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의 ‘아Q’들을 어찌할 것인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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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11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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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Q정전」(阿Q正傳)은 노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예컨대 「아Q정전」에 나타나는 혁명당에 대한 비판의식은 1911년의 경험과 이어져 있다. 1911년 원로혁명가 왕금발(王金髮)은 드디어 혁명에 성공하였다. 그는 노신을 산회초급사범학당(山會初級師範學堂)으로 위임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왕금발이 내세웠던 혁명의 항목들은 별로 실행된 게 없었다. 〈노신 평전〉(실천문학사, 2006)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입성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금발은 수많은 신흥귀족들과 한가한 인사들에게 둘러싸여 대 도독의 위세를 드러내면서 친신들을 구성하고 사치스런 생활에 빠지는 등 일락에 젖어들었다. 노신은 당의 이런 상황을 ‘아문에 있는 인물들은 처음에는 포의(布衣) 차림으로 들어와서는 열흘이 못 되어 날이 그다지 춥지 않은데도 전부 장포(長袍)로 갈아입었다’라는 말로 비아냥거렸다.”

    입으로만 요란하게 혁명을, 개혁을 떠드는 이들이야 역사에 흔히 나타난다. 그런데, 비극적이긴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세력을 좇아 무조건 긍정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이들의 정서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인터넷에서 활약(?)하는 노빠들은 이의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일단 노빠의 일반적 특징 세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노빠들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자신들만의 희생으로 진척되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을 비판하면 다음과 같은 반응이 즉각 튀어나온다. “세상 좋아졌다. 옛날 같으면 너희 같은 놈들은 당장 구속됐어. 세상이 좋아지니까 겁을 상실하고 까불고 있어.”

    글쎄, 참혹한 세상을 이 정도로나마 바꾸는 노력을 그들만 했던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386 정치인’들을 보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민주주의 성과에 대한 배타적 독점 욕망은 그들의 속성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구속만 피할 수 있다고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은 아니다. 이게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절대 척도는 아닌 까닭이다. 노동자가 분신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의 반응은 이러했다.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것을 보면, 대통령의 의식구조와 노빠들의 의식구조는 거의 일치하는 듯싶다.

    둘째, 노빠들은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리고 포용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준다. 완전히 독심술(讀心術)하는 수준이다. “복잡한 상황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다.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을 제대로 좀 이해해라.”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를 ‘고독한 지도자’라고 강조하는 방식으로 화답한다. 이러한 교감이 반복되면서 독심술과 고독은 점점 증폭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물론 노빠의 독심술 능력은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고독한 결단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결단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프란시스코 고야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 제42번 ‘너는 어쩔 수 없다’
     

    따라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야만 한다.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르는 그 무엇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논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잘못되었다. “대통령이 결정했으니까 이해한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판단했으니까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식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말이다.

    셋째, 노빠들은 거대한 적을 설정하여 스스로 합리화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회창이 집권했으면 분명히 상황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쉽게 한다. 이러한 연장에서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한나라당 2중대”라거나 “딴빠”(한나라당 지지자) 등으로 매도하는 습성도 드러낸다.

    이에 따라 그들은 언제나 민주 세력이 선택해야 하는 단 하나의 대상만을 설정하게 된다. 물론 그 대상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안티조선’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대통령이 〈조선일보〉와 긴밀하게 밀착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눈 감아 버린다. 이 순간 〈조선일보〉는 동지이기 때문이다.

    부등식을 들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눈에 명쾌하게 들어온다. 그렇지만, 그 단순함 속에는 왜곡이 개입하게 마련이다. 미군의 평택 이전 과정을 보라. 우리 정부는 상당히 굴욕적인 자세로 미군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이회창이 집권했을 경우 “그것 가지고 되겠습니까, 이것마저 가져가세요.”라고 덤까지 바쳤으리라 전제해야 하는데, 글쎄, 과연 누가 여기에 동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부는 그 내용을 꽁꽁 숨겨왔다. 이회창이 집권했을 경우 ‘뻔뻔하게’ 그 내막을 국민들에게 들이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현 정권의 선택이 더 낫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과정과 내용을 숨겨왔으니 대추리, 도두리의 주민들과 제대로 대화하고, 설득하고, 합의하는 과정은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군 병력을 투입하기에 이르지 않았나.

    물론 노무현 대통령 또한 할 말이 있을 게다. “난 몰랐다. 세상에 대통령도 모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가.” 정부의 어떤 계획이 시중에 회자될 즈음 대통령은 그러한 식으로 사실을 여러 번 부정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수보다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중에 떠돌던 얘기들은 실제로 거행되었다. 나는 여기에 대한 대통령의 해명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빠들은 ‘거대한 적’이라는 수렁에 빠져 스스로를 긍정하기에 바쁜 것 아닐까. 한나라당이 아무리 개판을 쳐도 열린우리당이 지지율을 따라잡지 못하는 까닭은 여기서부터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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