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참여론에 묻힌 진보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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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3월 13일 03: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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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의 갈등과 진보신당의 출범으로 기존 제도 안에서의 진보의 재편은 일단락된 듯하다. 물론 이른바 ‘총선이후 실질적 재창당’이라는 과정이 남아 있지만 그것이 커다란 감흥을 줄 것이라 믿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그렇기에 이 지점에서 그 동안의 과정을 다시 성찰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진보신당의 위상과 총선, 혹은 총선 이후 그들의 정치적 행보가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진보의 재구성이다.

    이를 위해 다시 애초의 질문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왜 ‘자주파’와 단절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필자 또한 지난 대선 직후 ‘완고한 자주파’와 단절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관련하여 이른바 ‘종북주의 문제’로 상징되어 왔지만, 두 가지 핵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 지난 10일 열린 녹색비례후보 추천 회의. 진보신당의 다양한 ‘색깔’은 다양한 ‘후보’로 대체되고 있다.
     

    첫째,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헤게모니로부터 이른바 진보정치세력이 완전히 분리하기 위해서이다. 87년 이후 지난 2007년까지 20년 동안 이른바 자주파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이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중요한 매개고리로서 기능해 왔다. 그것의 이론적 근거가 ‘민주대연합론’이었고 그 정치적 행태가 ‘비판적 지지론’이었다.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는 ‘비판적 지지’

    정치적으로 87년 체제가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자유주의정치세력과 군부파시스트들, 혹은 그 후예들의 타협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 70년대식 재야 명망가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던 ‘자유주의 좌파’와 ‘자주파’의 연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들의 경력 속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관계는 87년 체제를 넘어 97년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체제의 관철을 뒷받침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둘째, 이른바 자주파가 새로운 ‘정치적 사안들’, 즉 환경 및 생태, 여성, 평화, 소수자 등의 문제를 자기 문제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추천된 비례대표 1번, 2번이 장애인, 비정규직 몫임을 환기시키며 이에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사상누각인데, 그 이유는 정치, 민주주의에 관한 그들의 발상이 그러한 영역의 사회관계들 자체에 진보정치와 민주주의의 핵심 의제와 주체들이 숨 쉬고 있다는 점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명, 평화, 이주노동자 등 소수자문제 등에 대해 그동안 이들이 보였던 좌충우돌의 행태는 단순한 실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들을 자기문제로 삼는 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발상의 대전환, 그에 따른 실천의 누적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가지 준거에서 볼 때, 이른바 ‘평등파’는 어떠한가. ‘평등파’ 또한 그 발상의 차원에서 보면 ‘자주파’의 그것과 다를지 모르지만,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평등파는 민주노동당 탈당 이전까지 자주파와 함께 공생하여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진보진영에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것을 방기해 왔기 때문이다. 아니 항상 ‘자주파’에게 책임을 돌리고 푸념만 하면서 거기에 일조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자주파’를 비판하기 위해 제기된 전국연합의 이른바 「9월테제」와 그것에 대한 비판들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필자 같은 말단의 연구자 또한 이미 수년 전 그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현실 정치에서 그것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평등파’의 쟁쟁한 이론가, 활동가들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동안 이들 양자가 민주노동당 안에서 ‘갈등적 상호의존관계’에 있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분당 이전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계급연합당’이라는 규정은 정치적으로 보면 이러한 ‘자주파’의 헤게모니가 이른바 ‘평등파’와의 권력분점을 매개로 재생산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주파와 평등파의 상호의존관계

    그런데 이 와중에서 진정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누구였는가. 지금 진보신당의 주도세력이 된 ‘평등파’가 틈만 나면 외치는 비정규직노동자, 소수자들 아니었던가. 비대칭적, 배제적, 억압적 사회관계들을 매개로 무차별 상품화되어 수탈당하는 환경 및 생태 아니었던가.

    사정이 이러하기에 한편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과정에서 ‘평등파’가 보이고 있는 결의에 찬 태도에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쓴 웃음을 유발하는 한 편의 소극(笑劇)’을 보는 것과 같은 불편한 느낌을 쉬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떻게 귀결되어질지는 모르지만, 진보정치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지고 있는 이 시점에 이른바 평등파가 자신의 역사에 대해 더 겸허하고 엄격한 평가를 수행하라는 요구가 적지 않은 것이다. ‘자주파’의 오류에 대한 비판, 그들과의 단절 요구가 이른바 ‘평등파’가 보인 역사적 행태에 자동적으로 면죄부를 안겨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면죄부’는 어디에서 오는가.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른바 ‘평등파’가 주도하여 진행하고 있는 ‘진보정치의 재구성’이 그에 상응하는 의미 있는 형식과 내용을 체현하면서 나아가고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자기반성과 성찰의 진정성을 현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잣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다가오는 4월 총선에 대응하기 위해 선거용 당을 만들고 선거 이후 ‘실질적 진보정당을 재창당하겠다’는 ‘2단계 창당’의 발상이 드러내 보이는 한계와 문제점 때문이다.

    필자는 이전에 <레디앙>, <참세상>에 기고한 ‘완고한 자주파와 단절하자’는 내용의 글에서 심상정, 노회찬의원 등 대중적 명망성과 영향력을 지닌 리더들의 참여를 설득하고 요구할 필요는 있지만, 새로운 진보정당을 구성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그들의 정치적 행보에 연연하지 말고 아래로부터 자신의 길을 갈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그 두 의원이 진보정치가 무엇인지 안다면, 탈당과 함께 새로운 정당건설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이 도래하였다는 사실과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인물이 아니라 ‘낡은 틀’을 ‘새로운 틀’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러한 맥락 위에서 필자는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이른바 ‘제도정치’ 외부의 ‘계급 좌파’와 ‘비계급 좌파’들이 이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 결합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사라진 신당파

    그것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이들 세력 또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그 결과가 흡족하지는 않을 지라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 최소한 서로의 이론적, 실천적 문제점을 다시 한번 공유하고 각자의 오류와 한계를 수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 민주노동당을 선도탈당한, 특히 젊고 활기찬 사람들이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과 새로운 진보신당운동그룹의 ‘진보정당다운 정당의 건설’이라는 언술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역동성은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의 파산을 계기로 심상정, 노회찬의원이 탈당을 선언하고 연대회의를 제안하면서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들 민주노동당 ‘혁신파’의 급부상과 함께 한편으로 신당창당을 선도했던 새로운 진보신당운동그룹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즉시 해산하여 연대회의 참여를 결정하였고, 다른 한편 정당 결성과정과 그 이후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그것을 확장시킬 보루로서의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의 열기 또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와 맞물려 4월총선 대응을 매개로 한 ‘2단계 창당론’이 속전속결로 수용되었고 지금 그것은 준비위원회 형태의 진보신당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렇다면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 이와 같은 상황변화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무엇보다 신당창당을 선도한 그룹이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화두에 올라탔지만, 그 내용과 형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심상정, 노회찬의원 등의 등장과 함께 그나마 진행되었던 초록당, 한국사회당과의 제한적 논의마저 실질적으로 중단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계급 혹은 비계급 좌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진지한 제안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반자본주의를 내세우고 생태, 평화, 연대 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고 역설하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황으로의 변화를 촉진한 것이, 아니 이와 같은 변화를 합리화시켜 준 것이 이른바 ‘2단계 창당론’이었다. 물론 이것을 떠받치고 있는 현실 논리는 4월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는 ‘총선참여론’이다.

    그런데 과연 총선에 참여하는 것과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다양한 논의와 실천을 조직하는 것이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만일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면, 결국 이것은 정치적으로 ‘진보정치의 재구성’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선거참여라는 현실에 의해 후미로 밀렸음을 의미한다.

    ‘실질적 재창당’이 가능할까?

    이러한 비판적 지적, 즉 ‘2단계 창당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4월 총선에서 살아남는 것이 문제인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관료적 발상이, 또한 그러한 문제제기를 제도정당으로서의 진보신당에 비판적인 세력들이 그 정치적 행보에 제동을 걸려 하는 시도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음은 이를 반증해주는 징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의 조성으로 인해 과연 총선 이후 ‘실질적 재창당’이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회의가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를 동반하면서 말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간단명료한데, 지금 공유하고 지향할 내용이 없는 ‘실질적 재창당론’은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각 정치세력에게 그 어떤 의미 있는 강제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스처는 상대적이지만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제도 안의 크고 작은 진보정치세력들이 각자의 생존을 위해 공학적으로 주판알을 퉁기는 것을 조장할 뿐이고 실제 그런 모습들이 이 순간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그나마 이번 4월 총선에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대응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진보신당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신당은 그 스스로의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2단계 창당론’을 채택하는 순간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기에 진보신당 이외에 여타 세력은 이번 총선에서 그 어떤 의무와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사회당과 초록당이 내부의 상이한 이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선거결과를 확인한 후 논의를 통해 이른바 ‘당 대(對)당’ 통합을 하자는 발상에, 혹은 선거 후 ‘제4지대에서의 통합’에 무게를 두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의 조성으로 인해, 애초 ‘진보정치의 재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였던 세력, 개인들조차도 주춤거릴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특히 4월 총선 전 진보신당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역설했던 일부 흐름들 또한 그 근거가 빈약해졌다. 따라서 이제 남게 된 것은 정치를 주관적인 결단과 규범의 차원으로 대치시키는 주의주의이다.

    그래서 다시 고민은 이어진다. 정말 진보신당이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대의에 사활을 거는 걸까, 아니면 민주노동당에서 ‘자주파’의 벽을 넘지 못했던 ‘평등파’가 무엇보다 자신들의 또 다른 정치적 활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결국 총선 전 진보신당에의 참여하는 것이 ‘진보의 재구성’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신당의 몸집불리기에 가세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진보의 재구성? 몸집 불리기?

    그렇다면 두 번째 단계의 ‘실질적 창당’은 단지 선거에서 표를 결집시키기 위한 수사는 아닌가. 갖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필자는 지금 이러한 고민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 양상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돌아보자는 것이다. 즉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중적 영향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동의하는 각 정치세력들이 크든 작든 책임과 의무를 분담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진보신당의 ‘2단계 창당론’은 선거에 대응한다는 명목 아래 결국 이 문제를 ‘실질적 창당’이라는 수사를 붙여 후미진 구석으로 밀어내어 버렸다. 과연 총선 후에 그러한 문제의식이 다시 전면에 부상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진보정치가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는 각 정치주체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의 논의와 소통, 연대를 통해서가 아니라 총선 결과가 말해줄 수 있는 사안이 되어버렸다.

    둘째, 만일 이러한 비판적 지적이 잘못되었다면 ‘실질적 창당’을 위해 어떤 의미 있는 내용적 변화의 모색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과연 무엇을 공유하면서 선거 후 실질적인 진보정당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진보신당은 평등, 생태, 평화, 연대의 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을 모색할 것이라고 다시 역설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진보신당 창당을 위한 원탁회의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에 대한 각 참여주체들의 이해는 차별적이고 상이하다. 원탁회의에 참여한 주체들이 상대적이지만 그래도 ‘평등파’와 소통되는 분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 총선 후 재창당 과정에서 초록당, 사회당과 그 가치들을 둘러싼 공감대의 형성이 어떻게 가능할 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것은 지난 운동의 역사적 경험이 각인시킨 다양한 흔적들, 상이한 인식 등을 감안할 때, 그리 쉽지 않은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창당발기인대회에서 ‘반자본주의’를 내세운 진보신당은 사회주의, 사민주의, 생태주의, 소수자들의 ‘차이의 정치’, 그리고 평화주의 등을 어떻게 접합시켜 진보의 재구성을 실현시킬 것인지에 대해 의미 있는 개요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이 각각의 가치들 안에 또 다른 상이한 결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한데도 말이다.

    이것은 각 정치세력들이 단지 위에서 열거한 진보신당의 네 가지 가치들을 수용하여 구호로 외치고 민생정치, 풀뿌리정치를 서로 호명한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금 진보신당이, 혹은 사회당, 초록당이 생각하는 ‘진보의 재구성’이 이런 차원이라면 이른바 총선 이후 재창당될 진보정당 또한 결국 기존의 민주노동당과 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당은 만들어질지라도 ‘실질적 재창당’이라는 그간의 수사에 상응하는 당은 보기 힘들 것이다.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진보정치의 재구성’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강조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 어려움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금 진보신당 안에서 그 장애들을 돌파하기 위해 아래로부터, 혹은 그와 연결되어 위로부터 진지한 논의들과 실천들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이다.

    또한 이를 촉진시키기 위해 어떤 이론적,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그에 근거하여 어떤 책임 있는 정치적 행보가 구체화되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보의 재구성’을 말하며 이른바 시민운동의 명망가들에게는 강한 호감의 눈길을 주면서 ‘계급좌파’와 ‘비계급좌파’에 대해 그 어떤 의미 있는 제안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좌파는 버리고 명망가에게 기우는 신당

    지금 이런 거시적인 문제는 총선을 앞두고 잡음을 낼 가능성이 크고 영양가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런가. 지금은 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 미시적인 정책들을 산출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기에 그런가. 혹은 ‘계급좌파’와 ‘비계급좌파’들이 애초 제도정당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기 때문에, 혹은 정당이라는 조직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제안조차 하지 않는 것인가. 그들의 대중적 영향력이 미약하기 때문에 그런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태도야말로 ‘진보의 재구성’을 방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기초도 모르는, 정치를 주관적 판단에 종속시키는 아마추어적인 행태일 뿐이다. 기우에서 말하지만, 미시적인 정책들이 총선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지금 얼마나 대중에게 소개되어 진보신당을 어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것은 정치를 정책에 환원시키는 행정적, 관료적 발상의 표현일 뿐이다. 지금 진보신당의 가장 강력한 선거운동은 당 안팎에서 역동적인 논쟁과 실천을 조직하여 그 고민의 흔적을 대중에게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살아 있는 진보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시키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정책의 대강도 그 과정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아니 말할 수 없었던 대중들이 ‘그래도 저 사람들이 대신 말해주고 있구나’, 혹은 ‘저기에 가면 내가 내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총선에 대한 단기간의 효과적 대응일뿐만 아니라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 지금 진보신당이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그런데 진보신당은 어떠한가. 혹시 이름 좀 있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로 이른바 ‘그림자 행정부’를 만들고 비례대표 명부를 구성한다고 하여 진보가 새로이 재구성되고 대중의 표가 굴비 엮이듯 엮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일반대중에게 진보신당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들 다수에게 진보신당은 아직도 ‘민주노동당의 후예들’로 인식될 뿐이다. 민주노동당을 역사적 유물로 낙인찍고 새로이 당을 만들었으면서도 4월 총선에서의 당선가능성을 저울질하며 민주노동당과 이심전심 출마자 공조에 들어간 진보신당의 ‘일그러진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렇다.

    국민들이 보기에는 ‘그냥 민주노동당’

    그렇다면 분당 이후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본 다수의 사람들에게 진보신당은 이른바 ‘진보정당다운 진보정당’인가. 아직까지는 이 질문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그 어떤 객관적 근거도 없다. 단지 말의 성찬과 그러길 바라는 ‘주관적인 희망’만이 존재할 뿐이다.

    냉정히 말하면 이것은 대선 이후 지금까지 이른바 ‘평등파’가, 그리고 진보신당이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그 어떤 의미 있는 이론적, 실천적 기여도 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른바 ‘평등파’가 그 동안 자신들이 보여 온 역사적 궤적에 대해 냉엄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에의 참여와 ‘진보의 재구성’을 분리시킨 ‘2단계 창당론’을 들고 나온 진보신당은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정당제도, 나아가 국가의 안과 밖에서(in and against) 서로 긴장, 갈등을 유지하면서도 연대할 수 있는 진보정치들의 다양한 공간을 확장시켜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의 재구성’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따라서 보다 냉철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실리를 위한 정치공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그것은 지금까지 걸어온 다양한 진보정치의 흔적들이 과연 어떤 사회관계들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는가를 다시 되묻고 그 오류와 한계를 교정하고 지양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시대에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미시적인, 또한 거시적인 차원에서 요구되어지는 것, 그 양자의 결합을 위해 어떤 이론적, 실천적 변화가 필요한 지 깊게 성찰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총선 이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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