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람하는 말
    [노동·문예 노트] 시와 시적인 것의 동시대성에 대한 비평적 전망 (2)
        2018년 08월 27일 12:59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 글은 필자가 『시와 반시』 105호, 2018년 가을호에 발표하는 글이다. 필자와 매체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감사하다. <편집자>
    ————————–

    * 알레테이아의 총구 : 시와 시적인 것의 동시대성에 대한 비평적 전망(1) 링크

    법의 결여: 법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시와 시적인 것의 동시대성에 대한 비평적 전망, 두 번째 시간이다. 아주 거창한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지만, 사실 이 평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시’가 필요한 것인가, 만약 그러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매우 현실적인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을 근현대 문예양식 중 하나인 시의 실체와 역사적 변천 과정을 탐구하는 것으로 해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강단비평에서 강조하는 언어예술의 한 장르이자 국문학 분과학문으로서의 시에 대한 연구와 기술은, 이 글의 방향이나 내용과는 무관하다. 현대시의 가치는 시의 속성과 범주를 어긋내는 지점에서 창조적으로 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로는, 이게 시인지, 아닌지도 판단하기 모호한 경우가 없지 않지만, 각자의 마음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 불확실한 파토스와 욕망은 종종 ‘시적인 것’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시적인 것이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적인 것의 애매함을 문학적 속성(ambiguity)으로 기법화한 문예비평사조가 있을 정도이니, 시와 시적인 것을 분별하는 것은 녹록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지난 호 「알레테이아의 총구」에서 다룬 것과 같이―, 시적인 것이 탈규범적이며 탈은폐적이기 때문에 지배질서의 의사소통 구조나 규율체계 속에서는 개시 불가능한 목소리를 발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적인 것이 사회제도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삶을 존속시키는 생활양식(life style)의 토대가 되는 가치, 규범, 규칙 등을 상징체계라 부른다. 상징체계는 인종, 민족, 문화, 지역, 환경, 성별 등의 특수한 조건에 의해 달라지기도 하지만,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도 담고 있다. 조금 범박하게 정리하자면, 이러한 상징체계가 가장 섬세하게 제도화된 형태를 우리는 ‘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법은 인간의 일상생활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유지하는 최소한의 준거이자, 사회적 정의와 양심의 척도가 된다.

    그러나 법의 권능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달리, 법은 종종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법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몰지각한 방식으로 남용될 수 있는지, 또 신성에서 벗어난 인간의 법적 권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역사적 경험 속에서 목격해 왔다는 뜻이다. 굳이, 근자의 사법농단 사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법의 결여는 얼마든지 현시할 수 있다.

    법의 무지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정신분석 저널 『엄브라: 법은 아무 것도 모른다』(인간사랑, 2008)에서 이미 논의된 바 있는데, 이 매거진에는 에띠엔느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등과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의 교차적 시선이 담겨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엄브라』에서 다루고 있는 법이라는 형식은 ‘정의’나 ‘윤리’를 구현하는 완전한 상징체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법은 정의나 진실 규명의 모델로서 일정한 ‘결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법 체계로는 취약한 삶의 조건과 문화적 다양성을 모두 수호할 수 없으며, 이 경우 법의 공적 가치는 (법리적 해석이나 판단과 무관하게) 윤리적 무능에 빠진다. 시 혹은 시적인 것은, 이와 같은 법적 결여를 폭로하는데, 이를 잘 설명하고 있는 사상가가 마사 누스바움이다. 법 이론과 법 체제의 현실적 한계에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현상이 시적인 사유라는 점은 매우 이채롭다.

    시적 정의경제적 공리주의를 기각하는 힘

    마사 누스바움은 한국에서도 『시적 정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역량의 창조』, 『혐오와 수치심』 등의 책으로 주목받은 바 있는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이다. 그녀는 독특하게도 법학과 문학/윤리학을 함께 가르치고 있으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역량’이 인종, 민족, 국가, 젠더 등과 같은 차이와 관계없이 확보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누스바움의 역량중심접근법은 인간 행복의 가치를 경제적 수치만으로 평가해 오던 경제중심접근법에 도전하면서―이는 서구 공리주의의 사회제도적 산물로, 인간 삶의 가치를 경제적 효용 척도로 획일화하여 표준화시키는 장치인데 그녀는 여기에 저항하면서―, 개개인에게 부여되어 있는 삶의 질적 차이를 섬세하고 다원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러한 역량중심접근법의 토대가 되는 것이 시적인 감성과 사유, 즉 문학이다. 그녀는 『시적 정의』에서 “문학은 인간 삶의 복잡성을 ‘도표 형식’으로 나타내고자 애쓰면서 모든 것을 아우르고자 하는 기획인 정치경제학의 적”이기 때문에, 문학이 “집 안에 들어오면 정치경제학은 위험에 빠”(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옮김, 『시적 정의』, 궁리, 2013, 26-27쪽)지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허나,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는 시의 본질과 기능을 다루는 저작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문예장르로서의 ‘시’에 대한 이해를 돋우고자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에서 서사적 상상력, 혹은 소설로 대표되는 서사 장르의 특징을 더욱 상세하게 짚고 있다. 특히, 웨인 부스의 『소설의 윤리』에 기반하여, 소설이 “다른 장르에 비해 환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제학적 방식에 철저히 반대하며, 질적인 차이들에 더 주목”(『시적 정의』, 83쪽)하고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녀가 ‘시적 정의’를 논하면서, 전통적인 극시나 서정시가 아닌 소설에 주목하는 까닭은, 소설이 서사적 상상력을 통해 공적 문제를 입안하는 ‘공동 추론’의 형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서사적 상상력은 인간 행동을 모델화하는 기술적인 방법, 앞에서 말한 경제적 공리주의를 보완하는 대안적 형식이 된다. 왜냐하면 소설 역시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있는, 법이 추구하는 공적 합리성(public rationality)을 구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정의를 논하면서 시가 아니라 소설에 주목하고 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시적인 것은 꼭 시라는 예술장르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사 누스바움은 왜 법과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경제적 공리주의를 비판하는가? 그것은 법 체제와 경제적 공리주의가 공모관계, 혹은 공생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통치 질서 속에서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그 어느 자리에서도 ‘경제적 공리주의’의 사유 방식이 승리한다는 것. 이 과정에서 국적, 종교, 인종, 젠더, 계급 등의 차이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논리 아래 언제나 패배하게 되며, 나와 다른 타자의 소수적 선택/상황은 ‘사적 선택’으로 치부되거나 ‘공적 가치(및 추론)’에 어긋난 것으로 폄훼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법과 경제적 공리주의는 한 몸을 이룬다. 그렇다면, 법-경제적 공리주의의 공모/공생관계는 무엇으로 기각될 수 있을까. 누스바움은 그것을 “시인-재판관”(『시적 정의』, 174쪽)에서 찾는다. 시인-재판관은 법률적이고 사법적인 판단 능력만을 갖춘 이가 아니라, 비가시적이며 약한 존재까지도 감각할 수 있는 공감의 심판자이다.

    이 나라의 시인은 한결 같은 인간이다,
    그 안에 있지 않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물들은 괴상하거나 과도해지거나 온전치 않게 된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나 특성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비율을 부여한다.
    그는 다양성의 중재자이며, 열쇠다,
    그는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성을 맞추는 자이다……
    부정의 길로 엇나간 세월을 그는 확고한 믿음으로 억제한다.
    그는 논쟁자가 아니다, 그는 심판이다. (자연은 그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재판관이 재판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한다……
    그는 남자들과 여자들 안에서 영원을 보며, 남자들과 여자들을 꿈이나 점으로 보지 않는다.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옮김, 『시적 정의』(궁리, 2013)

    그녀는 월트 휘트먼의 시를 경유하면서, 법학적 지식과 논리적 추론 능력만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까지 겸비한 재판관을 ‘시인-재판관’이라 부른다. 법적 판단에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까닭은, 공리주의적 사유에 입각한 사고/행위에 의문을 제기하며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학적 상상이 인간과 세계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킨다. 이는 눈에 보이는 ‘사실/결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팩트의 이면을 투사하는 ‘진리(동기)’의 발견 과정이다.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갖는 동기와 선택을 이해하는 동감의 상상력(sympathetic imagination)”을 촉진하며, 이것은 “그들의 동기와 선택을 이해하고, 그들이 위협적인 외부인이나 타자가 아니라, 우리와 많은 문제점과 가능성을 공유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마사 누스바움, 황은덕 옮김, 「민주 시민과 서사적 상상력」, 『오늘의 문예비평』 79호, 2010, 25-26쪽)게 해준다.

    그러니 문학적 상상력은 비합리적 감상주의가 아니라, 한 인간을 공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공적 상상력(public imagination)과 다르지 않다. 위에서 인용한 휘트먼의 문장(“재판관이 재판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한다”)에서 알 수 있듯, 시적인 재판이란 인간, 자연, 사물 등의 취약한 부분까지 골고루 온기를 전하는 햇살과 같은 것이다. 공정성과 따뜻함을 함께 고려하는 이런 태도는 “사법적 중립성”이라는 이상과도 통한다. 그런 점에서, 누스바움의 시인-재판관 개념은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사유를 넘어 특정 사건에 내재해 있는 역사성과 인간적인 복합성을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여유를 갖춘 “다양성의 중재자”와 같다. 그렇다면 시적 심판은 우리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추방된 존재를 발견하고 감지할 줄 아는 판결 과정을 의미하며, 이러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중재자를 ‘시인-재판관’이라 부르는 것이다.

    시적 심판의 구체적인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시적 정의』 4장에서 미국의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 있듯이―, 누스바움은 법이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법이 이해하거나 포용할 수 없는 취약한 부분까지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를 ‘시적 정의’라고 부르며, 시와 소설 등과 같은 문학의 지평 속에 그것은 여전한 가능태로 잔존하고 있다.

    시적 실천: 시적인 것의 진주와 시적 심판의 가능성

    법의 결여를 메울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은 시적 정의를 구현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는 법의 무능을 대리 보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진주한다. 인간적 존엄과 문화적 다양성이 몰락한 현대사회에서도 시와 소설과 같은 문학이 여전히 유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이 사회제도적 정의를 실현하는 공적 추론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공동체의 정의 구현과 진실 규명이 법적 체계 속에서 실현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시적 정의를 더욱 갈망한다.

    정신분석 미디어 『엄브라: 법은 아무 것도 모른다』의 공저자인 스티븐 밀러는 그래서 “법의 개념을 탐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법 이론 자체보다는 시민불복종의 실천(praxis)들”(스티븐 밀러, 「법 이론의 한계에 선 라깡: 법, 욕망, 최고 폭력」, 에띠엔느 발리바르 외, 강수영 옮김, 『법은 아무 것도 모른다』, 인간사랑, 2008, 153쪽)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작금의 촛불 혁명, 미투 혁명, 적폐청산 운동 등은 이를 방증하는 사회문화적 증례라 하겠다. 그러나 국정을 농단하고 시민이 부여한 공적 권력을 사유화한 위정자(들)에게 법적, 윤리적 책임을 묻고 그 절차를 집행하는 이는 각급 법원의 직업 판사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시인-재판관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세계를 폭넓게 이해하고 소수적인 삶의 존재/자리까지 판독하고자 하는) 법적 재판관을 지칭하지만, 더불어 직업 시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성의 상실과 세계의 불평등을 감각함으로써, 사회적 균형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존재가 시인-재판관인 것처럼, 시인은 공적인 삶의 형평성을 복원하기 위해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자이다. 전자를 ‘시인으로서의 재판관’, 후자를 ‘재판관으로서의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데, 이 장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재판관으로서의 시인이다.

    시인은 부도덕한 권력의 위선적 형태를 시적으로 타격하는 동시에,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을 발굴하여 사회적 균형을 회복시키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은 법률적, 제도적 논쟁이 아니라 문학적 재판을 주관하며, 또 속기한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적폐를 까발리며 시적 투쟁에 나섰던 기록(들)을 증좌로 제시할 수 있는데,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에서 엮고 푸른사상에서 출판한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 『촛불은 시작이다』(2017), 『꽃으로 돌아오라』(2017), 『길은 어느새 광화문』(2017), 『철탑에 집을 지은 새』(2018) 등이 그것이다. 시 텍스트 하나하나를 따져 읽을 수는 없지만, 이들 시에는 국정농단/사법농단/입법농단 세력에 의해 파괴된 헌정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법 정립적 의지가 응축되어 있다.

    이 앤솔로지는 현실 비판적인 시의 소재적 총합이 아니라,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권력에 도덕적 책임을 묻는 시적 판결이자 속기이다. 광장은 이른바 문학적 법정이다. 법원에서는 무죄일 수 있으나, 광장에서만큼은 유죄이다. 광장을 밝힌 수많은 촛불의 열망이 시적 정의란 무엇인지 실증하고 있지 않은가. 촛불혁명은 부도덕한 권력과 법의 무능을 동시에 심문하는 시적 심판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는 시가 현실정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시가 프로파간다의 스피커가 되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그리고 법적 정의가 아니라, 시적 정의를 정초하는 문학적 판결이 반드시 ‘시―문학’만으로 표현/성립되는 것 역시 아니다.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사상가도 언어예술로서의 시는 현실참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진 않은가.

    시가 산문과 똑같은 방법으로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시는 전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오히려 시는 말에 「봉사한다」고 하고 싶다. 시인들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도구로 여기고 있는 언어 활동 속에서, 그리고 그 언어 활동을 통해서 진리탐구가 진행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인들이 진실을 가려낸다거나 또는 그것을 진술하기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중략) 그저 「말하는 사람」은 언어 활동에서 상황 속에 있는 것으로 이를테면 말에 포위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 언어 활동은 그의 감각의 연장이어서 핀셋이며, 안테나며, 안경 따위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그 속에서 조종하며 그 자신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느낀다. 그는 거의 의식하지 않는 언어체에 둘러싸이고, 그 「언어체」가 그 행동을 외부세계 위에 전개한다. 이에 반하여 시인은 언어 밖에 있는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김붕구 옮김, 『문학이란 무엇인가』(문예출판사, 1996)

    이제는 고전이 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시와 산문의 언어 사용 방식은 무척 다르다. 아니, 심지어 시는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한다. 이는 시가 언어 사용과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라, 시는 언어를 재현의 도구로 삼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대상을 기호(의미)화하여 해독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산문과는 구분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시는 사물이며, 산문은 도구이다.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며, 산문가는 말하는 사람이다. 사르트르가 문학을 사물과 도구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언어철학과 무관치 않다. 허나 중요한 것은, 사르트르 문학론의 사상적 계보가 아니라 시의 현실참여 (불)가능성 여부이다. 정말로, 문학적 정의를 구현하는 시의 사회참여는 불가능한가.

    사르트르 역시 시가 세계의 부조리한 양상과 은폐된 진실을 탐구하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시 말해, 시의 사회적 효용은 그 자체로는 목적성이 없다는 것. 그의 말처럼, 시적인 것은 비지시적인 언표행위가 분명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는 외부세계를 직접 지시하고 재현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지배질서의 속악한 언술체계와 철저하게 결별할 수 있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그리 중요치 않다. 시는 사물/기호의 관계를 의도나 목적에 따라 지시/연결하지 않기 때문에, 타락한 세계의 언어를 입안하지 않은 채 윤리적인 언어를 공식화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껏 개진되지 못했던 사물의 모습과 세계의 진실을 개방할 수 있다.

    실은 사르트르도 “아프리카 시인들에 주목하는 과정”에서 시의 현실참여 불가능성을 “수정”(변광배,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다시 읽기』, 세창미디어, 2016, 145쪽)하기도 한다. 시는 음악이나 회화처럼 의미화 양식이 아니다. 그래서 세계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시의 몫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역으로 시는 산문처럼 세속적 언어에 포위당해 있지 않기 때문에―하이데거가 시 지음을 세상에서 가장 순진무구한 일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의 포위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잠재되어 있다.

    우리가 현대시에서 ‘시적인 것’, 혹은 ‘시적 심판’의 가능성을 발아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의 언어는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 또 어떤 정파적 이해관계와도 결탁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한 시의 사회참여 불가능성은, 어쩌면 시적인 것의 진주를 통해 사회적 정의에 이를 수 있는 역설적인 참여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광장의 점거와 시(詩), 두 봉기 방식은 모두 법의 무능과 결여를 메울 수 있는 시적 정의의 실천 방식이라 하겠다.

    시적 범람: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법의 임계를 범람하는 시의 역능

    자, 조금 더 이야기를 밀고 나가보자. 전국의 광장을 밝힌 촛불과 시의 판결에서 보듯, 시적인 것의 봉기는 법의 임계를 범람하여 난폭하게 들이닥치는 행위/언어이다. 그러나 시적 심판은 시민불복종운동이나 정치적인 시에서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양심의 마지노선인 법 체제가 무능 상태에 빠질 때 운동 혹은 시라는 파도로 융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핵심은 ‘운동’이나 ‘예술로서의 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시적인 범람을 통해 정의와 진실에 이르는 윤리적 여정 자체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다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로 돌아가자. 그는 이 책의 서문 격에 해당하는 첫 장에서, “당신이 자신을 스스로 구속하고 싶다면 어째서 바로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습니까?”라는 도발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이 문장은 문학의 현실참여에 대한 가능성과 한계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구속하다’로 번역된 원문 어휘가 그 유명한 ‘앙가주(engager)’이다. ‘구속하다’보다는 대부분 ‘(사회)참여’로 번역되는 원어 ‘engager’의 어색한 직역은, 이상하게도 문학의 현실참여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상상하게 한다.

    우리는 자신이 저항하고자 하는 세계 속에 “구속”될 때에만 자유로운 존재로서 미래 세계를 향한 기투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실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늘 세계 내 ‘자기 구속’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기 구속(engager)은 사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주체를 던지는 사회참여의 본래적 형식이다.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세계로부터 이탈하거나 초월하는 것이 아닌 자기 구속, 그것이야말로 사회적 참여의 시발점인 셈이다. 이것이 ‘운동’과 ‘문학’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핵심 문장(“당신이 자신을 스스로 구속하고 싶다면 어째서 바로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습니까?”)을 다시 읽어보면, 자기 구속(혹은 사회적 참여) 상황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운동’(공산당 가입)과 ‘다른 무엇’인데, 그 중 하나가 문학인 셈이다.

    사르트르는 시와 산문을 분별함으로써, 목적성과 유용성이 없는 시를 사회참여 형식에서 제외하고자 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도 얼마든지 공적인 발화나 현실참여가 가능하다. 개개의 작품을 꼽고 따지자면,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벅찰 지경이다. 최근에 간행된 작품집 중에서, 법적 결여와 시적 정의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을 예로 들어 본다.

    어김없이 아침 해로 다시 밝아오는데
    애기섬 형제섬, 흰여가 붉여가 됐다고
    발목 묶은 철사 줄에 돌멍까지 채워서
    여수 바다 어디쯤에다 수장을 했다드라고,
    뜬소문만 수군수군 떠밀려 오드라고,
    동짓달 열하루 생월 생신날
    옥양목 두 필에 쌀 한 동이 다 쓰고
    큰 동네 명두무당이 겨우 건져 올린
    부석처럼 떠다니던 육 척 장신 건장한 넋을
    당신 쓰던 밥그릇에 고봉으로 담아서
    가장골 옹사리밭에 고이 모셔드렸다고,
    아비 잃고 덧씌워진 빨갱이 호적부엔
    억새꽃만 이듬 이듬 피고 지드라고,
    연좌넝쿨 칭칭한 피울음 한마디
    “나서지 마라! 나서지 마라!”
    어미 등 굽은 낫질에
    올해도 가시넝쿨 눈물다발로 걷힌다.

      김진수, 「헛 장」 부분(『좌광우도』, 실천문학사, 2018)

    김진수 시인의 『좌광우도』 1부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여수순천사건’을 다루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헛 장」을 비롯하여 ‘여순시편’이라 부를 수 있는 열다섯 편의 시 텍스트는 국민국가의 법적 임계를 초과하며 은폐된 생(history)의 목소리를 복구하고 있다. 여타의 국가폭력 사건이 진실규명 노력과 희생자 위령사업을 더디게라도 전개하고 있는 것에 비해, 여순사건은 거의 언급조차 되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1948년 10월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제주도 파병 반대 봉기가 군법 논리에 의해 ‘반란’으로 규정되었으며, 이후 탄생한 “국가보안법”에 의해 “내란죄”(김진수, 「뜨거운 항쟁」)의 적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좌광우도』에 대한 상세한 리뷰는 다른 지면에서 이미 다룬 바 있기 때문에 대략하겠지만(「연좌의 사슬을 끊는 시의 절규」, 『오늘의 문예비평』 109호, 2018년 여름호), 김진수 시인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쉬 넘길 수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법적 체계에 근거해 ‘반란/내란’으로 규정되면서도, 수많은 봉기 참여자와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학살은 규명하지 못하는 법적 무능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여순사건은 그래서 법적 해명과 진상 규명보다는 언제나 소문의 형식(“여수 바다 어디쯤에다 수장을 했다드라고”, “뜬소문만 수군수군 떠밀려 오드라고”)으로 발화될 수밖에 없다.

    시가 추문의 형식으로 지배질서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는 공적 의사소통의 무기로 기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가 조형하는 “사악”(로버트 단턴, 김지혜 옮김, 『시인을 체포하라』, 문학과지성사, 2013, 31쪽)한 추문은 위정자와 자본가에게는 늘 위협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이야기가 생성되고 전파되는 광장은 시적인 토포스(topos)와 다르지 않다. 국민국가의 법적 시스템과 권력 구조 속에서는 발화되거나 용인될 수 없는 것, 혹은 제도화된 사회적 의사소통망 속에서는 감히 말해질 수 없는 말(들)이 범람하고 물결치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소문은 사실과 거짓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종종 ‘시적인 진실’을 부상시키기도 한다. 「헛 장」을 비롯한 열다섯 편의 시가 빛나는 수사학적 전략이나 날랜 언어 감각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님에도, 우리에게 깊은 시적 울림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인의 여순시편은 날것 그대로의 거친 발문을 보여준다. 사실, 시적 언어로서는 정제되지 못한 부분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들 시편에는 수사적 상투성이라는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공적 추론/담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여순사건’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들)의 산문적 호흡에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가 참여문학의 형식이라 규정했던 산문에 가까운 것이며, 또 누스바움이 서사적 상상력을 담고 있다고 했던 공적인 시와도 다르지 않다. 사르트르는 시의 본령을 랭보나 말레르메 등과 같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서 찾았기 때문에, 산문적인 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니체가 시적인 산문이 있을 수 있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산문적인 시 역시 얼마든지 성립 가능하다. 시적인 것은 장르적 경계를 허물며 범람한다. 시적인 것의 탈규범성은 그래서 탈은페적이다.

    정리하자면,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는 문학이 공적인 가치가 아니라 매우 사적인 감정의 영역이라는 것에 대한 반박이다. 문학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취약한 삶/곳까지 조망할 수 있는 공적 담화 양식이며, 또 그것은 법의 결여를 메울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이다. 물론 그녀의 이론적 실천은 매우 낙관적이며 리버럴하기 때문에 치열한 투쟁의 방식까지 제시하지는 못한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겹쳐 읽으며, 실제 문학의 사회참여 가능성을 모색해 본 것은 그 때문이다. 정말로, 법의 무능을 심판할 수 있는 시적 정의는 가능한 것일까. 문학도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다’이다. 그 순간이 언제이든, 시적인 것의 파고(波高)는 부당한 현실의 장벽보다 높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문학평론가,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