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과 생명이 싸운 격전지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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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12일 02: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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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공간 수유 + 너머’는 ‘FTA 반대, 대추리에 평화를, 새만금에 생명을’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330여 km를 ‘걸으며 질문하기’를 한다. 5월 11일 전북 부안에서 시작해 5월 22일 서울에 이르는 열이틀의 기록을 <레디앙>이 매일 전한다. <편집자 주>

    1. 말뚝 망둥어, 백합, 고동, 갯지렁이 그리고 진흙, 서해바다, 매봉산…

    새만금 갯벌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운 곳이었다고 한다. 갯지렁이가 꾸물거리고, 하늘과 바다를 모두 볼 수 있는 큰 눈을 가진 말뚝 망둥어가 튀어 오르고, 짱뚱어들이 설쳐대고 농게가 어기적거리며 다니는 곳. 갯벌에 뽕뽕 뚫린 구멍마다 생명의 집이었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만나는 새만금엔 바다 조개의 80%가 와서 산란을 하곤 했다. 8,0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거대한 생명공동체, 그것이 새만금 갯벌이다. 백합은 백이면 백 모두 제각각 다른 모양을 갖고 있어서 이름이 백합이다. 인간에게도 똑같은 삶이 하나도 없듯이 백합도 그렇고 갯벌의 수많은 생명도 그렇다. 그러나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끝난 지금, 우리는 이 다채로운 삶들을 과거형으로만 기억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2. 조용하고 강한 싸움이 있다

       
     

    대장정 첫날. 우리는 새만금 갯벌을 맨발로 걸었다. 부드러운 진흙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발바닥에 느껴지는 고통은 육체적이었다. 진흙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굳어진 진흙엔 종류를 헤아릴 길 없는 생물들이 화석처럼 죽어서 박혀 있었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고동들은 물길을 따라 먼 길을 이동해 왔건만 물길을 따른 장사행렬이 되어 버렸다. 고동의 시체 주변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쓴 작고 둥근 소용돌이가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백합은 허연 속살을 쩍 드러내며 말라 버렸고 맛은 칼처럼 갯벌에 박혀 굳어 버렸다. 우리는 갯벌이 아니라 무덤 위를 걷고 있었다.

    주저앉아 귀를 대니 톡톡톡 톡톡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억 개의 생물이 내는 소리였다. 우리는 땅에 귀를 대고 한동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용하지만 수없이 다양한 생물이 내는 그 소리가 한번 들리기 시작하자 점점 커지고 나중엔 가슴에 가득 차 텅텅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갯벌이 ‘죽뻘’이 되어간다고 쉽게 말하지 말자.

    아직 갯벌은 죽지 않았고 갯벌이 생명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외침도 죽지 않았다. 단지, 개발의 속도만큼 포기도 빨랐던 우리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만물이 말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듣지 못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본과 생명이 싸우고 있었는데 우리는 보지 못했다. 화려한 것에 속고, 돈이 되는 것에만 반응하고, 글자만을 믿고,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3. 반면, 시끄러운 개발의 폭력이 있다

       
     

    아무리 걸어가도 새만금 방조제는 보이지 않았다. 새만금 갯벌은 너무나 커서 육안으로는 전체를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만금을 둘러보곤 최첨단 과학이다, 친환경 개발이다 떠들썩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 과학과 개발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 근원하는 것일까? 새만금 방조제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개발의 망령은 움직이고 있다. 갯벌을 한번도 진정으로 걸어보지 않은 자가, 어민들의 생활엔 한번도 귀 기울여 보지 않은 자가, 간척사업계획을 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새만금 갯벌은 숫자와 통계와 지식으로는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 새만금 갯벌에 가서 서 보라. 발바닥 하나 만큼의 규모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이 산다. 새만금 갯벌은 풍성한 심연을 가지고 있다. 결코 지도로는 표시할 수 없는. 새만금 갯벌은 숫자화된 역사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 풍부한 삶의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바다와 함께 살아온 갯사람들의 삶처럼.

    그러나 자본의 욕망은 생물과 어민들의 삶을 빨아먹으며 유지된다. 전라도에서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선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새만금 사업을 얼마나 총천연색 미래로 포장하는가에 따라 당락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부안버스터미널에는 5.31선거 포스터가 붙어있다. 새만금을 관광단지로 만들겠다는 선전문구가 화려하다. 이처럼 개발자본은 관광단지를 조성하겠다느니 자기 부상열차를 만들겠다느니 하는 거짓 선전으로 어민들의 욕망을 자극해 유지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새만금 간척 사업은 정치논리에 의해 공사를 중단할 수 없게 되었을 뿐, 단순히 경제적으로 생각해 볼 때도 이득이 없다. 농업용지 사용하는 것은 농지가 놀고 있는 현 농촌 상황에서 경제성이 없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농업용지가 되려면 20-30년이 필요하다. 공업용지도 마찬가지이다.

    개발자본은 만물이 만물과 싸우도록 만든다. 주변의 산을 깎아 새만금 갯벌을 막는 짓을 하고 있다. 산이 갯벌을 죽게 하고, 만물이 만물을 죽게 하고,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와 싸우게 하는 방식. 그래서 삶을 통째로 파괴하는 방식. 그 자본의 폭력을 오늘 새만금에서 봤고 5월 4일 대추리에서 봤고, 매일의 FTA 논의에서 본다.

    그러나 오늘 걸으면서 느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우는 것은 자본만이 아님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새만금의 갯생물이, 대추리의 벌판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생명의 행동은 자본의 폭력과 다르다는 것을.

    그것은 아스팔트길의 딱딱함과 흙길의 부드러움의 차이이고, 동그랗게 자라는 생명들과 직선으로 뻗은 도로의 차이이다. 부드럽고 둥글고 다양한 생명의 논리가 조용하지만 훨씬 강하다. 인간들에게 살점이 뜯긴 산과 죽어가는 갯벌을 품기 위해 투쟁중인 바다처럼.

    4. 예민한 귀와 똑똑히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 걷는다

    새만금의 생물이 죽은 곳, 그리고 삼보일배가 시작된 곳에서 우리의 질문이 시작됐다. 행진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 아침, 장승들이 우리의 대오가 되어 주었고, 조개와 갯벌이 우리의 신발이 되어 주었다. 하늘과 바람이 우리의 목소리였고 우리의 머리였다. 버려진 생명을 하늘로 올려 땅이 하늘임을 하늘이 땅임을 보여주는 솟대도 함께였다.

       
     

    그곳에서 3배를 올렸다. 우리들이 잊고 있었던 생명들에게 사죄의 의미로 일배, 반생명적 가치를 내쫓기 위해 일배, 모든 생명적 가치와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담아 일배. 그리고 우리의 몸이 시작되는 새만금 갯벌에서 맨발로 108배를 올렸다.

    인간들이 죽음을 명령한 곳에서 우리의 질문을 시작하겠다고. 이미 죽은 듯이 보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할 힘을 발견하겠다고. 고통 받는 소수자들을 통해서 고통이 아닌 생명의 지혜를 배우겠다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진 세상이다. 허무맹랑한 사기극과 심리전이 판을 쳐 똑똑히 보고 똑똑히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삶을 지키고 창조하기 위해 싸우던 사람들도 지쳐, 누군가 죽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재앙이 일어나야 새만금이 살 거라고 탄식처럼 말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걷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서 걷는다. 우리는 인간을 혹은 나를 막는 것이 아니라, 생명전체를 막는 것을 또렷이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 걷는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것들과 함께인지 들을 예민한 귀를 갖기 위해서 걷는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다른 존재와 하나라고 느끼는 것은 갯벌 저 깊은 심연보다 얼마나 가슴 아픈 어둠인가, 그러나 동시에 지금이라도 우리가 새만금임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희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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