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도적 돈에 인수된
    유망한 독립팀의 운명은?
    [왼쪽에서 본 F1] 로렌스 스트롤의 포스인디아 인수를 바라보며
        2018년 08월 29일 09: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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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시즌 전반기 최종전 헝가리 그랑프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7월 말, F1에는 큰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시작은 루머로만 떠돌던 포스인디아의 재정 위기였습니다. 포스인디아가 심각한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만한 소식통을 통해 속속 확인됐고, 일부 채권자들의 강력한 행동이 예상됐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헝가리 그랑프리 시작과 함께 포스인디아 소속 드라이버인 세르히오 페레스가 팀의 법정 관리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든 루머가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405명의 팀원으로 구성된 포스인디아는 11시즌째 F1에서 활약하며, 최근 몇 년 동안 ‘독립 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과시하며 좋은 성적을 이어가던 팀이었습니다. 2008년 처음 ‘포스인디아’의 이름으로 F1에 뛰어들었을 때 10개 팀 중 10위를 차지했었지만, 매년 조금씩 꾸준히 순위를 끌어올려 지난 2016시즌과 지난해 2017시즌에는 막강한 전력의 대형팀 메르세데스, 페라리, 레드불의 뒤를 잇는 4위 자리를 2년 연속으로 차지했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팀 규모에 비해 좋은 성적을 거뒀던 포스인디아 역시 다른 독립 팀 모두가 겪고 있는 재정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채권자들로부터의 압박은 몇 년 동안 팀의 발목을 잡아 왔습니다. 몇 년 전 팀의 창립자 중 하나이고 한동안 팀 수석 역할도 맡아 팀을 이끌었던 비제이 말리야가 모국 인도에서 수배자 신세가 된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우량 기업처럼 매출을 늘리며 승승장구하던 중소기업이 물밑에 있어 잘 드러나지 않던 재정 문제 때문에 한순간 몰락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었습니다.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팀의 존속이 불분명해진 뒤 이어진 사건의 전개는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것이긴 했지만’ 일부 팬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었습니다. 포스인디아의 여러 채권자가 팀 인수를 희망하는 여러 세력과 접촉하며 팀과 많은 팀원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결국 가장 좋은 조건으로 팀을 인수한 것은 캐나다의 기업가 로렌스 스트롤이 이끄는 컨소시엄이었습니다.

    팀이 위기에서 극적으로 탈출하고 405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지키게 됐다는 것만큼은 기분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로렌스 스트롤이 누구인가, 그리고 왜 F1 독립 팀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포스인디아 인수에 앞장선 랜스 스트롤의 아버지 로렌스 스트롤

    캐나다의 기업가이자 북미에서도 손꼽히는 재벌 중 한 명인 로렌스 스트롤은 지난해 윌리암스를 통해 F1에 데뷔한 랜스 스트롤의 아버지입니다. 이른바 ‘금수저’가 넘쳐나는 F1 무대에서도 랜스 스트롤은 다른 금수저 드라이버들을 보잘것없어 보이게 만드는 ‘다이아몬드 수저’ 드라이버랄 수 있습니다. 최근 성적이 좋지 않은 윌리암스에서 포스인디아처럼 성적이 좋은 팀으로 이적을 생각하던 랜스 스트롤은 아버지가 이끄는 컨소시엄의 포스인디아 인수로 다양한 선택의 폭이 생겼습니다. 마치“아빠, F1 팀 하나 사주세요.”라는 부탁에 정말로 아버지가 F1 팀을 인수하는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난 셈입니다.

    많은 사람이 F1은 극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스포츠라고 종종 이야기하지만, 이처럼 압도적인 돈의 위력을 보게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접근을 한 것이 랜스 스트롤 한 명이 아니란 점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어린 드라이버인 니키타 마제핀의 아버지 역시 포스인디아 인수 경쟁에 뛰어들었고, 로렌스 스트롤의 컨소시엄이 채권자들과 합의를 끌어낸 이후에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팀을 인수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그나마, 랜스 스트롤 쪽이 포스인디아 인수 경쟁에서 앞서 있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마제핀에 비하면 스트롤의 실력과 성적이 모두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큰돈을 배경으로 가진 어린 드라이버가 F1 팀을 아버지의 힘으로 손에 넣고 그 드라이버가 되는 비현실적인 일이 실현될 가능성이 커졌고 이쯤 되면 일본 애니메이션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에 등장하는 ‘란돌’이란 가공의 금수저 캐릭터가 떠오릅니다. 1990년대에 만들어진 미래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에서 2001년생인 란돌은 “2018년” 주인공 유니언 세이비어를 인수하고 직접 드라이버로 활약합니다.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가 마무리된 1998년 태어난 랜스 스트롤은 마침 2018년 포스인디아를 인수하고 그 팀의 드라이버가 될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지간한 대기업도 손대기 힘든 F1 팀 인수에 나서는 재벌 아버지를 둔 어린 드라이버들의 모습은 이상적인 자본주의의 신봉자들이 얘기하는 ‘재능과 노력으로 하나하나 계단을 올라가는’ 개념의 허상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F1 드라이버가 되기 위해 어린 시절 집도 팔고 캠핑카에 의지해 집시처럼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스폰서를 구걸하던 꿈나무들의 허탈감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결정하도록 내버려 둔 세계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주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뿐이란 것을 절실히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405명의 포스인디아 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법정 관리를 신청했던 세르히오 페레스

    그렇다면, 이번 사건에서 405명의 팀원이 한순간 실업자가 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페레스의 노력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물론, 그나마 많은 노동자의 일자리를 지켜냈으니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동료들을 구한 것도 좋은 일이고, F1 팀의 미캐닉들 중에는 나이가 제법 많거나 그리 많지 않은 수입에 어렵게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도 있으니 팀이 위기를 벗어난 것은 다행이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앞으로 특별히 더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작금의 상황을 가볍게 웃으면서 바라보기는 어렵습니다. 많은 노동자가 일하던 대기업에 재정 위기가 닥치고, 채권자들의 압박이 이어진 끝에 어디선가 나타난 대자본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만, 자본은 사람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불러오고 오래도록 많은 이들이 그 고통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우리는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압도적인 돈에 맡겨진 것이라면 F1 팀의 운명 역시 장밋빛이라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그 수가 적건 많건 누군가 피해를 보게 될 상황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미 ‘합리적인 이유’로 팀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어 일부 포스인디아 팀원이 자리를 옮겼습니다. 무엇보다 세르히오 페레스의 팀메이트였던 에스테반 오콘의 자리도 위협받고 있습니다. 최소한 한 명의 ‘일자리’는 분명히 위협받고 있습니다.

    촉망받는 드라이버였고 재능과 실력을 겸비해 좋은 커리어를 막 쌓기 시작한 젊은 드라이버 오콘은, 랜스 스트롤이 포스인디아로 이적할 경우 시트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콘에겐 스트롤과 같은 강력한 배경이 없고 부단한 노력으로 자기 실력을 입증하며 어렵게 F1 시트를 차지한 뒤 계속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미래를 기대하게 했는데, 하루아침에 F1 드라이버의 경력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오콘의 재능이 어떠했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든, 팬들에게 어떻게 사랑받았든, 감정이 없는 돈과 자본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좋든 싫든 ‘보통 사람들’에겐 지금 당장 이런 압도적인 돈의 침략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콘 역시 다른 일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현재 접촉 중인 다른 팀의 시트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게다가 일부에서 들려오는 루머처럼 오콘이 다른 팀에서 드라이버 자리를 얻어낸다면, 또 다른 재능있는 드라이버가 F1에서 아예 퇴출당할 수도 있습니다. 드라이버 사이에 마치 노-노 갈등과 같은 상황이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이런 갈등에서 희생되는 드라이버는 누가 됐든 든든한 자본을 배경에 깔고 있지 않은 드라이버뿐입니다.

    포스인디아의 위기와 랜스 스트롤의 아버지 로렌스 스트롤이 주도한 팀의 인수는 다시 한 번 돈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씁쓸함을 곱씹게 했습니다. 심지어 ‘순수한 자본주의적 스포츠’를 지지하던 사람들조차 스트롤 부자의 행보에 우려의 뜻을 표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당장은 이런 흐름을 막을 길 없다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이곳에도 혁명이 필요한 것일까요? 과연 혁명은 이런 거대한 흐름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아직은 그 질문에 대한 희미한 해답조차 구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랜스 스트롤은 아버지 로랜스 스트롤이 이끄는 컨소시엄이 포스인디아 인수에 합의한 지 한 달 만에, 현 소속팀 윌리암스보다 최근 성적이 훨씬 좋았던 포스인디아의 ‘시트 피팅’, 즉 자신에게 꼭 맞는 F1 드라이버 시트 제작을 위한 필수 사전 작업을 진행한다고 알려졌습니다. 며칠 뒤면 좋든 싫든 포스인디아 소속 F1 드라이버 랜스 스트롤의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필자소개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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