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예제도가 사라졌다고?
    [그림책] 『인어 소녀』(도나 조 나폴리. 데이비드 위즈너/ 보물창고)
        2018년 09월 14일 12: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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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여름

    친구를 따라 처음 만화가게에 갔습니다. 재미의 신세계가 열렸습니다. 정신없이 만화를 보다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보고 자랑했습니다.

    “아버지! 나 오늘 만화가게 갔다!”

    순간 아버지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앞으로 다시는 만화가게 가지 마라. 한번만 더 가면 아주 혼날 줄 알아.”

    너무 뜻밖의 반응이라 이유도 묻지 못했습니다. 그냥 만화라는 게 아주 부정한 물건이고 그 부정한 물건을 보는 건 아주 부도덕한 일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에는 일 년에 한 번씩 만화를 불사르는 행사를 정부에서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만화는 불건전하고 저속한 문화의 상징이었습니다. 만화가와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 모두를 저질 취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2018년 여름

    데이비드 위즈너의 그래픽 노블 『인어 소녀』가 한국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래픽 노블은 소설과 만화와 그림책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는 새로운 시각예술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설에 더 가깝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림책에 더 가깝다고도 합니다. 중요한 건 많은 나라에서 그래픽 노블이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데이비드 위즈너는 『구름공항』, 『시간상자』 등 아주 환상적인, 글 없는 그림책으로 독보적인 지명도를 쌓은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첫 번째 그래픽 노블을 내어 놓았습니다. 저는 그래픽 노블에 도전한 데이비드 위즈너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데뷔는 아주 성공적입니다. 『인어 소녀』라는 아주 괜찮은 원작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인어 소녀

    오늘날의 미국 어딘가, 인어소녀를 볼 수 있는 아쿠아리움 오션 원더스가 있습니다. 보통 아쿠아리움에는 인어 옷을 입은 가짜 인어가 출현합니다. 하지만 오션 원더스에는 진짜 인어가 있습니다. 오션 원더스의 주인이자 바다의 왕인 넵튠이 직접 데려온 진짜 인어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다의 왕 넵튠은 인어소녀에게 절대로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일까요?

    사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들은 넵튠의 정체를 아주 잘 알게 됩니다. 오직 인어소녀만이 넵튠의 진짜 정체를 모릅니다. 하지만 아주 우연히 그리고 아주 다행히 인어소녀는 운명처럼 리비아라는 인간소녀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넵튠의 정체에 한발씩 다가가게 됩니다.

    이제 인어소녀는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아쿠아리움 오션 원더스에 갇힌 인어소녀와 바다생물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재주는 인어가 부리고 돈은 넵튠이 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번다는 말이 있습니다. 곰과 사람이 가족이고 서커스가 가족을 위한 사업이었다면 이런 말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말은 곰이 노예고 사람이 주인이기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인어소녀는 자신이 노예고 넵튠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노예의 주인인 넵튠은 결코 진실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어를 포함한 많은 바다 생물들이 오션 원더스라는 아쿠아리움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넵튠은 자신이 바다의 왕이며 바다생물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어소녀와 바다 생물들은 자기도 모르게 재주를 부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입장료를 내고 동전을 던집니다. 그러면 자신을 바다의 왕이라 부르는, 자본가 넵튠이 돈을 법니다. 그곳이 바로 오션 원더스라는 이름의 아쿠아리움입니다.

    노예제도가 사라졌다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의 노예, 자본가의 노예, 권력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노예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재의 노예주들도 여전히 신처럼 군림하고 회유하고 협박합니다. 다만 무서운 사실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누구나 노예가 될 수도 있고 노예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디 동물원의 동물들을 풀어주십시오. 제발 아쿠아리움의 바다 생물들을 바다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풀어주십시오. 노예도 되지 말고 노예의 주인도 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되어 주십시오!

    만화와 그림책과 그래픽 노블의 시대

    어쩌면 아버지가 만화를 금지한 덕분에 저는 그림책을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만화를 금지하지 않았다면 분명 저는 만화와 먼저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무리 금지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만화와 그림책과 그래픽 노블 모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저뿐이 아닙니다. 세상은 이미 만화와 그림책과 그래픽 노블의 시대입니다.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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