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이 이주로’를 위한 붉은 송별시
[역사의 한 페이지] 러일 전쟁과 붉은 비단 한 조각
    2018년 09월 07일 08: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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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병자년 대가뭄에서 ‘븅자년 죽빵’까지!”

“조선반도를 바라보는 미국의 눈빛과 표정이 어둡고 이지러져 있으며 북남관계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쌀쌀한 기운이 풍기고 있다.”

9월 4일자 북한 [노동신문]의 한 대목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비핵화와 관련하여 미국인 인질 석방,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동창리 서해 위성발사장 해체 등 나름 성의를 보여 주었는데, 미국이 ‘종전선언’이라는 낮은 수준의 상응 조치조차 나설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해체 작업이 지금은 중단된 것으로 알려진 동창리 서해 위성발사장은 평안북도 철산군에 있는 곳으로 이전 북한에서 동해상으로 ICBM급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보도가 나오면 함경도 무수단리 아니면 이 곳 동창리 이름이 단골로 등장해서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동창리 서해 위성발사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평안북도 철산에 관련된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히 대한제국기에 만들어진 붉은 비단 조각을 하나 수집하였다. 가로 50cm, 세로 25cm 크기의 심상치 않은 이 비단 천 조각에는 노문겸 등 4명의 인물이 ‘가나이 이주로’라는 일본 군인에게 바치는 4련의 한시가 쓰여 있고, 이어서 ‘광무9년 5월 14일’이라는 날짜와 ‘평안북도 철산 차련관’이라는 장소 등을 밝혀 놓았다.

광무 9년이면 서기로 1905년인데, 평안도 철산 사람들이 일본 군인을 위해 시를 지어 바친 것으로 보아 이 자료는 러일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 중 만들어진 붉은 비단 한 조각에는 어떤 역사가 담겨 있을까? 110년도 더 지난 러일전쟁기 철산으로 돌아가 보자.

[사진] 북한의 동해상 미사일 발사 사실을 전하는 뉴스 그래픽. 미사일 발사 기지로 늘 등장하는 곳이 함경도 무수단리 아니면 평안도 철산 동창리이다. (연합뉴스 2017년 3월 6일자)

우리 역사 속 철산

평안북도에 있는 철산은 그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곳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들 몇 가지가 이곳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 사건들을 듣다보면 철산이란 곳이 조금은 덜 멀게 느껴질 것이다.

철산과 관련된 우리 역사 두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철산은 조선시대 ‘모문룡 사건’의 중심지였다. 1621년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광해군이 어쩔 수 없이 철산군 앞의 섬, 가도(椵島)에 주둔하게 하였다. 광해군은 피난처를 제공하긴 했으나 적극적으로 모문룡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왕이 된 후에, 집권 서인은 적극적으로 가도의 모문룡을 지원하게 된다. 결국 눈엣가시 같은 모문룡과 이를 지원하는 조선에 대해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키게 된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이 내세운 명분이 4가지였는데, 이 중 두 가지가 모문룡과 관련된 것이었다.

“조선은 모문룡을 숨기고 도와주는 일을 아직까지 시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대 나라에 글을 보내 모문룡을 묶어 와서 우리 두 나라가 서로 화친하자고 하였으나 그대가 또 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모문룡을 그대 나라에 데려다 두고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들을 불러들이고 우리 변경을 공격했다.”

이 모문룡 사건은 근래 한반도에 배치된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과 매우 닮아있다. 명과 후금 사이의 조선, 그리고 뜨거운 감자 모문룡!

미국과 중국 사이의 대한민국, 뜨거운 감자 사드!

그러므로 조선시대 철산 가도는 오늘날의 경북 성주였던 셈이다.

[사진] 김정호가 그린 동여도(東輿圖) 제8첩에 그려진 철산 부근 지도. 철산의 왼쪽에 용천군, 그리고 오른쪽에 선천군이 보인다. 이 일대는 1811년 일어난 홍경래난의 중심 지역이기도 하였다. 지도의 가운데 제일 아래쪽에 그려진 섬의 ‘가(椵)’가 ‘가도’이고, 가운데 제일 위쪽에 있는 ‘차련(車輦)’은 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의주로(義州路) 위에 있는 차련역(또는 차련관)을 표시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또 하나 철산이 배경이 된 것이 장화홍련전이다. 17세기 평안도 철산 좌수 배무룡의 후처가 배무룡의 전처 소생이었던 장화와 홍련을 흉계로 죽인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데, 이를 소재로 한 고전 소설이 장화홍련전이었다.

이 사건은 가족제도가 변하던 과도기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장화 홍련이 살았던 당시에는 딸도 재산을 상속받았다. 배 좌수의 부인, 즉 장화홍련의 어머니 장씨는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부자였다. 장씨가 죽게 되면서 이 재산은 장화 홍련의 재산으로 상속되게 되어있었고, 배 좌수는 아내가 남긴 재산을 가질 수 없었다. 당시에는 피가 통하는 사람만 유산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은 피가 통하는 사이지만 부부는 혈연간이 아니다. 배 좌수는 아내 장씨의 재산을 통해 이자 소득 정도만 취할 수 있을 뿐, 소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화 홍련이 죽으면 그들의 재산은 아버지 배 좌수의 것이 될 수 있기에 장화 홍련의 계모는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장화 홍련을 죽인 것이다. 딸이 원천적으로 상속에서 배제되는 조선후기 사회였다면 이런 비극적인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철산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다. 어쨌든 철산은 모문룡 사건과 장화홍련전의 배경이 되는 곳 정도로만 알아두자. 이렇게라도 철산이 조금 익숙한 곳이 되었다면 이제는 이 곳 철산에서 만들어진 ‘붉은 비단 한 조각’에 대해 알아 볼 차례이다.

러일전쟁과 차련관 송별연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05년 1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헤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 당시 이처럼 한국을 도와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국 주변에는 패권을 차지하려는 러일 두 나라의 제국주의적 야욕만 존재할 뿐이었다.

1903년 용암포 사건을 계기로 러일 양국의 대립이 격화되더니 결국 1904년 2월 8일 일본의 뤼순 기습공격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은 전쟁 시작과 동시에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한국을 전쟁의 군사 전략적 교두보로 확보하였다. 전쟁 발발 직전 대한제국이 국외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한 데 이어, 6월에는 만주에 15개 사단을 거느리는 만주군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8월 랴오양(遼陽) 부근 전투, 10월 사허후이전투(沙河會戰鬪), 1905년 1월 헤이거우타이전투(黑溝臺戰鬪), 뤼순의 203고지 전투, 1905년 3월 펑텐전투(奉天戰鬪) 등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특히 이 3월 10일 펑텐전투에서의 승리는 일본 육군이 러일전쟁의 승세를 굳힌 중요한 전투로, 이후 일본 육군은 이 승전을 기리기 위해 그 날을 육군 기념일로 삼을 정도였다.

이런 육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러시아는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세계최강 발틱 함대를 아시아로 출격시킨다. 그러나 오랜 항해로 지친 탓인지 5월 27∼28일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쓰시마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게 궤멸 당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사진] 러일전쟁을 풍자한 그림으로 프랑스 화보신문에 실린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의 제국주의 패권 다툼에 대한제국은 그저 하나의 작은 약소국에 불과했다.

붉은 비단에 씌어진 ‘광무 9년(1905년) 5월 14일’은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육전에서는 승리를 확정지은 때였고, 쓰시마 해전을 얼마 앞두지 않은 때로 러일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때였다. 이런 때 철산 차련관에 거주하는 노문겸, 안순정, 노재성, 이시형 등 한국인 4명이 일본인 장교 가나이 이주로를 위해 시를 지어 바친 것이다. 정황상 이 곳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일본으로 철수를 했고, 이를 위해 철산 차련관 주민들 일부가 떠나는 일본군 장교를 위해 송별시를 지어 바친 것으로 보인다.

차련관(車輦館)은 조선시대 평안도 철산 북쪽에 있던 역이다. 원래는 차련역(車輦驛)이었는데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에서 평안도에 위치한 역들은 ‘관(館)’이라고 호칭했기 때문에, 옛 자료에는 차련관으로도 다수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의선 철도가 만들어질 때 기존의 의주로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노선이었던 탓에 차련관에 경의선 ‘차련관역’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이름이 동림역으로 바뀌었다. 현재 이 동림역(구 차련관역)에서 남쪽의 철산군으로 연결되는 선인 철산선이 이 곳에서 분기된다. 이 철산선이 동창리 미사일 기지(서해 위성발사장)로의 물품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일본 육군 보병 소좌 가나이 이주로를 위해 평안도 철산 차련관 주민 4명이 붉은 비단 위에 써 준 송별시이다. (1905년,비단에 묵서, 박건호 소장)

가나이 부대의 임무는?

이 차련관 주민들로부터 송별시를 받은 이는 일본 육군 소좌 가나이 이주로(金井 伊十郞)로 높은 계급의 군인은 아니었다. 아마도 큰 부대가 아니라 철산에 주둔한 작은 규모의 부대가 임무를 마치고 떠날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추정컨대 이 부대는 최소 몇 개월 이상 이 곳에 주둔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본군 장교에게 송별시를 지어 보낼 정도의 교분이 생겼겠는가?

그렇다면 이 부대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주어진 자료만으로는 그들이 어떤 임무로 거기에 주둔했으며, 그 주둔 기간도 알 수가 없다. 러일전쟁 중 일본 육군이 벌인 주요 전투는 대부분 압록강 너머의 만주 땅이었다. 그렇다면 이 철산에 주둔했던 부대는 어떤 부대였을까?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 철도 건설에 투입된 부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알다시피 경의선은 일본이 군용철도로 부설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지 보름 뒤인 1904년 2월 21일, 경의선 군용철도 부설을 위한 임시 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설치하고 3월 4일 이 감부 소속의 철도대대를 상륙시켜 불법으로 철도 부설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3월 12일 대한제국 정부를 강압하여 군사상 필요하다는 이유로 경의선 부설권을 넘겨받았다.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은 공사에 박차를 가하였고, 1905년 1월 26일 평양∼신의주 간의 철도가 완성되었고, 3월 29일 대동강 철교가 준공되었으며, 4월 28일 청천강·대령강의 두 철교를 제외한 전체 노선이 준공되어 이날부터 용산∼신의주 간에 연락 운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1906년 3월 25일 가장 어려운 공사 구역인 청천강 철교가 준공됨으로써 전구간에 걸쳐 열차가 운행되게 되었다.

그러니까 차련관 주민들이 송별시를 바친 시점은 1905년 5월 14일인데, 박천평야를 끼고 있는 청천강과 대령강의 두 철교 공사를 제외하고는 1905년 4월 말로 경의선은 사실상 공사가 끝난 시점이었다. 가나이 부대는 철도 건설을 위해 투입된 부대로 철산의 차련관역 주변 선로 공사를 맡았던 것이 아닐까? 경의선 철도가 지나가는 차련관역의 주민들이 이런 시를 지었다는 사실에서 그럴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다. 가나이 부대는 몇 개월간 거기에 주둔하면서 공사를 했으므로 그 지역 주민들과는 일정한 교류를 했을 것이며, 일부 지역 유지들과도 교분을 쌓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떠날 때 그 지역 주민들 일부가 주둔 부대의 책임자인 가나이 이주로의 공훈과 인품을 기리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지어 선물로 준 것이 아니었을까?

[사진] 경의선은 일본이 군용 철도로 부설하였다. 이 철도 부설과정에 일본군 철도대대가 투입되었다. 사진은 일본에서 경의선 철로 부설 작업 현장을 찍은 것으로 흰옷 입은 사람들이 일본군 공병대대이다. 가나이 이주로는 이런 부대에 속한 장교가 아니었을까? (1906년, 『일-러 전쟁 화보』에 실린 사진)

그런데 좀 이상하다. 제국주의적 팽창욕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일본군 장교를 위해 평안도 차련관 주민들이 그런 시를 지어 바친 것이 말이다. 그 시는 강압에 의해 쓴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발적인 것이었을까?

한국인들의 상당수가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소 당황스럽겠지만, 당시에는 이런 시를 지어 바치는 것은 그 당시 정서로서는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그 이유는 당시 한국인들은 아직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우리들이 식민 지배의 가혹한 경험 때문에 일본에 대해 가지는 반감이 당시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 시대가 지금보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 크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아시아연대론, 대아시아주의, 대동방연합론같은 논리가 꽤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는데 이는 한중일이 일본 중심으로 연합해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열강에 대응해야한다는 이론이었다. 이런 시각으로 보자면 러일전쟁은 황인종 대 백인종의 전쟁일 뿐이었고, 우리는 같은 황인종인 일본을 도와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러일전쟁이 끝난 지 불과 2달 뒤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한국인들은 아시아연대론이 허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에는 이런 배신감이 잘 드러나 있다.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을사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안중근 의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들이 러일전쟁 중 일본 승리를 지지한 이유를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과 청나라 양국의 국민은 일본에 반대하지 않고 도리어 일본 군대를 환영하여, 길을 닦고 짐을 나르며 정보를 알아내는 등 힘껏 일본을 도와주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할 때, 일본 천황은 이 전쟁이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의 독립을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청나라 사람들은 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일본을 도왔던 것이 한 가지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과 러시아의 싸움이 황인종과 백인종의 다툼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진 마음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이래로 앞장서서 못된 짓을 일삼던 백인종의 한 무리를 일본이 단숨에 쳐부수었으니, 이는 참으로 놀랄 일이며 기념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후 일본이 평화의 연대를 만들어가지 않고, 반대로 침략의 길을 걸어가는 것에 분노해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던 것이다.

[사진]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한국인들이 러일전쟁 초기에 일본을 지지해 도왔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므로 전쟁 후 을사늑약 체결 이후는 몰라도 러일 전쟁 당시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있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이 러일전쟁 즈음의 아시아연대론은 몇 십년 뒤인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침략 전쟁을 도와야한다는 논리로 부활하게 된다. 윤치호의 일기 몇 구절을 보면 그 논리의 유사성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934년 5월 10일에 쓴 일기이다.

“범아세아운동은 그저 하나의 이상이나 꿈이 아니다. 이 운동은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국가를 일본의 헤게모니 아래 하나로 모아 거대한 종족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하나의 정책이다. 최남선 군은 [신(神) 그대로의 태고를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팜플렛에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을 포함해 동북아시아의 광활한 영역에 있는 모든 민족은 자기네 통치자의 신성한 기원에 대해 유사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일본의 신도(神道)를 통해 이 공통의 유산을 원형대로 보존해 왔으며, 이 공통의 관념이 동북아시아 민족의 결속에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범아세아운동이란 것도 따져보면 러일전쟁 중 나왔던 아시아연대론이나 대아시아주의는 특별한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몇 년 뒤 다시 윤치호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38년 1월 20일 일기이다.

“…지금 이 세상에는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고 있으며, 힘이 정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쓸모 있는 자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걸 개발할 능력이나 지킬 힘이 없는 국가나 민족이 사라져야만, 비로소 이 세상에서 야심찬 침략 전쟁이 중단될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럴진대, 일본, 프랑스,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적 행위만이 유독 욕먹을 이유는 없다. 사실 유럽의 모든 열강은 약소국을 공격한다는 이유로 일본에 대해 뭐라 비난할 입장이 못된다. 굳이 변호하자면,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백인종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운 점이 있다. 앵글로 색슨족이 동아시아국가들에게 부과했던, 백인종의 자만심의 쌍생아, 즉 치외법권과 관세차별을 일본이 영원히 제거해주었으면 좋겠다.”

다시 붉은 비단 조각으로 돌아가 보자.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철산을 떠나는 일본군을 위해 차련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마련한 송별연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자리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일본에 대해 조금 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열렸을 것으로 보인다.

자리가 파할 즈음에 주민대표 노문겸, 안순정, 노재성, 이시형 4명은 그곳에서 철수하는 일본육군보병 조장(曹長) 가나이 이주로(金井伊十郞)에게 술을 권하고 비단에 먹으로 쓴 송별시를 선물로 주었을 것이다. 비단은 가나이 조장의 충성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붉디붉은 색으로 골랐다. 일편단심을 표현하는데 붉은 색만한 것이 있었겠는가?

비단 위에 적은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重功輕命遠從軍 공 높이고 목숨 버려 멀리 군무에 종사해
爲國誠心始見君 나라위한 성심을 처음 그대에게서 보네.
休暇優遊論膽密 여가에 노닐면서도 담대 진밀을 논하니
唯歌今日奈相分 오늘 노래를 할 뿐 어찌 헤어질 수 있으랴.

[사진] 붉은 비단에서 송별시 부분을 확대한 사진이다.

이 시가 적힌 비단 위 인물인 ‘가나이 이주로’ 소좌가 어떤 인물인지 여러 경로를 통해 검색하였으나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1905년 일본에서 간행된 [日露大戰爭史]라는 책에 참전군인들의 인명록이 나와 구입해서 다 찾아보았으나 역시 가나이 이주로는 나오지 않았다. 조장(曹長)은 소대장 정도의 계급인데 그가 그렇게 유명한 인물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차련관 주민으로 시를 바쳤던 노문겸 등 4인의 신상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검색을 해봤으나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친일파를 대표하는 일진회 회원이었을까?

일진회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10월부터 1년간 자발적으로 경의선 철도 부설에 인부로 자원하여 노동력을 제공했는데, 어떤 기록에는 그 수가 15만명으로 되어있다. 특히 일본군의 물자 보급과 수송을 맡은 일진회 회원의 수송대를 가리키는 ‘북진수송대’로 활동한 일진회 회원 수도 11만 4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일진회가 러일전쟁 중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왔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다른 지역에 비해 당시 평안도에 일진회원이 아주 많았다는 점을 동시에 고려한다면, 노문겸 등 차련관 주민 4명은 일진회 회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단순히 그 지역의 주민 대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사진] 일진회는 러일전쟁이 일본에게 우세하게 이미 기울어가던 1904년 8월 종로에서 창립된 친일단체였다. 송병준과 이용구가 중심인물이었다. 그들은 러일전쟁이 끝난 후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에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1909년 12월에는 ‘한국 정부를 폐지하고 일본이 직접 통치할 것’을 포함한 4개항을 결의하여 황제와 통감, 총리대신에게 전달하여 한일합방을 촉구하였다. 사진은 일진회가 1907년 방한한 다이쇼 황태자를 환영하는 아치를 세운 모습이다. (천지일보 사진)

침략과 전쟁의 역사에서 평화와 공존의 역사로!

자기 나라의 운명이 강대국의 힘겨루기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늘 봐왔던 일이다. 모문룡을 사이에 두고 대립했던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의 이야기도 그렇고, 붉은 비단에 이별의 아쉬움을 새긴 이 자료가 만들어지던 러일전쟁 때도 그러하였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최근 갈등도 그와 다르지 않다. 형태만 달리할 뿐 강대국의 패권 경쟁에 놓인 약소국의 처지는 비슷하다.

그러나 2018년 지금 한반도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다. 이전처럼 강대국의 경쟁에 우리의 운명을 그저 맡겨 놓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한반도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이 전쟁을 위해 만들고, 그 후 분단의 상징이 된 경의선 철도를 우리는 대륙과 연결시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철도로 변화시키려는 대담한 구상도 추진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광복절 기념식사에서 언명한 ‘동아시아철도공동체’은 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시련과 역경이 있겠지만 전쟁과 고통으로 얼룩진 이전 역사와는 다른 승리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9월 5일 북미간 비핵화 협상이 교착된 상황에서 대북 특사단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들이 어떤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낼지에 기대가 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한 책>

이종서, 『한국사 탐험대7』, 웅진미디어, 2006

김상태, 『윤치호 일기』, 역사비평사,2001

한국학중앙연구회,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국립중앙박물관, 『지도예찬』, 2018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강남대성학원의 역사강사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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