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에서 베트남 전쟁을 거쳐 이라크 전쟁까지
    2006년 05월 15일 11: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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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ntry Joe McDonald
"War War War"
1971년 발표
.
1. Forward
2. The Call
3. Young Fellow, My Lad
4. The Man From Athabasca    
5. The Munition Maker
6. The Twins
7. Jean Desprez
8. War Widow
9. The March Of The Dead
 

만약 60년대 미국 히피 운동에도 좌우파가 있었다면 컨트리 조 맥도널드는 분명 ‘좌파’에 속할만한 인물이다.

1942년 캘리포니아에서 출생한 죠셉 맥도널드의 부모는 열렬한 미국공산당원이었다. 당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아들의 이름을 죠셉 ‘스탈린’ 맥도널드로 정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히 아들은 스탈린주의자로 자라지는 않았다. 죠셉 맥도널드는 마르크스주의 대신 기타를 선택했다.

1965년 이름을 컨트리 조로 바꾸고 ‘피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 배리 멜튼과 함께 “컨트리 조와 피쉬(Country Joe and the Fish)”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일렉트릭 기타로 무장했지만 컨트리 조 맥도널드는 음악적 뿌리를 부모님의 손을 잡고 참석했던 캘리포니아 좌익 지식인 공동체의 포크 문화에 두고 있었다.

1920~30년대 미국 노동운동의 노래들이나 우디 거스리, 리드벨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란 그는 1969년 자신의 첫 번째 솔로앨범을 우디 거스리의 노래들로 채우기도 했다.

이런 영향에 60년대의 어수선한 시대적 분위기까지 더해져 “컨트리 조와 피쉬”라는 이 괴상한 이름의 밴드는 같은 시기 미국 서부해안에 출현한 싸이키델릭 뮤지션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밴드가 됐다.

데뷔 무렵부터 1970년 해산할 때까지 이들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베트남 전쟁 반대’였다. 밴드의 존재이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레코드와 공연을 통해 이들은 전쟁을 조롱하고 그런 터무니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미국을 조롱했다.

1967년 발표한 두 번째 앨범에 수록된 ‘I-Feel-Like-I’m-Fixin’-to-Die Rag’이라는 노래는 집회나 행진에서의 구호외치는 방식을 차용해 만든 노래로 역시나 당시 반전집회나 행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됐다.

밴드 활동의 정점은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참가해 50만 관객들로 하여금 ‘미국이 얼마나 멍청하고 전쟁이 얼마나 엿같은(fuck!) 짓이냐’는 합창을 이끌어 냈을 때였다. 그러나 그 이후 여러 가지 불운이 겹치면서 밴드는 해산했다. 그리고 밴드가 정식으로 작별을 고하기 전에 컨트리 조는 이미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 * *

1971년 발표된 <War, War, War>는 컨트리 조의 4번째 솔로앨범이다. 이 앨범은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시인 로버트 서비스(Robert W. Service)가 1916년에 발표한 반전 시집 <적십자 자원자의 노래The Rhymes of a Red-cross Man>에 곡을 붙인 것이다.

로버트 서비스는 영국 출신의 캐나다인으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메리칸 필드 서비스’에 참여해 유럽전선으로 가게 됐다. 아메리칸 필드 서비스는 자원자들로 구성된 앰뷸런스 후송대였다.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이 팀의 일원으로 1차대전에 참전했다.

1차세계대전에서 처음 도입된 앰뷸런스는 빠른 후송을 통해 많은 군인의 목숨을 살렸지만 정작 앰뷸런스 운전수는 가장 사망률이 높은 보직 중 하나였다. 당시의 차량은 지금처럼 튼튼한 것도 아니었고 적십자 차량은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앰뷸런스 운전수는 여러모로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그리고 운전수는 자신의 위험뿐만 아니라 부상병들의 참혹함을 항상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스러운 자리였다.

컨트리 조는 이 시집에 실린 53편의 시 중에서 8편을 골라 음악으로 만들었다. (마지막 곡은 다른 시집에서 고른 것이다) 컨트리 조는 12현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만을 가지고 시인이 “학살자들의 언덕에서 들려오는 시와 노래” 그리고 “총들의 주홍빛 합창을 들은 인간의 생생한 공포”라고 묘사한 전장에 대한 노래들을 녹음했다.

‘애서배스카에서 온 사내The Man from Aphabaska’는 참호속의 저격수가 된 캐나다 사냥꾼이 같은 참호 안의 프랑스 병사들에게 자신이 보고 겪은 캐나다의 대지를 설명하는 것을 묘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으로 끝맺는다.

   
▲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 무대에 선 컨트리 조. 길제로 미 해군 출신인 그는 참전군인들과의 연대의 상징으로 군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곤 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참전군인과 가족을 돕는 활동을 벌였다.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군수업자들을 풍자한 ‘탄약제조업자The Munition Maker’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노래한다. 죽음을 통해 벌어들인 돈도 정작 자신의 죽음에는 도움이 안된다는 풍자다. 역설은 로버트 서비스가 전쟁의 무의미함을 드러낼 때 자주 사용한 수법이다.

‘쌍둥이The Twins’는 용감한 존과 욕심쟁이인 제임스라는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다. 존은 용맹한 군인이 되고 제임스는 고향에 남아 자기 이득만 챙기지만 결국 전장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누구냐고 시인은 되묻는다. ‘전쟁 미망인War Widow’에서는 전쟁이란 항상 인구가 급증하지 않도록 억제해주는 좋은 것이라고 풍자한다. 컨트리 조도 앞서 이야기한 노래 ‘I-Feel-Like-I’m-Fixin’-to-Die Rag’에서 비슷한 풍자를 시도했었다. 그는 미국의 기성세대를 향해 “전쟁이란 수지가 맞는 사업인 만큼, 당신 아들들을 한번 투자해보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 앨범의 절정은 10분짜리 대곡인 ‘쟝 데프레Jean Desprez’다. 이 노래는 1차세계대전이 아니라 보불전쟁 시기의 이야기로, 프랑스 농촌의 한 소년이 전쟁터로 끌려가 결국 살인자가 되는 과정을 길게 노래한 것이다.

컨트리 조가 로버트 서비스의 시에 노래를 붙여 앨범을 만든 목적은 분명했다. 1971년 당시에도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비슷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반전음악’들 중에서도 이 앨범은 빼어난 수작으로 손꼽힌다.

* * *

한가지 역설은 60년대 말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컨트리 조를 포함한 당시 미국 서부의 급진운동과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이 가장 좋아한 시인이 바로 로버트 서비스였다. 미국 보수주의의 화신과 반전운동의 선두에 서있던 음악인이 동시에 사랑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컨트리 조와 로널드 레이건의 대결은 80년대에도 계속됐다. 그는 미국이 저지른 전쟁과 중남미의 무력개입에 대한 반대 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컨트리 조는 지금도 캘리포니아의 급진정치 운동에 관여하면서 여러 항의 행동의 선두에 서곤 한다. 로널드 레이건의 뒤를 이은 배우 출신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캘리포니아의 복지 예산을 삭감했을 때도 그는 항의 데모의 선두에 섰다.

가장 최근에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농성으로 유명해진 신디 시헌을 지원하는 활동을 통해 다시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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