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공간 스카이라운지, 반도호텔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서울의 호텔이야기②
    2018년 09월 04일 08:54 오전

Print Friendly

* 서울의 호텔이야기(1) 링크

라운지는 공공건물이나 상업용 건물 등에서 안락의자 등을 갖추어, 이용자가 휴식하거나 대화행위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호텔의 라운지는 낮선 공간에서 여행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바의 형식을 주로 갖추고 있는데,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의 배경이 되었던 파크하얏트 도쿄의 ’뉴욕 바‘가 대표적이다. 또한, 다국적 TV 채널과 신문, 잡지 등을 비치하고 있으며, 컴퓨터와 프린터 등을 갖추어 상용고객들의 업무와 미팅을 지원하기도 한다. 이렇게 상용고객들에게 특화된 라운지를 클럽 라운지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이그제큐티브룸•스위트룸의 투숙객과 그들의 손님에게만 제공된다.

현재 서울의 호텔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라운지는 2017년 4월 문을 연 롯데월드타워 시그니엘 호텔 79층에 위치한 ‘더 라운지’이다. ‘아름다운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형상화한 작품’, ‘도심 속 최고층에 위치한 힐링 공간’임을 강조하는 이곳은 일상생활에서는 경험해보기 어려운 높이에서 도심을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뉴욕 바> (출처 : https://www.hyatt.com)

<더 라운지> (출처 : https://www.lottehotel.com/)

특별히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라운지를 스카이라운지라 부르는데, 서울의 호텔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54년 4월의 일이었다.

해방 이후 반도호텔

반도호텔은 1938년 4월 1일 일본 질소비료주식회사의 사장인 노구치 시다가후(野口遵)가 황금정 1정목(지금의 을지로1가)에 건립한 8층 111실 규모의 상업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에서 사용하였고 정부 수립 이후에는 ECA 경제협력국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49년 4월 20일 한미 양국 정부의 공영과 협력을 상징하는 반도호텔 양여식이 반도호텔에서 거행되었다. 정부는 반도호텔을 미국에 증여하였으며, 미국은 서울 내 별도의 호텔을 건축하는 비용 3백만 달러를 기증하였다. 하지만,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 이후 정부는 다시 반도호텔을 매입하여 1년에 가까운 수리를 하였다.

폭격으로 인한 수리공사는 육군 제1201 건설공병단이 담당하였는데, 당시 이정도 규모의 건설공사를 진행할 중장비를 갖춘 민간회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계는 현대건축의 거장 미스 반데 로에와 함께 건축을 공부한 시카고 출신의 노르만 디한(Norman R. Dehaan)이 담당하였다. 노르만 디한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 육군에 근무하며 도로 건설 등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국가재건사업을 돕기도 하였다.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친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리공사에서 사용한 자재는 주로 미국에서 수입되었으며, 세련된 미국식 디자인이 도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측 옥상에 스카이라운지가 만들어졌다. 입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어 일명 ‘유리집’으로 불린 이곳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높은 반도호텔 내에서도 특별한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반도호텔(출처:서울역사박물관)

수리를 마친 반도호텔, 옥상에 스카이라운지가 보인다.(출처:서울역사박물관)

반도호텔은 철저하게 외국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호텔 저층의 임대공간은 대부분 외국인 상회에 임대되었으며, 투숙객들도 거의 외국인이었다. 물론 특권층의 한국인도 출입할 수 있었다. 호텔 내에서는 영어가 기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숙박비는 미국달러로만 지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카이라운지 역시 외국인들이 주로 이용하였으며, 그들이 유리창 너머로 도심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간간히 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완전한 도심 내 이방공간이었다.

반도호텔 공천 떨어지듯 한다

1958년 5월 2일 민의원 선거를 앞둔 3월, 800여명의 인사가 자유당의 공천을 신청하였고 최종 230명을 선별하기 위한 공천심사가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진행되었다. 휴식을 제공하는 스카이라운지가 공천 심사장으로 사용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1958년 경향신문의 기사를 살펴보면 그날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제일 높은 반도호텔 옥상에 유리로 지은 스카이라운지, 유리의 장막을 내린 채 자유당 당무위원들은 3일에도 제2차 공천심사를 속행중이다. 맨 아래층 커피숍에는 도당위원장들이 기다리고 앉았다가, 옥상에서 부름이 있으면 서류뭉치를 들고 올라간다. 면회는 물론 일절사절, 반도호텔 근처를 서성거리는 공천 신청자들은 문자 그대로 높은데 보좌(寶座)를 정한 고위층을 향하여 가슴속으로 두손을 비비는 형편, 언제부터 자유당에 이처럼 높은 사람들이 생겼나? (후략) _ 경향신문 1958.3.5

800여개의 애타는 가슴을 태운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그들 전원을 심사실까지 싣고 올랐으나 그 중 600은 낙천자라는 딱지를 등에 붙이고 9층 들창 밖에서 까마득한 지상으로 내던져졌다. 공천과 함께 민의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순간의 꿈을 가진 낙천자들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 아니 반도호텔 공천 떨어지듯 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것이다. _ 경향신문 1958.12.21.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 호텔은 외국인전용으로 소수의 한국인을 제외하고는 출입할 수 없었다. 그 소수의 한국인 중 한 명이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를 지낸 민의원 의장 이기붕이었다. 그는 이 호텔 809호실에 머물며, 자유당 간부회의, 여야 고위간부 연석회의 등 주요한 의사결정이 진행되는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반도호텔에서 대중시위를 조작하고 부정선거를 기획하던 이기붕이 쫓겨난 1960년 4월 19일, 한 미국인이 스카이라운지에서 경찰이 쏜 유탄에 맞았다. 제임스 월칵스는 도심을 가득 채우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내려다보며 응원하던 중이었다. 중상을 입은 그는 미 8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계속하였으나 1년 뒤 끝내 사망하였다.

이기붕이 떠난 809호실은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이기붕에게 833만 표 대 180만 표의 차이로 낙선하였던 부통령 장면이 차지하였다. 그는 반도호텔을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하였는데,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피신을 권하는 전화를 받고 황급히 떠날 때 까지 주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그들에게 반도호텔의 역할은 같았다.

발밑엔 도시의 야경, 실내엔 달콤한 밀어

1959년 7월 31일 조봉암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의 이슬로 사라진 그날, 서울의 낮 기온은 섭씨 33도에 달했다. 사람들은 더위로 지쳐가고 있었지만,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실내온도 15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덕수궁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맥주나 주스로 더위를 식히는 사람은 대게가 외국인이었으며, 여전히 영어와 미국달러가 통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과 정치인들만으로는 호텔의 경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수년간 적자는 계속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1960년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고 우리 돈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스카이라운지에는 이방지대를 즐기려는 시민들이 하나둘 드나들게 되었다. 때론 그 낯섦에 동화되기도 하고 때론 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모습과 현실과의 차이로 공허함을 키우기도 하였는데, 당시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찾는 주요한 장소로 언급되며 그 이미지는 확대, 재생산 되었다.

그들은 반도호텔 옥상에 있는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다. 그리고 시청 앞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지금 자기들이 돌아 나온 덕수궁도 바라 보였다. (박계주, 장미와 태양)

거리는 지금 한창 자동차와 사람의 내용으로 혼잡을 이루고 있을 무렵이었고, 골목과 골목, 집과 집 속에서는 악착같은 인간생활이 순간의 쉬임도 없이 영위되고 있으련만, 이곳 <반도 호텔> 옥상에 서서 내려다보노라면 그것은 마치 무슨 벌레의 움직임과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는 거다. 득수는 이 착각이 착각임을 알면서도 때로는 자신이 악착같은 인간생활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여길 올라오곤 하였다. – 안수길, 부교

한석우와 송계영은 택시를 잡고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택시 속에서 한석우는 또 물었다. “그날 밤이라니요? 경회원 파티날 저녁 말입니까?” “우리가 같이 만났던 게 그날 저녁밖에 더 있었어요?” – 이호철, 인생대리점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기분두 가끔 맛보며 살아야지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의 명성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이루어진 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인근에 더 높은 뉴코리아호텔 공사가 진행되었다.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정동 쪽을 바라보면 덕수궁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뉴코리아호텔의 객실이 보일 뿐이었다. 이 호텔은 1965년에 개관하였는데 15층에는 스카이라운지도 구비되었다. 사람들은 더 높은 곳으로 더 새로운 곳으로 옮겨갔으며, 소설 속 주인공들도 그러했다.

961년 반도호텔(스카이라운지에서 보면 시청앞 광장을 너머 덕수궁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출처:서울역사박물관)

1964년 1월 공사 중인 뉴코리아호텔(더이상 덕수궁 너머까지 볼 수 없다)(서울역사박물관)

택시가 시청앞에 이르자 상오는 뉴코리아 호텔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호텔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앞에 섰다. “어디루 가게요?” 초희가 물었다. “스카이라운지에 가서 밤서울을 내려다 보며 저녁을 먹어그들은 십삼층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가 창가에 있는 자리를 잡았다. (중략) ”땅에서 기어 다니며 살지 말구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기분두 가끔 맛보며 살아야지“ – 박영준, 고속도로

엠버서더호텔, 타워호텔 등 새롭게 개관하는 호텔들과의 경쟁은 더욱 힘들어졌다. 1970년 영원한 라이벌이던 조선호텔이 최신시설을 갖춘 호텔로 다시 지어짐에 따라 반도호텔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스카이라운지는 성매매, 퇴폐적 공연행위 등으로 영업정지처분을 받기도 하였고 밀수한 양주 90명을 압수당하기도 하였다. 유흥업소로 지정되어 공무원의 출입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높이 경쟁에서 뒤쳐진 결과였지만, 시련은 너무 빠르게 찾아왔고 사람들은 쉽게 잊었다.

1974년 국제관광공사 소유의 반도호텔 민영화 정책에 따라 41억9천8백만원에 호텔롯데에 매각되었다. 동양 최대의 호텔을 새로 짓는다는 계획에 따라 반도호텔은 허물어졌으며, 1979년 3월 10일 한국에서 가장 높은 38층 규모의 호텔롯데가 문을 열었다. 가장 높은 38층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었는데, 휴일에는 2천여 명이 몰릴 정도로 도심의 명소가 되었다. 또 하나의 스카이라운지였다.

뉴코리아 호텔 너머로 롯데호텔이 지어지고 있다(출처:서울역사박물관)

호텔롯데 전망대 광고(출처:동아일보)

<참고문헌>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http://newslibrary.naver.com)

여행신문(http://www.traveltimes.co.kr)

발레리 줄레조, 티에리 상쥐앙 외, 양지윤역, 『도시의창, 고급호텔』, 후마니타스, 2007

윤상인, 「호텔과 제국주의-우리 안의 ‘반도호텔’들에 대해」, 『일본비평6호』, 2012

최민현, 「근· 현대 국가 주도 호텔의 건설과 자본주의 유입에 따른 변화」,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6

필자소개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