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라고 꼭 대중적 인기가 없으라는 법은 없다
        2006년 05월 08일 10: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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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ic Street Preachers
    "The Holy Bible"
    1994년 발표
    .

    1. Yes
    2. Ifwhiteamericatoldthetruthfor-
    oneday
    it’sworldwouldfallapart
    3. Of Walking Abortion
    4. She Is Suffering
    5. Archives Of Pain
    6. Revol
    7. 4st 7lb
    8. Mausoleum
    9. Faster
    10. This Is Yesterday
    11. Die In The Summertime
    12. The Intense Humming Of Evil
    13. P.C.P.

     

    너무 오래된 음악들만 소개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너댓번 밖에 연재를 안하긴 했지만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최근 반세계화운동을 통해 급진적인 운동이 부활하고 있다고 하지만 서구건, 중남미건 좌파 운동의 정점은 역시 60~70년대였다. 80년대 이후 저항적인 문화는 해체되거나, 주류 상업 문화와 타협하거나, 서브컬처의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다. ‘반역의 레코드’라고 부를 만한 성과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또한 인터넷 등의 발달로 정보의 확산이 빨라지면서 몇 몇 존재하는 좌익적 음악은 국내에도 리얼타임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Rage Against The Machine)’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래도 너무 지나간 시대의 추억에만 젖어있는 것은 고리타분해 보이니까 이번에는 90년대 음반을 골랐다.

    * * *

    ‘매닉 스트리트 프리쳐스(Manic Street Preachers)’는 9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밴드들 중 하나다. 웨일스 출신으로 80년대 영국을 휩쓴 광부파업의 와중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밴드는 매우 강한 사회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밴드가 직접적인 정치활동을 하거나 공연장을 정치선동의 무대로 삼지는 않는다. 가사도 그들 선배 세대의 좌익 아티스트들이 슬로건에 가까운 가사를 선호했다면 이들은 보다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가사를 선호한다. 하긴 그런 교조적인 방식이 사람들에게 통할 시대도 아니긴 하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앨범을 낼 때마다 그 안에 사회과학 서적부터 현대문학까지 여러 종류의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귀들을 인용해 놓은 것이다. 자신들의 독서량을 자랑하기 위한 건지는 몰라도 밴드 멤버들이 정말 다양한 범주의 책들을 읽는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팬들 사이에서는 보통 ‘매닉스’라고 불리는 이 밴드는 강한 정치적 색깔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새 앨범이 나올 때는 각종 음악잡지의 표지를 장식한다.

    1992년 첫 앨범을 내면서 데뷔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2001년에는 쿠바의 칼 마르크스 극장에서 공연을 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때 카스트로를 직접 만나기도 했으며 쿠바에서 대중공연을 펼친 첫 번째 록밴드로 기록되기도 했다.

    영국 밴드들이 미국에서 인기가 없는 것은 뭐 특별한 일도 아니긴 하지만 매닉스는 그중에서도 유독 이상하리만치 미국인들에게 외면 받았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데뷔할 무렵부터 인기가 높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광범위한 팬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해도 앨범이 빠지지 않고 발매될 정도의 인기는 유지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국내 팬들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이 밴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 * *

    매닉스는 지금까지 모두 7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데뷔하고 14년 동안 7장이면 요즘 추세를 볼 때 꾸준한 활동을 한 셈이다. 이 중에서 1994년 발표한 3번째 앨범 <성경(The Holy Bible)>은 7장의 음반들 중 가장 정치적이고 또한 가장 적게 팔린 앨범이다.

    일단 ‘성경’이라는 제목부터가 무언가 삐딱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앨범 커버에 사용된 그림은 제니 새빌이라는 영국 현대미술가의 유명한 작품이다. 제목과 그림의 극단적인 부조화는 보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이런 종류의 불편함이 노리는 것은 낯설음을 통해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달콤한 환상에 빠지지 않고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든다는 건데 아마 이 시기에 밴드가 브레히트의 이론을 열심히 읽은 모양이다.

       
    ▲ 94년 무렵의 밴드. 구소련 육군과 해군의 군복이 이 시기 밴드의 상징이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앨범에 인쇄된 R자는 모두 러시아 키릴문자처럼 보이도록 뒤집혀있다. 앨범 커버 뒷면에 실린 밴드의 사진을 보면 모두 구소련 시절 붉은군대의 군복을 입고 있다. 부클릿 안에는 낫과 망치가 선명한 소련의 국가문장도 보인다.

    이쯤 되면 이 친구들이 혹시 사라진 소련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 찬 스탈린주의자들이 아닌가 생각이 들지만 그건 아니다. 앨범에 수록돼 있고 두 번째 싱글로 발매한 노래 ‘Revol’을 보면 레닌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역대 서기장들을 호명하며 비판하는 가사가 나온다. 이 노래에서 매닉스는 스탈린은 양성애자로, 흐루시초프는 나르시즘에 빠진 인간으로, 고르바초프는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외에도 체 게바라, 트로츠키 등이 호명당하면서 조롱당한다. 이 노래는 제목처럼 반역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품이 되어버린, 급진성을 거세당한 혁명의 아이콘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밴드가 입고 있는 소련의 군복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외에도 앨범에서 눈에 띄는 곡은 제목이 매우 긴 ‘Ifwhiteamericatoldthetruthforonedayit’sworldwouldfallapart’ 다. 해석하면 ‘만약 미국이 하루라도 진실을 말한다면 그날은 세상의 마지막 날이다’정도 쯤 될 것이다. 이는 미국의 첫 번째 반체제 코미디언이었던 레니 브루스가 한 말이다. 제목에서 쉽게 짐작 되듯이 미국의 위선과 세계에 위협이 되는 미국의 존재를 비난한 노래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매닉스는 ‘양키 고 홈’ 식의 직설적인 구호를 채용하지 않는다. 이 노래의 가사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십자말풀이를 연상시킬 만큼 난해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앨범 마지막에 수록된 ‘P.C.P’는 포르투갈 공산당의 약자가 아니라 경찰(PC)과 영국 보수당(CP)을 합쳐놓은 조합이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검열과 억압, 그리고 그것을 조장하는 권력에 대한 노래다. 1990년 영국에서는 인두세 폭동이 있었다. 인두세라니 매우 봉건시대스러운 말인데, 1690년이 아니라 1990년 대처 수상이 인두세를 도입하겠다고 했다가 영국에서 혁명에 가까운 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당시 경찰이 보여준 폭력성과 국가권력의 오만함이 4년 뒤 이 노래에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다른 수록곡들도 여성, 인종주의에 대한 혐오 등을 ‘매우 복잡한 가사 형태’로 담고 있다. 앨범이 발매된 후 극단적인 지지의 평론도 있었지만 앨범의 기반에 깔린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대한 비판도 강하게 대두됐다. 이에 상처를 받아서 그랬는지 밴드에서 가장 지적인 인물로 지목되던 리치 제임스 에드워즈가 앨범 발매 후 실종됐다. 셰익스피어에 대해 859쪽에 이르는 에세이를 쓰고 각종 기행을 일삼았던 그는 지금도 실종상태다.

    * * *

    매닉스는 지금도 연주와 녹음을 계속하고 있다. 더 이상 소련 군복을 입지는 않지만 여전히 멤버들은 강건한 사회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정치적 지향이 대중을 만나는데 장애가 되거나, 혹은 의식의 과잉으로 인해 음악을 사장시키지는 않는다.

    매닉스 뿐만 아니라 영국의 비슷비슷한 좌파 성향의 뮤지션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대중적 좌파 예술인들의 존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국이라고 해서 이런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에겐 거리를 메우는 정치적 좌파도 충분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대중적 좌파가 너무 없는 것이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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