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그놈 목소리
[밥하는 노동의 기록] 민주주의란
    2018년 09월 20일 11: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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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사람 분간을 하게 된 이후 열두 살이 될 때까지 나에게 대통령은 전두환, 그 한 사람이었다. 텔레비전 채널이 딱 네 개이던 시절, 채널 2번에서 AFKN이 나오고 EBS가 KBS3이던 시절, 9시가 가까워오면 ‘어린이들은 자야 할 시간’이라는 방송이 나오던 시절, 뉴스 앞에 시보를 치던 시절 그는 9시만 되면 등장했다.

그는 어딘가를 자꾸 다니고 뭔가를 계속 지시했다. 그의 말은 대부분 띄어쓰기를 해도 안 해도 되는 것들이었다. 정의사회구현, 국법질서확립, 국가사회안정, 미풍양속계승…그리고 좌익세력척결.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한자로 된 세상의 말을 익혔다. 그가 만난 사람은 나카소네 수상이 아니면 레이건 대통령이어서 나는 그가 대통령이 아닌 지 30년이 되도록 가끔 일본 ‘총리’라든가 레이건이 아닌 미 대통령의 이름이 낯설 때가 있다.

얼마 전 우연히 SNS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문안을 간 그의 영상을 보았다. 거의 10여전의 영상이다. 그는 말이 많았다. 내가 듣기엔 하등 쓸모없는 말에도 옆에 앉은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자는 아주 오랫동안 저런 대접을 받고 살아왔겠지, 저 자의 쓸모없는 말을 몇 글자의 한자어로 다듬어 매일 9시마다 뉴스를 통해 내보냈겠구나 하다 문득, 그의 목소리가 내 기억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실제 목소리는 내 기억만큼 걸걸하지 않았다. 톺아보니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목소리는 ‘나도 잘한 게 있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였고 그건 한 코메디언의 성대모사였다.

북조선 인민들은 아직도 통치자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없다 한다. 목소리마저도 성역인 것이 독재자의 우상화이니 이제야 정말로 알겠다. 내가 태어나 산 십여 년의 세상은 독재자의 것이었다. 그 세상은 독재자가 주인이었으며, 몇 년 전 병문안 자리에서 그의 횡설수설에도 계속 ‘아, 네, 그렇죠, 맞습니다’ 추임새를 넣었던 그들 중 대부분은 부역자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이를 깨달은 나는 그럼 무엇쯤 될까.

사람 목숨을 하도 잡아먹어 천 년, 만 년 살 것만 같았던 그가 치매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자가 민주주의를 지켰던 자들의 순진함 덕에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여 치매라는 질병을 얻었으니(치매에 걸렸다는 뉴스만 들었으니 진실은 모른다) 치매마저도 그에게는 축복이다. 나는 그가 고통 속에 돕는 이 하나 없이 길바닥에 나뒹굴며 죽기를 바랐다. 사지가 찢겨 죽기를 바랐다. 산 채로 땅에 묻히길 바랐다. 참으로 비겁하게도 하늘이 벼락을 내려 그를 죽이길 바랐다.

그 시절이 너무 길고도 어려워 그런가, 대통령이 막걸리를 마시고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은 정치인이라 추켜세우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어쩌면 그의 시대는 그가 죽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주술에 기대 그의 죽음을 바라는 나부터가 민주공화국의 인민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아직도 안전하게 살아있다.

그 놈 목소리를 들은 날의 저녁밥상. 배추김치, 브로콜리 무침, 가지 볶음, 보리밥, 미역국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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