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문환과 지경식, 지씨 집안 아작내다
    [역사의 한 페이지] 대동법과 연좌제 그리고 조세저항
        2018년 09월 14일 11: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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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가나이 이주로’를 위한 붉은 송별시>

    이번 이야기는 퀴즈로 시작한다. 영화 [광해]의 한 대목이다. 괄호 부분 A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 내전에서

    광해군: (궁녀 사월이에게) 사월아!… 열다섯이라 했더냐?

    사월이: 예. 그러하옵니다. 전하!

    광해군: 쯧쯧…그래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누? 그냥 물어보는 것이니 기탄없이 대답해보거라.

    사월이: 예. 전하. 소인의 아버지는 산골 소작농이었사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관아에서 세금으로 ( A )를 바치라 하여..

    광해군: (놀라며) 농사꾼에게 ( A )라니…그래서?

    사월이: 고리를 빌려 세금을 메우다보니.. 빚이 빚을 낳게 하고..결국 집과 전답마저 빼앗기고 아버지까지 옥살이를 하게 되었나이다.

    광해군: 어허 저런..

    사월이: 그것으로도 갈음이 되지 않자 어머니와 동생은 변방 노비로 팔리고, 저는 참판댁집 몸종으로…

    광해군: 이런 나쁜 놈들!

    사월이: 혼자 남은 아버지는 결국 맞은 장이 화근이 되어 해를 넘기시지 못하고 결국…

    광해군: (화를 내면서) 에잇! 이런 X같은…

    보기 : ① 전복 ② 멧돼지 ③ 벌꿀 ④ 미역

    영화 [광해]의 이 장면은 정부가 생산도 되지 않는 공물(貢物;특산물)을 할당함으로써 농민이 겪게 되는 어려움과 몰락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낼 수 없는 공물이 할당된 경우에는 보통 한양의 부유한 상인들이 중간 브로커로 대신 공물을 호조에 납부해주고 그 대납의 수수료를 농민들에게 요구하는데, 문제는 당시에 ‘인정(人情)’이라고 불렸던 이 수수료가 지나치게 비쌌다는 점이었다. 이를 보통 대납의 폐단, 또는 방납의 폐단이라고 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시한 것이 대동법이었다.

    [사진] 영화 [광해]의 한 장면. 광해군(이병헌분)이 궁녀 사월이(심은경 분)에게서 공납제도의 폐단과 사월이 집안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대동법은 공물 징수 과정에서 발생한 방납(防納)의 폐단을 시정하고, 임진왜란 이후 부족한 국가 재정을 타개하기 위해 광해군 때 처음 실시한 것이다. 이전에는 공물은 호구(戶口)마다 현물 징수하던 것이었는데, 대동법 시행으로 특산물 대신 농민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쌀로 1결당 12말을 걷는 것으로 바뀌었다. 단 쌀을 구하기 힘든 지역은 쌀 12말에 해당되는 옷감이나 돈으로 내게 하였다.

    이전 호구별로 낼 때는 민호(民戶) 중심으로 공물이 할당되어 사실상 세금을 내지 않았던 양반들은 대동법으로 과세 기준이 토지 결수로 바뀜에 따라 대동세를 낼 수밖에 없었는 데다가 그 세액도 만만치 않아 거세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한 1608년에서부터 그 시행범위를 조금씩 확대하여 전국적으로 시행된 시기는 숙종 때인 1708년으로 정확히 100년이 걸렸다. 양반들의 조세 저항은 그렇게 집요한 것이었다. 반면 땅이 적거나 없는 일반 평민들은 부담이 크게 줄어들어 이 법을 환영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기록에는 “백성들은 밭에서 춤추고 개들도 아전을 향해 짖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재산 정도에 따라 세금을 매긴 대동법은 조세 정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여러 세제 중 가장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문환 지경식 소포 대동전 분족기 (池汶煥 池敬植 所逋 大同錢 分族記)

    이렇게 서문에서 대동법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대략 10년 쯤 수집한 한 장의 문서를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이 문서는 대동법과 관련된 문서로 가로 112cm, 세로 17cm의 긴 형태로 되어 있다. 문서 앞에 적힌 제목이 ‘壬午三月 下吏 池汶煥 池敬植 所逋 大同錢 分族記(임오3월 하리 지문환, 지경식 소포 대동전 분족기)’였는데, 이 문서를 수집한 이유는 ‘대동전’이라는 용어 하나 때문이었다.

    대동전이라는 용어와 지씨(池氏) 성씨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적혀있어 대동법으로 할당받은 대동전을 기록한 장부 정도로 파악했다. 지씨들이 많은 것은 세금을 할당받은 그 곳이 지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일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그런데 최근 문서들을 정리하면서 이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니 단순한 대동전 징수 명부가 아니었다. 문서 제목 ‘壬午三月 下吏 池汶煥 池敬植 所逋 大同錢 分族記’에 쓰인 ‘所逋(소포)’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전 대동전에 가려 잘 보지 못했던 단어였다.

    [사진] ‘지문환 지경식 소포 대동전 분족기’이다. 저 상단 오른쪽의 30cm 자를 통해 그 길이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조선후기, 가로 112cm, 세로 17cm, 한지에 묵서, 박건호 소장)

    소포(所逋)? 그리고 그 옆에 쓰인 분족(分族)?

    그렇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이 ‘소포’라는 단어는 이 문서의 내용을 규명하는 결정적 단어였던 것이다. 소포의 뜻은 ‘관청의 물건이나 공금 따위를 횡령하거나 소비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문서는 단순히 어느 마을에 매겨진 세금 장부가 아닌 것이다. 왜 세금을 내는 사람의 성씨가 대부분 지씨(池氏)일까 하는 의문도 저절로 풀렸다. 그럼 이 문서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지문환과 지경식의 직책으로 쓰여져 있는 ‘하리(下吏)’는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 관아에 속하여 행정 실무를 맡아보는 하급 관리를 뜻하는데 향리 정도로 보면 되겠다. 여기에 나오는 지문환, 지경식이라는 인물은 지역 미상의 어느 지방 관아에 근무하는 향리들로 성씨로 보아 친척으로 보인다.

    그들이 소포(所逋)의 주인공들이다. 즉 그들은 대동법으로 걷은 돈인 대동전을 횡령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액수는 367량 2전이다. 이들이 대동전을 손 댈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 중 적어도 한 명은 향리 중 창리(倉吏)였을 것이다. 창리는 관아의 곡식 창고 등을 지키던 향리였다는데 창리들이 곳간 창고의 재산을 손대기가 제일 용이했을 것이므로 지문환, 지경식이 대동전을 370량 가까이 손 댈 정도였으면 두 명 중 한 명은 창리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리하자면 사건의 요지는 조선 후기 임오년 어느 고을에서 친척 관계에 있는 향리 지문환과 지경식이 창고나 돈궤짝에 보관되어 있던 대동전 367량 2전을 횡령한 것이다. 이 돈의 규모는 오늘날로 환산하기는 쉽지 않으나 이 당시 매매된 노비 가격은 이정수·김희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성인 노(奴) 한 명의 평균 가격은 1710∼50년에 12.20량, 1750∼90년에 9.42량, 1790∼1820년에 7.34량, 1820∼60년에 10.11량, 1860∼94년에 12.50량으로 평균 10량으로 본다면 대략 노비 30∼40명을 살 수 있는 액수로 환산해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노비 한 명 가격이 허름한 집 한 채 값 정도라는 말이 있으니 대략 30∼40채의 집값 정도로 환산해보자. 오늘날 전국 아파트 평균 가격은 작년 2016년도 통계기준으로 평당 1천만원을 돌파했다고 하니 20평대∼30평대 기준으로 보자면 2∼3억 정도가 된다. 허름한 집 한 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해 집값을 1억 정도로 낮추어 잡더라도 30∼40채 정도면 오늘날 돈으로 대략 30∼40억원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건 매우 거칠게 추정해 본 것이니 전문가들의 질정을 바란다.

    어쨌든 오늘 날 돈으로 대략 몇 십억 원 정도의 돈이 횡령된 사실을 알게 된 관할 수령은 이들을 처벌하고, 그들이 횡령해 탕진한 돈을 벌충할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 결과 찾은 방법은 ‘족징’이었다. 지씨들이 한 소행이므로 지씨 집안의 친척들에게 이 돈을 적절히 분배해서 돈을 내라는 것이다. 위 문서의 제목이 ‘분족기(分族記)’인 이유이다. ‘친족들에게 나누어 할당한 기록’이란 뜻이고, 교과서에 나오는 용어로 이를 바꾸면 일종의 ‘족징’인 것이다.

    연좌제의 전통

    이것은 일종의 연좌제로 요즘의 우리 법 질서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지 친족 전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개인들을 법률 적용의 독립된 주체로 인식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이가 잘못을 하면 주변 가족이나 친족, 심지어는 같은 이웃에게도 그 책임을 물었다. 특히 큰 범죄의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잠시 조선의 연좌제를 법전을 통해 살펴보자.

    조선의 형벌 규정은 대체로 [대명률]을 따랐다. 이에 따르면, 모반대역(謀反大逆; 반역죄로 오늘날 내란죄에 해당) 범죄의 경우 본인은 능지처참이 되고, 가족들도 연좌 처벌을 받았다. 그 범위와 처벌내용을 보면 아버지와 16세 이상 아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15세 이하 아들, 어머니와 딸, 처와 첩, 할아버지와 손자, 형제, 자매, 며느리는 공신(功臣)의 집에 주어서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몰 수 하였다. 아울러 백부, 숙부, 조카는 3천리 밖에 안치(安置)하였다. 다음에 규정된 것이 모반(謀反; 일종의 이적죄)인데, 죄인은 참형에 처해졌고, 처와 첩, 자녀는 공신의 집에 주어서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였고, 부모, 할아버지와 손자, 형제는 2천리 밖에 안치시켰다. 마지막으로 흉악한 살인범에 대한 연좌이다. 범죄자는 능지처사나 참형을 받았고, 재산은 몰수하여 피해자에게 주거나 관에서 몰수했다. 그리고 그 처자 혹은 동거하는 가족을 연좌시켜 유배에 처하도록 규정하였다.

    [사진] 정조 때 간행된 [대전통편]의 형전 부분으로 곳곳에서 연좌를 설명하고 있다.

    위의 예처럼 조선시대 연좌제는 법적으로는 반역이나 역모, 흉악한 살인 등 중대 범죄자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좌제는 훨씬 폭넓게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강상죄(綱常罪;유교 윤리를 어긴 죄로 자식이 부모를, 아내가 남편을,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경우에 해당)가 일어나면 본인을 처형한 후 그가 살던 집은 부수어 연못을 만들고 처자식을 노비로 삼았으며, 이에 더하여 범인이 살던 고을의 격을 강등시키고 수령도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예를 들어 1663년 현종 때 순천에 살던 춘대라는 여인이 간통하며 지내던 남자와 모의하여 자기 남편을 찔러 죽인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순천부를 순천현으로 고을 등급을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였다.

    이처럼 연좌에는 친족 연좌 이외에도 지역 연좌도 있었던 것인데 단지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지역 차별을 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정서로 보자면 인징이나 족징 같은 관행도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세금을 내지 않고 도망을 가버리면 수령은 그 지역의 세금 총량을 채우기 위해, 도망간 사람의 이웃 사람에게 세금을 징수(인징隣徵)하거나, 친척에게 징수(족징族徵)하면 부족분을 쉽게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좌제의 오랜 전통 때문인가?

    1894년 갑오개혁 때 이미 연좌제가 폐지되었고, 1980년대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공식적으로 연좌제가 폐지되었으나, 한국인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개별 개별의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고, 저 가족의 누구, 저 가문의 누구, 저 지역의 누구, 저 학교 출신의 누구, 저 나라의 누구 이런 식으로 본다. 이와 관련하여 10년 전 일어났던 한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2007년 한국계 미국인인 조승희가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많은 그 학교 학생들(미국인들)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미국인들도 그랬지만 한국인들도 패닉에 빠졌다. 저 끔찍한 범죄를 한국인이 저지르다니…. 한국 정부는 노무현 대통령 명의로 두 번이나 애도 성명을 발표했고, 정부 차원에서 조문 사절단 파견을 추진하였으며, 주미 한국대사 이태식은 “한국과 한국인을 대신해 유감과 사죄를 표한다”는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나아가 “충격적인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인 사회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참회하며 미국 주류 사회와 다시 융합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32일간 교대 금식을 제안했다.

    조승희라는 한국인이 미국에서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은 한국인 모두의 잘못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정작 미국 정부나 언론은 우리와는 다르게 이 문제에 접근했다. 이 사건은 한국인 조승희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총기 문화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해석하였고, 한국인들의 호들갑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국 정부는 “조문사절단을 구성해 파견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 대해 “그럴 필요 없다. 한국계 이민자가 사고 낸 거지 한국이 사고 낸 게 아니다. 모국이 끼어드는 것은 좋지 않다”고 거부하였다. 인터넷의 한국인 사과 열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대체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댓글을 보면 우리와 다른 사고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앞에 글 쓴 한국계들, 사과할 필요 없어요. 어제의 총기 범인은 한 개인으로 행동한 것이지, 한 문화나 인종의 대표자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 Tony

    “많은 한국인이 그 총기범이 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있네요.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린 당신들을 비난하지 않아요.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이 모든 것은 그의 잘못이고, 그만의 잘못이에요. 명확히요. 그는 인간성을 상실한 한 개인입니다. 당신들이 사과한다는 것 자체가 당신들이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과, 그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가 전체 아시아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듯이, 당신들도 그럴 필요 없어요. 또 앞에 누군가 ‘그러면 그렇지, 범인은 무슬림이었군’ 했던 것도 봤어요. 내 생각에 그건 아주 지독한 인종주의예요. 말도 안 되는 말예요.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도움이 되는 게 있을까요? 없어요. 그저 그 말을 한 당신을 바보이고 무식쟁이로 만들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증오의 말을 하지 말아요.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 대부분은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 An American

    이와 매우 유사한 일이 몇 년 뒤 또 벌어진다. 2015년 3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김기종씨에게 테러를 당했을 때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제부(弟夫)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는 마크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고, 한미혈맹관계를 더욱 돈독히 지키기 위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며칠간 ‘석고대죄’ 단식을 실행하였으며, 그 며칠 전에는 대한예수장로회 합동한성총회 소속 신도들이 ‘리퍼트 대사 쾌유 기원 및 국가 안위를 위한 경배 찬양행사’를 열고 부채춤과 발레, 난타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또 어떤 남성은 개고기와 미역국을 리퍼트 대사가 입원해있던 병원에 가져갔다가 경호팀의 만류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 부채춤 행사와 개고기 선물은 여러 외신들에도 소개되었다. 이쯤 되면 이런 행위들이 연좌제 전통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뿌리 깊은 친미사대주의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저 씁쓸할 뿐이다.

    [사진]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당시의 조승희. 그는 결국 자살했다.(위, NBC 뉴스 캡쳐화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사건 당시의 공화당 총재 신동욱씨의 트위터. “‘리퍼트 대사님,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So sorry’라는 메시지가 적힌 현수막을 바닥에 펼치고 리터트대사의 쾌유와 미국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길거리 단식장에서 밤을 세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아래)

    50명에게 벌금을 나누다.

    다시 옛 문서의 대동전 횡령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수령은 횡령한 돈을 지씨 친족들 총 49명에게 돈을 할당해서 내게 한다. 원래 족징은 내지 못한 ‘세금’을 친족들에게 떠맡긴 것인데, ‘벌금’의 징수에도 이렇게 족징을 이용하다니 수령의 응용 정신에 감탄할 뿐이다. 49명 중 횡령 당사자 지문환과 지경식도 쓰고 남은 돈이 좀 있었던지 그들 둘에게도 돈을 부과했고, 그들을 포함하여 지씨 성을 가진 사람이 35명이고, 지씨가 아닌 성씨로 올라간 사람이 14명이다. 이 14명은 지씨 집안의 여자가 시집간 집의 남편 이름이거나, 지문환과 지경식의 외가쪽 친족 이름이거나 어떻게든 직간접적으로 친족으로 연결된 사람일 것이다. 다만 이 문서만으로는 그 관계까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돈이 부과된 사람의 이름과 액수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자.

    지정홍(16량), 지육증(13량), 지달홍(4량), 지원식(14량), 지선식(14량5전), 지만식(14량5전), 지춘식(14량5전), 지유식(13량), 지돈식(1량), 지철환(14량5전), 지기환(14량5전), 지세환(4량), 지정환(19량), 지봉환(2량), 지길환(4량), 지관식(6량), 지두환(3량), 지성균(4량), 지경환(1량), 지두식(2량), 지준석(5전), 지금용(1량), 지한강(1량), 지한명(2량), 지순갑(1량), 지문홍(1량), 지평식(2량), 지용이(2량), 지유홍(8량), 지모용(1량), 지부길(8전), 지돌분(1량), 지원대(5전) 이어서 죄인 지문환(82량9전5푼), 지경식(51량)이다.

    돈의 액수는 공금 횡령한 인물을 빼면 최고 19량에서부터 최하 5전까지 다양하게 돈을 부과 받았는데, 액수가 다른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친족 관계가 가까운 이들일수록 많이 내고 먼 관계일수록 적게 내게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경제 수준을 고려했을 수도 있겠다.

    다음으로 지씨 이외의 성을 가진 친족들의 이름과 부과된 액수이다.

    황준엽(1량), 이인이(2량), 권대근(3량), 남광록(1량), 김윤갑(3량), 김돌녀(1량), 김수업형제(5량), 신원용(5량), 권안심(2량), 권치장(3량), 권소유재(3량), 박준이(2량), 황내경(2량)이다.

    [사진] 지문환, 지경식 소포 대동전 분족기에는 수많은 지씨들의 이름이 나온다. 문서의 일부분이다.

    이렇게 합치면 총 367량 2전에 육박하게 된다. 이 곳 수령은 이렇게 손쉬운 방법으로 횡령금액을 해결했다. 반면 지씨 집안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 받아들이기는 했겠지만 지문환, 지경식은 아마 그 지역에서 편히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향리 자리에서 파직도 되었을 것이고, 남은 돈도 다 털렸을 것이고, 주변 친척들의 원성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 이 문서의 작성 시기는 언제일까? 임오년으로만 나와서 정확한 작성 시기는 알 수 없다. 일단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이므로 조선후기 문서는 확실하다. 종이 재질로 보아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이거나, 그 이전인 1822년, 1762년 등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언제일까?

    이는 충주 지씨의 항렬자를 분석해보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충추 지씨 36대는 재(載)와 대(大)자를 쓰고, 37대는 현(鉉)과 호(鎬)자를, 38대는 구(求)와 영(永)자를, 39대가 근(根)과 식(植)자를, 40대가 환(煥)과 묵(黙)자를 쓰는 것으로 나온다. 세금은 횡령한 지경식과 지문환은 각각 충주 지씨 39대, 40대에 해당되며 지근식이 지근환보다 손위 사람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족징으로 벌금을 내는 친족들의 이름도 다수가 이름이 식(植)자이거나 환(煥)자이다. 이것을 통해 유추해 보자.

    충주 지씨의 족보를 굳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 중에 종두법 보급으로 잘 알려진 지석영 선생이 있다. 그는 1855년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하였다. 지석영의 형이자 사진술에 최초로 입문한 지운영도 비슷한 시기인 1852년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하였다. 영(永)자로 이름이 끝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충주 지씨 38대라고 한다면, 39대, 40대의 지경식과 지문환이 1820년대 공금을 횡령한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시간차가 많이 나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 적고 있는 임오년은 1882년 정도로 보는 것이 무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추정이다.

    마지막 남은 것은 이 문서가 어느 지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이다.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지만 쉽지 않다. 첫 번째 지경식과 지문환을 실록이나 옛 기록을 통해 검색해보는 방법이다.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닌지라 검색 결과가 없다. 두 번째는 이 문서 위에 찍힌 16개의 붉은 도장을 정밀하게 분석해서 해당 군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은 것이 도장에 찍힌 글자가 또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벌금을 부과 받은 사람들의 이름 위에 쓰여져 있는 글자들을 단서로 삼아 지역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김윤갑 위의 ‘玄'(현), 지한명 위의 ‘東'(동), 지문홍 위의 ‘西'(서), 지평식 위의 ‘南'(남), 지유홍 위의 ‘造'(조), 박준이 위의 ‘北一'(북일) 등 모두 6자는 아마 사는 면이나 마을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 말고 달리 표시할 내용이 없지 않은가? 그럼 충추 지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진 지역을 검색해서 그 곳의 지명과 겹치는 곳이 있으면 그 곳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검색을 해보면 충주 지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은 다음과 같다.

    충북 청주시 남일면 은행리, 충북 괴산군 불정면 창산리, 충남 아산군 인주면 금성리, 충남 부여군 초촌면 초평리,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군업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전북 부안군 동지면 본덕리, 전남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 등이다. 그러나 이곳들의 지명을 살펴보면 위에 나오는 여섯 곳의 지명과 겹치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거꾸로 ‘북일면’이 나오는 곳을 검색해보면 어떨까? 게다가 북일면이 있었다면 북이면도 있었을 것이다. 북일면 북이면이 나오는 군을 검색해보니 나오는 곳이 전남 장성군이다. 지금 현재 장성군에는 남면, 서삼면, 삼서면, 북일면, 북이면, 북하면, 동화면, 진원면 등이 보인다. 문서에 나오는 동,서,남,북과 관련된 지명과 상당히 많이 겹친다. 비록 ‘玄'(현), ‘造'(조)와 겹치는 지명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는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잠정적으로 이 문서는 전남 장성군에서 1882년에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 문서의 제일 윗부분에 보면 ‘북일’, ‘조’, ‘남’, ‘서’, ‘동’ 등 지명으로 보이는 글들이 보인다.

    정권은 짧고 역사는 길다.

    한 장의 종이 문서를 통해서 대동법과 연좌제 등 조선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았다. 대동법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법이다. 토지 소유에 따라 세금을 매긴 일종의 부유세인 대동법은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여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의 증대에도 기여한 혁신적인 세제였다. 양반들의 조세 저항을 물리치면서 10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전국적인 확대를 이룬 점이 인상적이다. 특히 김육이라는 인물이 대동법의 확대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올인했던 사실도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2018년 오늘 대한민국은 급등하는 아파트 가격을 잡기 위해 정부가 시행을 고민하고 있는 ‘보유세’ 인상이 이슈가 되고 있다. 종합부동산세 최고세율을 현행 2%에서 3% 이상 수준으로 올려 고가주택 보유자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지만 또 누군가는 ‘세금 폭탄’이라고 반발할 것이고, 또 어떤 언론들은 그들의 논리를 충실히 대변해 줄 것이다.

    그러나 언제 개혁이 쉬운 적이 있었던가? 기득권의 거센 반발이 있었고 100년 만에 전국 확대를 이룬 대동법은 그 당시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지금은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정권은 짧지만 역사는 길다. 5년을 보지 말고 100년의 내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은 집값 급등도 문제지만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수의 동의와 이해에 기반하여 100년은 거뜬히 유지될 수 있는 훌륭한 대책과 개혁안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참! 제일 앞머리의 퀴즈 정답을 놓칠 뻔 했다. 정답은 ①전복이다. 농사꾼에게 전복이라니…쯧쯧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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