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아Q', 노빠들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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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12일 09: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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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빠의 기본적인 정서를 이렇게 살펴보면, 노신의 「아Q정전」을 파악하기는 한결 용이해진다. “우리 시대의 아Q”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빠와 아Q는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일견 비참하고 우습게만 제시되는 아Q의 의식과 행동이 나름의 설득력을 확보하고 생동감을 형성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Q정전」에서 노신은 “나는 아Q의 성명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른다.”라고 명시하였다. 이름을 찾기 위한 노력을 백방으로 쏟았지만, 어떻게 해도 ‘Q’의 정확한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Q는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채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도 스스로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Q의 ‘아(阿)’자 한 자만은 매우 정확하다는 점이다. 억지로 주워 붙였다거나 빌려 쓴 것과 같은 약점이 전혀 없으므로 고금 역사에 통달한 학자들 앞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다.”

아Q의 ‘아(阿)’자처럼 노빠의 ‘노(盧)’자 한 자만은 매우 정확하다. 그렇지만, 아Q의 ‘Q’가 불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빠’는 하나의 경향을 가리킬 뿐 정확한 이름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빠’는 주체의 자리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내어주면서 비로소 차지하게 되는 이름인 까닭이다.

   
 
▲2002년 12월 19일 밤 광화문앞에 모인 노사모 회원들이 노무현 후보 당선확정이 발표되자 함성을 지르고 있다. ⓒ연합뉴스
 

앞에서 열거했던 노빠의 특징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나는 이렇게 판단했으니까 대통령을 지지한다.”의 방식으로 사건을 이해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결정했으니까 이해한다.”라는 상황 판단이 그들의 사고 구조이다. 이라크 파병과 같은 결정을 내렸어도 노무현 대통령이 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인식은 그래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민간인에게 군 형법을 적용하여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동조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작품의 말미에는 혁명에 연관되었다는 혐의로 인해 아Q가 ‘옷자락이 긴 사내’ 앞에 서게 되는 장면이 제시되어 있다. 노신이 강연에서 언급했던 ‘장포(長袍)로 갈아입은 인물들’을 떠올린다면 ‘옷자락이 긴 사내’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가늠하게 된다. 바로 혁명의 깃발을 들고 나섰던, 지금은 입으로만 혁명을 떠들어대는 세력의 상징인 것이다.

옷자락이 긴 사내가 아Q에게 멸시하듯 말한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아Q는 그 앞에 꿇어앉은 모양새다.

“노예근성을 타고난 놈 같으니…….”
과거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여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노무현 대통령과 대척점에 서서 바로 그 사람들이 다시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렇게 모여드는 사람들을 노무현 정권이 탄압하는 상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추리에 다녀간다는 이유로 귀가하던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 연행을 당하지 않았는가.

아Q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더 이상 ‘정신승리법’이 통용되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정신승리법’이란 것은 결함을 은폐하고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아Q의 대응 방식을 가리킨다.

“예컨대 이마에 가득 부스럼 자국이 있으면서도 ‘부스럼[癩]’이란 말을 꺼리고 심지어 이 글자와 음이 같은 ‘뢰(賴)’ 자를 전부 생략하여 말하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머리가 빠진 것을 가리기 위해 대머리를 상징하는 ‘광(光)’ 자와 ‘량(亮)’ 자, 심지어 ‘등(燈)’, ‘촉(燭)’ 같은 글자도 전부 피했다.

또한 남에게 얻어맞고서도 ‘아이가 어른을 때린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자기기만의 태도로 실존을 대하다 보니 문제의 본질로 들어갈 수 없었고 영원히 문제의 외피에서 맴돌면서 일종의 가상공간에서 생활했다. 희극적 태도로 비극을 연출한 것이었다.”(〈노신 평전〉)

   
 
프란시스코 고야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 제42번 ‘너는 어쩔 수 없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마치 저희만 나서서 이룩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정치인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고 하여 세상이 바뀌었다고 전제하는 것도 심각한 오류이다. 거대한 적을 세워두고 자신들의 잘못과 무능을 합리화하고 오히려 자찬하는 태도 또한 아Q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하다.

노빠의 ‘정신승리법’이 유지되는 한 대통령의 지지율은 올라가기 힘들 것이다. ‘정신승리법’으로 만들어지던 아Q의 환상 세계가 실세계와 단절되었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이다. 성찰 없는 자기 정당화가 현실과 쉽게 공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가 조금이라도 상승한다면 과연 누가 박수치고 있는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강남의 땅 부자들이 보내는 갈채가 아닌지,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극우보수 세력의 지원이 아닌지, 미국만 쳐다보는 노란 가면을 쓴 하얀 영혼의 환호가 아닌지, 비정규직 양산에 만세 부르는 이들의 찬가가 아닌지.

아마 그 정도만 된다면 노빠들은 노무현 대통령 앞에 무릎 꿇은 자신의 꿈을, 열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그러한 자각은 빠를수록 좋다.

노신은 아Q의 이름 추적이 실패하고 나서 이런 말을 남겨 두었다.
“나는 그저 ‘역사 연구와 고증에 기호가 있는’ 호적(胡適) 선생의 제자들이 새로운 단서를 많이 찾아낼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내 이 「아Q정전」이 그 때에 가면 없어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다.”

아Q가 제 이름을 찾는 날 「아Q정전」의 존재 의미가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마찬가지다. ‘노빠’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버린 이들은 제 이름을 찾아 나설 필요가 있다. 내가 쓰는 이런 글이 무용해지기를 바라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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