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 장조림,
기억을 완성하는 방법
[밥하는 노동의 기록] 장소와 기억
    2018년 08월 23일 10:06 오전

Print Friendly

‘나는 동생이 태어나던 날을 기억한다’고 말하면 조금은 거짓말이다. 모든 것은 아니지만 동생이 태어나던 날 내가 먹었던 음식은 기억한다. 할머니와 함께 병실에 들어서니 엄마가 밥을 먹고 있었다. 지금은 간호사, 그 때는 간호원이었던 미스 권 언니가 나를 보더니 배가 고프겠다며 밥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언니는 이렇게 먹으면 맛있다며 달걀 장조림의 노른자와 양념장을 떠서 밥 위에 얹어주었다. 이 기억의 첫 장면은 흰 밥알 사이로 스며드는 간장 양념장이다. 언니는 밥을 살짝 비벼 먹여주었다. 나는 짭짤하고도 단 밥에 깜짝 놀랐다. 당시 세 살, 장조림도 안 먹어 본 나이는 아니었을 테니 짠 맛보다는 단 맛에 놀랐을 것이다. 나보다 22개월 어린 동생이 빨갛고도 까맸다는 것, 엄마의 병실은 온돌방이었고 그 날 내가 빨간색 신발을 신고 갔다는 건 좀 더 나중에 기억났다. 그래서 나는 그 달걀 장조림이 엄마의 첫 국밥상 반찬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의 기억이 처음부터 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달걀장조림에 비빈 밥이 첫 조각이고 나머지는 천천히 맞춰졌다. 엄마가 동생을 낳은 집 근처 산부인과는 소아과를 겸하고 있었기에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 때마다 그 날이 조금씩 기억났다.

어느 날부터인가 새로 기억나는 것이 없어 그게 끝이구나 했다. 꽤 어렸을 때니 한 장면의 모든 부분을 기억하는 것은 이것뿐이고 나머지는 부스러기라 어떤 색깔이나 분위기, 느낌 정도만 남아있다. 상당수의 기억은 동생이 태어나던 날이 아니라 진료를 받기 위해 들렀을 때의 기억이다. 간호사는 둘, 그 중의 한 명이 미스 권 언니, 벽에 걸려있던 공작 무늬의 태피스트리, 들어가면 오른쪽에 진료실, 그 옆에 접수대, 그 옆에 병실로 통하는 문, 그걸 열고 들어가서 달걀 장조림을 먹었지. 이 정도라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 병원이 거기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기억은 사진처럼 찍히지만 대부분의 기억은 퍼즐처럼 맞춰진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사람들은 그 날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서로 나누었다. 희생자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이름을 불렀고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들여다보았고 그들의 삶과 꿈을 읽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은 충분치 않다. 오고 가며 그 날을, 그들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의 기억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장소의 필요성은 세월호 사고를 지워버리고자 했던 자들이 단원고 기억 교실을 없애려 그토록 애썼던 것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올해 4월 안산 화랑 유원지에서는 세월호 4주기 추도식이 있었다. 추도식이 끝나면 분향소를 철거한다기에 촛불 정부라고 다를 것도 없다 싶어 가고 싶지 않았으나 딸이 원해 다녀왔다. 국무총리와 안산 시장은 그 자리에서 이번 철거는 일시적인 것이며 반드시 추모 공원을 짓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라는 말이 거듭될수록 추모 공원이 한 걸음씩 내게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추도식장 옆 아파트에는 ‘세월호 납골당 설치 결사 반대’ 현수막이 걸렸고 일부 시민들은 추모 공원 조성을 놓고 세월호 사고로 우울감이 높아져 안산시 인구가 줄고 자살사고가 증가하고 있다며 추모 공원 조성을 반대했으며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도 집 마당에는 안 묻는다며 추모공원 조성 불가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도 있었다. 기억의 장소를 반대하는 것은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 어떤 말을 내세운대도 의미는 같다.

고릿적부터 사람들이 고인돌을 세우고 사원을 올리고 탑을 쌓았던 이유, 지금도 박물관을 짓고 기념관을 짓고 동상을 세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장소가 없는 기억은 힘이 없다. 철썩 같았던 그 날의 공언(公言)은 4개월이 다 되도록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공언(空言)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