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희정 무죄 판결’은 유죄
    [기자칼럼] 말하는 여성들의 발목 잡는 ‘여론 심판관들’의 시선
        2018년 09월 05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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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가 피고인으로부터 처음 위력에 의한 간음을 당했다는 몇 시간 이후부터의 행동 즉, 러시아에서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하는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하려고 애쓴 점, 피해 당일 저녁에 피고인과 와인바에 간 점, 귀국 후 피고인이 머리를 했던 헤어샵에 찾아가 같은 미용사에게 머리 손질을 받은 점…(중략)…이러한 사정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단지 간음피해를 잊고 수행비서의 일로서 피고인을 열심히 수행하려 한 것뿐이라는 피해자 주장에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중략)…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가는 등으로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피해자의 그러한 언행은 없었다”

    ‘안희정 성폭행 사건’에서 1심 선고문의 일부다. 요컨대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평소처럼 업무를 해낸 것은 비상식적이며 나아가 피해자 김지은의 동의 아래에 이뤄진 행위들이었다는 안희정 측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가는 등으로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임에도, 피해자의 그러한 언행은 없었다”는 부분에선 남성 가해자들이 흔히들 하는 “너도 좋아선 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두 사람이 연애한 것 아니냐는 가짜뉴스 같은 이야기에 법원이 힘을 실어준 것이다.

    가해자에겐 가해자라는 꼬리표를 떼어주고 피해자에겐 ‘불륜’이라는 낙인을 찍은 안희정 무죄 선고문은 수많은 여성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이런 법원의 선고문은 일상적인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어찌할 도리 없이 해내고 있는 ‘인내’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범죄’를 ‘연애관계’로 ‘퉁치자’는 2차 가해이자, 가부장적인 남성중심 사회의 ‘범죄 공모’였다.

    검찰에 출두하는 안희정 전 지사의 모습 자료사진(방송화면)

    직장 내 성폭력, 그건 성폭력이 아니라는 법원의 선언

    왜 김지은은 안희정의 성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을까. 여성들은 성폭력 폭로를 시작으로 겪어야 할 고초를 직·간접적으로, 매일처럼 체험하며 살아간다.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누나’에서 여성 직원들이 수시로 남성 상사로부터 회식자리에서, 업무 중에, 성추행과 성희롱을 당하지만 대다수가 승진을 위해, 경제적 독립을 위해,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상사인 가해자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평소처럼’ 일한다.

    그런데 이건 드라마, 영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한 회사의 대표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회식 자리에서 내 엉덩이를 두들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내가 당한 이 일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후론 성폭력을 당한 모든 여성이 그러하듯이 ‘내가 여지를 준 것은 아닌지’ 등의 자책으로 괴로웠다. 당시는 미투 운동은커녕 심지어 직장 내 성폭력에 여성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밥상머리 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스스로를 향한 수많은 질문과 질책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내 월급을 주는 유일한 사람인 가해자를 평소처럼 대했다. 웃으며 인사를 하고, 회식자리에서 술을 따르고, 권해주는 책을 읽고, 심지어 생일까지 챙겼다.

    나 역시 성폭행에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한 달이나 지난 후에야 문제제기했기에 내가 당한 것은 성폭행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일까. 1심 재판부 선고문대로라면 법적으로 인정될 만한 직장 내 성폭력은 대체 있긴 한 걸까.

    피해의 고발 그리고 해고

    한 달 간에 고민 끝에 결국 공개적으로 사과를 받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 가해자인 대표는 나와 독대한 자리에서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진 않지만”이라는 말과 함께 “어찌됐든 사과하겠다”고 했다. 나는 공개사과를 요구했고, 이후 나는 회사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 따돌림을 주도했던 인물은 가해자인 대표였다. 나를 배제하고 직원들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는 자주 사무실에 혼자 남겨졌다. 어쩌다 회식 자리에서 내 옆에 앉는 다른 직원들에게 대표는 “왜 걔 옆에 앉느냐”, “너도 나쁜 물들고 싶어서 그러느냐”는 말을 내 면전에 대고 스스럼없이 했다. 결국 가해자는 신입사원이 있는 자리에서 나에게 “네가 나가지 않으면 회사 문을 닫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직원들의 밥줄을 볼모로 한 협박이었던 셈이다.

    나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해고였지만 해고로도, 권고사직으로도 처리되지 못했다. 해고나 권고사직으로 처리하길 원한다면 신입 사원 한 명도 같이 자르겠다고 했다.(당시에 청년 정규직을 해고하면 정부가 지원금을 끊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내 일 때문에 누군가의 밥줄을 끊고 싶진 않았다. 회사에선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돈을 쥐어줬다.

    두 번째 회사에서 나는 또 다시 성폭력을 경험했다. 이번에도 가해자는 회사의 대표였다. 대표는 일 문제로 논의할 게 있다며 일식당으로 나를 불러내어 연거푸 술을 권했다. 그는 내 거절 의사를 “어른이 주는 술은 받아야 한다”는 말로 가볍게 제압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눈 떠보니 호텔 방이었다. 직접적인 성폭행을 당하기 직전이었다. 너무 놀라 취한 상태로 비틀대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다음 날 대표는 내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그렇게 했다. ‘혹시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자책에 시달리고 있을 때 가해자는 우회적으로 퇴사를 요구했다.

    김지은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 상사의 성폭력 앞에 무력해지는 이유다. 위력에 의한 성폭행에 대한 피해여성의 폭로와 적극적인 저항의 결과는 해고이고, 살인이다. 여성들은 이 뻔한 결말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법원은 김지은에게, 아니 수많은 피해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란 것이다.

    조현아의 갑질과 안희정의 갑질

    대한항공 조현아의 행패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 사회가 분노했다. 땅콩 하나 때문에 자신이 고용한 직원에게 면박을 주고 수백 명이 탄 비행기를 돌리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실제로 비행기는 조현아의 뜻대로 움직였다. ‘인사권’을 쥔 권력자의 ‘갑질’이었다. ‘땅콩 리턴’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갑질이 아니라고 의심한 사람들은 없었다. 이후 조현아의 동생인 조현민이 직원의 얼굴에 물을 뿌린 일에도 사람들은 ‘물컵 갑질’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함께 분노했다.

    백화점 명품관에서 손님이 판매 노동자를 무릎 꿇리는 사건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여론은 노동자를 상대로 한 손님의 갑질에 분개했고 이후 이런 장면은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갑질의 표본이 됐다.

    상사가 부하직원들에게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강요하거나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에 가기를 요구하는 것 역시 의심 없이, 우리는 부당한 갑질이라고 여긴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도 마찬가지다. 김지은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상사인 안희정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김지은에게 ‘성관계를 요구’한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다. 수많은 ‘갑질러’들이 비행기를 돌리게 하고, 무릎을 꿇게 만들고, 술을 강요한 것처럼 안희정 역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김지은에게 ‘성관계를 요구’한 것이다. 총수 딸의 지시대로 비행기를 돌리고, 손님이 요구대로 무릎을 꿇고, 술을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마신 것처럼 김지은도 안희정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런데 일부에선 남성 정치인이 여성 부하 직원에게 저지른 갑질엔 다른 반응을 보인다. ‘김지은의 동의 아래 이뤄진 성관계’라는 안희정 측의 주장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안는 이들이 있다.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없는 권력자의 갑질에 느닷없이 ‘연애’, ‘불륜’ 같은 단어를 붙이며 안희정을 얼굴값 하는 정치인 정도로, 김지은은 잘생기고 능력 있는 정치인을 짝사랑하는 혹은 불륜을 저지른 꽃뱀으로 전락시켰다. 조현아든 명품관 손님이든 다 같은 갑질이지만, 사회는 남성이 가해자이고 피해자가 여성인 성폭행 사건에만 이토록 매몰차게 군다.

    말하는 여성들의 발목 잡는 여론 심판관들

    서지현 검사의 말하기로 시작된 미투 운동에 대한 지지는 폭발적이었다. 이후 문화예술계 여성들의 말하기가 이어졌고 이윤택, 고은 등 저명한 인사들이 줄줄이 고발당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좀 다르게 흘러갔다. 어렵게 용기를 낸, 평범한 여성들의 말하기는 어째서인지 의심받기 시작했다. 커뮤니티나 포털 뉴스의 댓글 등으로 활동하는 소위 ‘여론 심판관’들은 평범한 여성들의 폭로에 언짢은 시선을 보냈다.

    그 평범한 여성들이 검사가 아니고, 문학인이 아니고, 예술인이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지금껏 누려왔던 기득권에 조금의 균열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심산으로 펼치는 전략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여론 심판관들은 남성 중심의 정치권력에 정점에 서 있는 안희정을 겨냥한 김지은에게 가장 매서운 검증의 칼을 들이밀었다.

    김지은이 늙다리 아저씨인 안희정한테 연애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연애 감정이라고 주장하는 안희정을 보면서 ‘왕자병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놀라운 일은 안희정 측의 주장을 옹호하는 여론이 꽤나 많다는 사실이었다. 젊은 남성이 나이 60을 바라보는 중년의 여성 상사를 사랑하는 게 상식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여성 나이가 20살 가까이 많은 연예인 부부들이 유독 화제의 중심에 서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젊은 여성인 김지은이 늙은 남성인 안희정을 좋아했을 것이라고 끝없이 의심하거나 확신한다.

    ‘젊고 앞길 창창한 여자가 왜 그런 늙은 유부남을 좋아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면 그들은 홍상수와 김민희 사례를 들이대며 반박한다. 젊고 예쁜 김민희가 늙은 유부남인 홍상수를 사랑하는 일이 도무지 이해불가에 충격적이라고까지 했던 사람들이, 그 이해불가한 사례로 김지은과 안희정의 불륜을 증명해내려고 애쓴다. 더 나아가 그들은 불륜, 꽃뱀 등의 표현으로 김지은의 성폭력 피해를 순식간에 ‘감춰야 하는 치부’로 만들어 버린다. 피해 여성의 말하기가 다른 고통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이 말이다.

    나는 지인들에게 내가 경험한 두 번의 성폭력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런 ‘말하기’는 결코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한 남성인 지인은 첫 번째 성폭력을 당한 후 공개사과를 요구한 나에게 “사회생활을 할 줄 모른다”, “너 아직 어리구나”라고 평했다. 또 다른 중년 여성인 지인은 “눈웃음 치고 다니지 마”라고 나에게 조언했다. 직장 내 성폭력에 함구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여성’이고, 피해 여성이 ‘꼬리를 쳐서’ 성폭력을 당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라도 있었던 걸까.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는 사내에서 두 번이나 성폭력을 당한 사건을 여성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정도면 여자 행동거지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에 힘을 싣는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거부하고 살아왔다. 성폭력의 경험이 쌓일수록, 그것을 말할수록 피해자인 나만 더 고통스러워질 것이 자명한 그 상황에 다시 들어가서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나 피곤한 일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여성들이 있다. 덮어놓고 입 다물고 사는 편이 신상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고 싸우는 여성들이 있다. 그런 여성들로 인해 미투 운동은 힘을 얻었다. 실제로 미투 운동 이후 직장 내 변화를 체감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여자들한테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다’ 같은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뒤에서 속닥거리면서도, 적어도 앞에선 스스로를 검열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남성들을 종종 본다. 나는 이런 것들이 미투운동이 가져온 긍적적 변화라고 믿는다. 어렵게 용기를 낸 여성들이 일군 변화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조직 내 성범죄에 노출돼있다. 때문에 과거의 경험에 발목 잡혀 말하기를 주저하는 여성들도 이제 말해야 한다. 비난이 두려워 말하기를 주저한다면, 안희정에게 무죄를 준 저 보수적인 법원과 김지은을 꽃뱀이라고 제멋대로 재단하며 기득권을 지켜내려는 못된 남성들에게 결국엔 지고 마는 것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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