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의 삶으로 나아가기
    [종교와 사회] 우리는 가로막는 것들
        2018년 10월 02일 05: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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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어느 정당은 자유민주주의를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현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 대신에 인민을 넣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민주주의면 민주주의지 자유니 인민이니 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다.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백성, 인민, 국민이 주인되자는 이념 아닌가.

    어쨌든 자유민주주의를 끔찍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말 백성들을 자유롭게 살게 했는지, 나는 의문이 든다. 어느 정당이, 어느 정치가, 어느 이념이나 종교, 체제가 과연 우리에게 참 자유를 줄 수 있을까? 참 자유는 역시 나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찾아야 하고, 내 존재 깊은 곳 바로 거기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하트마 간디는 그의 전 생애에 화두가 되는 세 가지를 강조했는데, 첫째는 사티아그라하(진리 추구), 둘째는 아힘사(불살생, 비폭력), 셋째는 브라마차랴(금욕과 절제)였다. 중요한 것은 진리 추구였는데, 진리 추구라는 그의 삶의 목적은 ‘신(神)이 인간에게 부여한 신성(神性)을 실현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아 알아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참 자유를 얻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진리의 본질이라는 말이라 하겠다.

    이렇게 얻은 참 자유로 간디는 인도사회 개혁을 위해 헌신했고, 억압적 영국 식민통치와 싸워 결국 인도의 독립을 쟁취해냈다. 개인의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진리 추구의 삶이 얼마나 놀라운 힘인지를 간디는 역사에서 증명해 주었다 할 수 있다.

    간디에게 이런 능력을 주는 참 자유의 삶으로 나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방해되는 것은 무엇일까?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보자,

    노자는 도덕경 12장에서 오색(五色: 청,황,적,백,흑), 오음(五音: 궁,상,각,치,우), 오미(五味: 신맛,단맛,매운맛,짠맛,쓴맛)에 빠져 사는 삶을 경계하고 있다. 결국, 감각적인 것에 빠져서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오색, 오미, 오음을 즐기며 감사하는 삶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 빠지는 탐닉과 집착, 중독되는 삶이다. 우리의 감각적인 즐거움이나 외부적인 가치들은 간디가 말한 본질적 진리, 참 자유의 삶, 신이 준 신성(神性)을 발견키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들이다. 이런 감각적, 도구적 가치들에 매몰되거나, 현실적으로 돈 버는 일, 아파트 평수를 늘이는 일, 호의호식하는 일,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 등 세상의 부귀,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외부적 가치의 삶에 일생을 걸고 산다면 참 자유의 삶을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허상을 좇고 실상, 실재를 놓치는 삶을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라고 한다. 신학자 틸리리는 이런 상태를 의사(疑似)종교(pseudo-religion)에 빠진 상태로 표현한다. 예수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이 역시 우리로 하여금 허상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다.

    두 번째 우리의 참 자유를 향한 삶을 방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머리로 사고하고, 추론하고, 논리화하고 체계화한 것에 대해 무한정의 신뢰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오래된 사상이나 전통, 교리, 견해 등에 대해 시대변화와 함께 의심과 재해석을 통해 진화된 이성적 결과물을 내놓고 토의해야 하는데, 질문의 문을 닫고 무조건적인 충성과 정렬을 바쳐 그 전통과 교리, 견해 등을 떠받드는 행위야 말로 참으로 위험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종교적 우상숭배의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주위에 너무나 흔한 국수죽의, 국가주의, 보수주의, 진보주의, 근본주의, 절대주의, 민족주의, 선민주의, 지역주의 등등 ‘주의’와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다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만든 이성에 대한 지나친 충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라 하겠다. 틸리히는 종교적으로 이러한 것을 유사(類似)종교(quasi-religion)라 했다. 간디는 예수는 사랑하지만 기독교는 싫어한다고 했는데, 실상인 하느님 예수를 좇지 않고 실상에 이르는 길인 기독교를 하느님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교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참 자유에 이르는 길의 방해물은 그 어떤 것보다 더 바로 ‘나’(self),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진리이고, 최고의 것이며, 가장 궁극적인 그 무엇, 곧 신적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의심스럽고 불확실하지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바로 나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는 가장 궁극적 실재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깊고, 넓고, 높은 궁극적 실존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으뜸가는 장애물이 아닐까?

    자신을 모든 생각과 판단의 중심에 놓는 자기중심주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 보존, 자기 확대, 자기 추구, 자기 영광, 자기만족 등 이기적 본능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도록 발버둥 치게 만드는 가장 큰 우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학문적으로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남을 밟든, 끌어내리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지를 점령하게 만드는 욕망의 덩어리로 만드는 우상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했던 예수의 말이 생각난다. 간디는 그래서 참 자유의 삶, 진리의 삶을 위해 브라마차랴(금욕과 절제)를 통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 발견을 이루었고, 그것은 결국 제국 영국의 거짓된 모습을 발견하는 길로 진화되었으며, 나아가 거짓과 싸워 진정한 인도의 독립인 참 자유를 얻는 힘으로까지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자유라고 할 수 있다.

    필자소개
    거창 씨알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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