺼이 게데스의 실험실로 제공하려 하고 있다. 자신의 말대로 경제에 문회한인 보우소나루가 경제학이나 경제논리를 알아서 그리할 리는 만무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게데스와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민영화야말로 보우소나루의 정치적 기반인 금융자본의 수익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금리로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은 금융자본은 이제 민영화로 민중의 세금마저도 마음껏 편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노체트의 칠레가 그랬듯 이 실험은 총칼 없이는 불가능하다. 독약을 투여하는데 환자가 몸부림치지 않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고, 독약이 다 투여될 때까지는 환자를 꼼짝 못하게 묶어 두여야 한다는 것이 이 자칭 해결사들의 확고한 신념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1970년대 남미에서 군사 파시즘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우연히 아니다. 그들이 실험하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브라질의 운명이 채 20일도 남지 않았다.

    필자소개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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