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자허'촌과 시진핑
[중국과 중국인] 절대권력의 구태
    2018년 09월 17일 12:2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중국혁명의 성지(圣地) 옌안(延安)시 산하의 인구 12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 14억 중국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 샨시성 옌안시 옌촨현 원안이진(陕西省延安市延川县文安驿镇)의 ‘량자허'(梁家河)촌이 바로 그곳이다.

인구 1200명도 안 되는 이 작은 마을이 전 중국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마오쩌뚱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과의 인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시기, 부총리이던 아버지 시종쉰(习仲勋)이 반당(反党)분자로 몰려 고초를 겪게 되고, 16살의 어린 시진핑 역시 다른 보통 중국청년들처럼 농촌에 하방을 당해 이전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농민들의 삶을 체험하게 되는데, 량쟈허촌이 바로 그곳이다.

2015년 2월, 부인 펑리유엔(彭丽媛)과 이곳을 찾은 시진핑은 이곳에서 보낸 7년 동안의 삶을 회상하면서, “내 인생의 첫 시기에 배운 모든 것을 가르쳐 준 곳이 바로 량자허다. 작은 마을이라고 얕보지 마라. 이곳에는 커다란 가르침이 있다. 내가 15살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방황하고 혼란스러웠지만, 이곳을 떠날 때는 내 인생의 확고한 목표를 세웠고 자신감으로 가득했다”고 말했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15년 하방생활한 량자허촌을 찾은 시진핑(사진=중국망)

1993년, 시진핑은 정계에 진출한 이후 처음으로 량자허를 방문했으며, 2004년에는 저쟝성(浙江省) 서기 신분으로 옌안티비 방송국과의 인터뷰를 통해 량자허에서 지낸 7년 생활을 회고했지만 당시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2015년 2월의 방문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의 신분이 당의 총서기였기 때문이다. 당의 선전부 계통에서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량자허촌의 상급 기관인 지방정부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진핑의 이름과 정책이 당의 강령에 명문화되면서 그 열기는 최고점에 도달하게 된다.

‘량자허’와 관련한 책들이 서점의 맨 앞줄에 배치되고, 동영상과 소설이 제작되었으며, 샨시런민(陕西人民)출판사가 제작한 르포문학집 “량자허”는 150만부 이상이 출판되었다. 2016년에는 45부작 티비 드라마가 제작되었고, 2017년 중앙티비방송국은 12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샨시성의 학술단체들은 앞을 다퉈 ‘량쟈허’를 주제로 한 연구과제물을 공고했으며, 각급 대학에서도 시진핑 사상에 대한 연구 열기가 고조되었는데, 예를 들면, 2017년 샨시사범대학(陕西师大)이 출판한 “시진핑의 7년 지식청년 세월”(习近平的七年知青岁月)은 몇몇 대학에서 ‘독서지도’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한 지역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동북의 지린성 창춘시(吉林省长春市)에는 시진핑어록(语录)으로 채워진 지하철이 등장했다. ‘신시대'(新时代)호로 불리는 붉은색의 도시 지하철 1호선 열차의 내부는 시진핑 사상 및 이와 관련 문구들로 가득 채워졌고, 열차가 출발하면 “열차에 탑승한 해설원들이 승객들에게 19차 당대회의 중심사상과 시진핑 사상을 설명해 준다”고 보도했다.

특히 2018년 3월 초에 개최된 양회(兩会)를 전후로 인민일보(人民日報)를 비롯한 당의 선전매체들은 마오쩌뚱에게나 붙였던 ‘위대한 영수’, ‘인민의 영수’, ‘국가의 조타수’ 등의 수식어를 시진핑에게 붙이기 시작했다.

이런 보도를 접하면서 문화대혁명 시기 천안문광장을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중국 인민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오쩌뚱의 어록이 실린 붉은 색의 작은 책자(일명 红宝书)를 흔드는 모습이 떠올랐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뜨겁게 타오르던 시진핑 찬양 열기는 의외의 사건으로 빠르게 식어갔다. 수십만 개의 불량 백신이 영유아에게 접종된 사건, 퇴역 군인들이 대우에 불만을 품고 지방정부(江苏省镇江市) 청사를 방문해 항의하다 충돌한 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한 가운데 불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7월 4일 중국경제의 심장인 샹하이에서 한 여성이 거리에 세워진 홍보물에 그려진 시진핑 얼굴에 먹물을 뿌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며칠 후인 7월 9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최고지도자의 동정과 사진을 게재하던 인민일보 1면에서 시진핑의 모습이 사라졌다. 단 하루였지만 이것을 신호로 뜨거웠던 량쟈허 관련 보도와 시진핑에 대한 직접적인 찬양 열기가 빠르게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당 위원회와 경찰들이 직접 나서 건물 내-외부에 걸린 시진핑의 초상화를 철거하도록 요구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조금 장황하게 시진핑이 젊은 시절 하방 당해 살았던 량자허촌을 둘러싸고 발생한 촌극(寸劇)을 설명한 이유는 이런 촌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현재 중국정치가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바다를 다스린다.”(九龙治水) 정치국 상무위원 9명이 각자 독자적 권한을 행사함으로서 국가권력의 행사가 통일적으로 집행되지 못하면서 행정의 혼란을 초래한다는 뜻이다. 후진타오 집권 2기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이런 현상을 직접 체험한 시진핑은 집권 후 강력한 반부패 투쟁을 지렛대 삼아 경쟁자들의 권한을 축소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들마저 총서기에게 매년 업무보고를 하도록 제도화하는데 성공하면서 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마오쩌뚱에 버금가는 권력을 쟁취하고 또 떵샤오핑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자신의 이름을 당의 강령에 명문화했다.

그러나 시진핑의 절대권력은 그가 장악한 절대적인 힘만큼 시진핑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도 크게 높였다. 정상적인 당의 운영체계였더라면 ‘량쟈허’ 사건은 부풀려지기 전에 충분히 조절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절대권력에 절대 복종하는 심복들이 당의 핵심 조직을 장악하면서 당 조직의 실제 상황 판단 및 대처 능력은 극도로 제한받게 되었고, 오로지 최고 지도자의 심기 파악과 맹목적인 충성에만 열중하는 상황으로 변질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시진핑에 커다란 부담이 되고 말았다.

‘량쟈허’를 둘러싼 당의 공식 선전기구 및 매체들의 호들갑과 이에 재빠르게 영합한 지방정부 및 관련 기관들의 행태, 그리고 이런 상황에 입을 닫고 바라만 보고 있는 지식인들의 모습은 마오쩌뚱 시대의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나타난 구태(舊態)의 반복일 뿐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경제는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성장했지만 이를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어 중화민족의 꿈을 완성시켜야 하는 임무를 띤 주체로서의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방향을 찾지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필자소개
중국의 현대정치를 전공한 연구자. 한국 진보정당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