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둑치기의 묘한 매력
[낭만파 농부] 가을걷이 준비 노동
    2018년 09월 18일 02:40 오후

Print Friendly

아직도 나는 이 선선한 바람이 믿기지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걸 태우고 말려 죽일 것 같던 무더위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 계절의 변화 앞에 장사 없다고들 하지만, 그 계절마저 바뀔지 모른다는 가설 앞에 주눅이 든다. 하여 오래도록 올 여름의 무더위를 잊지 않으려 한다. 올 겨울엔 사상초유의 한파가 몰려올 거라는 예측이 나돌고 있지만.

어쨌거나 철은 바뀌었고, 한 달 남짓 찜통더위에 짓눌려 울안에만 갇혀 있던 농부의 몸놀림도 되살아났다. 그냥 움직이는 정도를 넘어 그 한 달의 ‘무노동’만큼 일거리가 쌓이고, 작업도 어려워졌다. 생각도 못한 큰 키 풀이 논배미를 점령하는 바람에 열흘 가까이 안 해도 될 고생을 한 게 그렇다.

벼이삭은 하루가 다르게 여물어 누런빛을 띠어가고, 갈수록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가을걷이 준비를 하라는 신호다.

무엇보다 콤바인(수확기)이 잘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일. 먼저 콤바인 바퀴가 빠지지 않게 논바닥을 말려야 한다. 물이 잘 빠지는 논이야 문제될 게 없지만 수렁논이나 물빠짐이 나쁜 논은 미리 서둘러야 한다.

먼저 도랑치기. 논배미 옆으로 흐르는 도랑에 쌓인 흙과 풀뿌리를 퍼 올려 물길을 내는 일이다. 준설작업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달랑 삽 한 자루, 때로는 쇠스랑 한 자루로 해내는 일이다. 온 몸의 큰 근육을 다 써야 하므로 작업이 녹록치가 않다. 이어 도구치기. 물이 많이 고이거나 물 흐름을 돌리고자 할 때 벼포기를 뽑아내 논배미 안에 새로 물길을 내는 거다. 일종의 인공수로라 할 수 있다. 가을장마만 오지 않는다면 이 정도로 논바닥 걱정은 놔도 된다.

다음으로 논둑치기. 한 해에 적어도 세 번은 깎아줘야 하는데 추수철엔 콤바인 작업에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올해는 폭염 탓에 한 번을 건너뛰었더니 수풀이 무척 크고 억세게 자랐다. 작업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잘 알다시피 논둑치는 작업에는 예초기를 쓴다. 물론 ‘탈석유’ 차원에서 낫을 쓰기도 하지만 경작면적이 넓지 않은 경우다. 낫질로는 그 억센 풀이 감당이 안 돼 어쩔 수 없이 예초기를 쓰는 것이다. 그만큼 예초기는 부담스런 물건이다.

흔히 휘발유 엔진으로 작동하는데 그 굉음이 엄청나다. 전기나 부탄가스로 돌아가는 엔진도 있지만 논둑을 치기엔 힘이 약해 효율이 떨어진다. 세차게 돌아가는 강철 칼날. 근력이 약한 이는 다루기조차 힘들다. 무엇보다 몹시 위험하다. 반드시 보호장구를 갖춰 써야 한다. 보안경과 안면보호대는 필수다. 무릅-정강이보호대도 해주는 게 좋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막기 위해서다.

무섭기도 하지만 버겁기도 하다. 강한 회전력에서 나오는 반동과 진동은 근육에 적잖은 부담이다. 벼농사에 뛰어들고 처음으로 예초기를 돌리던 날이 떠오른다. 윙윙 돌아가는 칼날이 무섭고, 혹여 돌멩이를 치지는 않을까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무거운 작업봉을 움직이자니 기껏 10분 작업하고, 30분 동안 쉬기를 거듭하면서도 2시간을 버티지 못했던 기억.

그런데 버겁기는 해도 한편으론 묘한 매력이 있다. 언젠가 얘기했던 ‘김매기의 황홀경’에는 못 미지치만 그 이치는 다르지 않다.

김매기와 마찬가지로 일단은 작업에 익숙해져야 한다. 굉음이 귀에 거슬리고, 기계동작에 신경이 쓰여 잔뜩 긴장한 상태로는 삼매경에 빠질 수가 없다. 팔로는 능숙하게 작업봉을 놀리고, 눈으로는 위험요소를 살피면서도 ‘딴 생각’을 할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내 경험으로 적어도 5년 넘게 기계와 작업동작에 익숙해져야 할 수 있다.

마치 이발을 해나가듯, 억센 풀줄기를 사각사각 베어낼 때의 그 쾌감을 짐작할 수 있으려나. 뒤엉키고, 흐트러진 마음의 실타래를 싹둑 잘라내는 시원함이 있다. 베어지는 풀포기는 또한 마음 속 응어리요, 걱정거리다. 게 중에는 삿된 생각도, 어리석은 집착도 있다. 번뇌와 망상, 모진 인연까지도 끊어내는 것이다.

무엇을 구상하고, 설계하는 사유는 어렵지만 내려놓고, 비우는 데는 안성맞춤인 듯하다. 그래서 김매기를 마치고 나면 머리가 묵직한 반면 논둑을 치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버겁고 위험한 물건이 건네주는 뜻밖의 선물이라고 할까.

올 가을 논둑치기는 이렇듯 무심결에 버거운 노동을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농사가 육체노동이 아니라 정신노동인 것만 같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