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정권 어디부터 일이 꼬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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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13일 02: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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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회에서 지도자는 사람이 아닌 추상적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특히 그 사회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이런 현상이 종종 발견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났던 독일 국민들의 히틀러 숭배가 대표적인 예이다. 김일성 주석이나 박정희 전대통령도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사실 파시즘의 징조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나타나는가. 인간이란 존재가 원체 나약하기 때문이다.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 아이는 부모와 동일시하면서 기준과 가치를 체득해 나간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 (무)의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지도자에 대한 과잉집중(hypercathexis)을 통해 스스로의 자아를 지우고 이상화된 대상(자아 이상, ego ideal) 속으로 빠져든다. 동일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도자와 자기 동일시하는 사람들

       
      ⓒ연합뉴스

    동일화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분명하다. 그들은 지도자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바친다. 지도자의 결단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며, 비판의식이 결여되고 견제를 용납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래서 프로이드는 이를 퇴행으로 간주했다. 그는 ꡔ집단심리학ꡕ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종류의 원초 집단은 그들의 자아 이상이 놓일 자리에 동일한 하나의 대상을 두고 있고, 결론적으로 그들의 자아 속에서 서로를 동일시하는 수많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 나는 대통령에 대한 노빠들의 독심술을 언급하였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암시 감응성’(suggestibility)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거대한 적을 설정하는 경향을 지적하였다. 이는 전염성(contagion)이 통용되는 최면적 질서(a hypnotic order)가 가지는 배타성에서 말미암는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배타적 독점 욕망도 살펴보았다. 이는 ‘3김 정치’ 이후 한국 정치가 유포하고 있던 위기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인 노무현’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난 대선 기간 노무현 후보의 출현과 진출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노무현 후보는 다음 네 가지 면에서 한국정치의 희망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에 대한 확고한 결집을 이끌어 내었다.

    한국정치의 희망 그리고 드라마 주인공 같았던

    첫째, 그는 민주화의 영상과 겹쳐 있다. 청문회 때 맹렬하게 분노하여 명패를 움켜쥐던 모습이 국민들에게 반민주 세력에 대한 열정적인 저항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 노무현은 87년 6월항쟁의 기억을 자극하는 바 있었다.

    둘째, 그의 최종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이다. 한국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박탈감을 조장하는 커다란 요인 가운데 하나가 학연인데, 이로써 그는 이 땅의 구조적 모순과 맞서는 자리로 나서게 되었다.

    셋째, 호남 지역에서의 지지를 동력으로 삼았으니 지역차별과 공존하기가 어려웠다.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광주에서의 지지를 기억해 보라. 여러 가지 정치적 요인이 있었지만, 부산 진출을 시도하다가 번번이 좌절한 이력도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

    넷째, 애초 정치권 내에서 그의 기반은 취약하였다. 국민들의 직접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과정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같은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부패한 정치권에 칼을 들이 댈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여기서 싹트게 된다.

    자,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노무현 후보의 상징에 열광하였겠는가.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각성이 되었고, 낡은 질서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판단한 이들이다. 지역차별, 정치권의 부패한 풍토, 학벌체계의 폐쇄성 등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극적인 노무현 지지자로 나섰다. 생각해 보라. 타락한 현실을 눈 뜨고 직시했던 사람일수록 고통이 크고, 위기감은 넘쳐나지 않았겠는가.

    당선된 직후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이 즈음에서 노신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는데 갈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람시의 언급도 그 위에 포개어 놓는다. “낡은 것은 멸해 가는데 새로운 것이 오지 않을 때 위기가 온다.” 맹목적이기는 하지만, 고통과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노빠는 ‘레드 콤플렉스’에 빠진 부류와 크게 다르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것일까. 내가 보건데,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직후부터이다.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그는 한 편의 신화를 완성하였다. 그는 부패한 기득권의 배척과 맞서면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한 과정의 극적인 전개는 영웅담의 기본적인 구조와 유사하다. 영웅적인 서사가 현실 위에 구축되는 양상이니 감동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신화를 거부하는 데 존재 근거가 있다. 그리고 현실의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영웅의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권력은 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인격화된 권력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독불장군으로 나서게 되었다.

    거부하지 못한 신화와 나르시스의 깨진 거울

       
     
    ▲고야,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 43번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난다’
     

    이렇게 전개된 최근의 정치 현실은 먼저 한국 사회에 불행이다. 그리고 대통령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어느 순간 홀로 남겨진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때, 자신의 곁을 떠나는 이들을 확인하게 될 때, 그가 느끼게 고독은 겉잡을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 영웅의 나르시시즘은 깨져 버린다.

    “그는 자신 이외의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감정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러한 자기 사랑의 나르시시즘적인 자질이 지도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 연재를 마치며 두 가지만 확인하도록 한다.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희망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여 이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매 순간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져야 한다. 이제 영웅의 시대는 끝이 났다. 그리고 우리는 끝까지 이성의 몫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고야,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 제43번 참조)

    두 번째는 권력을 파악하는 데 여유를 가지자는 것이다. ꡔ사기ꡕ(史記)의 「육가전」(陸賈傳)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말을 타고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을 타고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다.” 선거는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권력의 운영은 이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결절 지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동반되어야만 한다. ‘바보 노무현’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간과되었다.

    그러니 정녕 민주주의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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