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년 대가뭄에서 '븅자년 죽빵'까지!
[역사의 한 페이지] 1876년 병자년과 2018년 무술년
    2018년 08월 23일 09: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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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손기정과 그의 사인을 생각한다” 

1876년 병자년에 무슨 일이···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리나니
當春乃發生 봄이면 초목이 싹트고 자란다.
隨風潛入夜 봄비는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
潤物細無聲 가늘어 소리도 없이 만물을 적시네.
夜徑雲俱黑 들길도 구름도 모두 어두운 밤
江船火獨明 강가에 배만이 홀로 불 밝혔네.
曉看紅濕處 새벽녘 붉게 젖은 곳 보노라면
花重錦官城 금관성에 꽃이 활짝 피었으리니.

-두보, 春夜喜雨(춘야희우)

기다리던 봄비가 왔다. 두보는 반가운 비가 내리는 봄날 밤의 정경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그는 이 시를 통해 봄비만 노래한 것이 아니었다. 봄비를 맞아 꽃이 피었듯이 전란으로 인해 비구름이 드리운 암울한 현실도 곧 끝나고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표현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두보에게만 ‘좋은 비’(好雨)와 ‘기쁜 비’(喜雨)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1876년 병자년 조선에도 시절을 알고 내리는 좋은 비가 간절히 필요하였다.

고종 즉위 13년이 되는 1876년 병자년 그해 조선으로 돌아가 보자.

이해 2월 3일 일본의 강압으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었다. 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조약을 계기로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되었고, 세계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이 때 개항된 부산항을 통해 일본상인들은 영국산 옥양목(玉洋木)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옥처럼 하얀 서양 목면’이라는 뜻의 옥양목은 이후 조선의 의복생활에 일대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일본 상인들은 옥양목을 판 돈으로 조선의 쌀과 콩 등을 사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중계 무역의 이득을 취하게 된다.

[사진] 1876년 2월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그린 그림이다.(왼쪽) 개항 직후 부산의 모습을 그린 엽서이다.(오른쪽, 박건호 소장)

그런데 이 병자년 1876년은 우리에게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해’ 정도로만 기억되지만, 당시 민중들에게는 그것보다 하늘의 빗방울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해였다. 병자년 그해의 대가뭄은 비단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러시아, 남미 등 전 세계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 병자년 대가뭄에 이어 이듬해 정축년에는 전국적으로 역병과 이질이 창궐하여 들에는 곡물이 없어지고 마을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끊겨 1876∼77년의 조선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Hell 조선’ 그 자체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876년 4월부터 6월 말까지 수많은 기우제 기사가 나온다. 실록에 나오는 고종의 전교 내용 몇 구절을 읽어보면 당시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의 가뭄은 어째서 이렇게 심한가? 입하(立夏)가 이미 지났으나 비 올 기미는 갈수록 묘연하니 농사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고 근심스럽다. 하지(夏至) 전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것은 이미 시행한 전례가 많으니 첫 번째 기우제는 날을 받지 말고 공경스럽게 설행(設行)하라.” (고종 13년, 1876년 4월 14일)

“기우제(祈雨祭)를 이미 여덟 차례나 지냈으나 찬바람이 부니 심히 절기와 어긋나고 단비가 내리기는 아직도 묘연하다. 농사일과 백성들의 실정이 더욱 애타고 걱정스러워 비단 옷에 쌀밥을 먹어도 편안치 못하다. 사직단(社稷壇)에서 지낼 특별 기우제는 모레 대신(大臣)을 보내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설행하라. 향축(香祝)은 내가 직접 전하겠다.” (고종 13년, 1876년 5월 7일)

이런 여러 차례의 기우제 때문인지 윤 5월 20과 21일에 소량의 비가 왔으나 가뭄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고종은 다시 6월 3일 이 가뭄이 자신의 허물임을 자책하며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지금 이 가뭄이 어찌하여 이렇게도 다시 혹심한가? 지난번에 친히 기우제를 올려 한 차례 비가 오는 신령의 감응을 얻었으나 정성이 완전히 이르지 못하여 두루 흡족하지 못하였고 우리 민정의 다급함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스스로 돌이켜보면 부끄럽고 한탄스러우며 이어서 걱정스럽고 두렵다. 내가 듣건대 재앙은 까닭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초래한 연유가 있으니 그런 허물을 찾아본다면 어찌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우제를 이제 다시 거행하게 되었는데, 비가 올 때까지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수를 줄이며 음악을 중지하여 대략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조금이나마 펴고자 한다.” (고종 13년, 1876년 6월 3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1876년 6월 29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좋은 비’(好雨)가 내렸다. 7월 이후에 기우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꽤 많은 양이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날의 실록 기록은 무척이나 간략하다. 벅찬 감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긴 기다림 끝에 지쳤던 까닭일까.

“二十九日。 雨。
行報謝祭于宗廟、三角山、木覓山、漢江”
(29일 드디어 비가 내렸다. 감사하는 제사를 종묘, 삼각산, 목멱산(남산), 한강에서 지냈다.)

연초부터 시작된 기나긴 가뭄이 해갈되는 순간이었다. 병자호란으로 유명한 1636년 병자년 이후 대가뭄의 역사로 기록된 1876년 병자년, 우리 역사에서 병자년은 또 이렇게 아프고도 끔찍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븅자년에 죽빵을 날릴!

병자년 대가뭄은 얼마나 참혹했던지 새로운 속담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인데,

첫째가 “병자년 까마귀 빈 뒷간 들여다보듯”이라는 말로, 어떤 일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구차스럽게 여기저기 기웃거리거나 기다리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이 속담 하나에도 병자년 당시 절박한 민중의 애환이 녹아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병자년 방죽이다.”라는 말인데 ‘건방지다’를 달리 이르는 말로 쓰인다. 1876년 병자년 큰 가뭄으로 대부분의 방죽이 말라붙어 이를 ‘건(乾)방죽’이라고 하였는데, 그 발음이 ‘건방지다’와 비슷하여서 생긴 말이다. 보통 쓸 때는 “병자년 방죽이다” 또는 “병자년 방죽을 부리는군” 이렇게 쓰는 것이다. 혹자들은 아예 ‘건방죽’에서 ‘건방지다’라는 말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방죽은 원래 물을 가득 담고 있어야 하는데 마른 방죽이 되어버린 건방죽은 자기 역할을 전혀 못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나대는 사람을 ‘건방죽이다’라고 비꼬아 부르다가 발음이 변해 ‘건방지다’가 됐다는 설명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데 이 묻혀 있었던 “병자년 방죽을 부린다”는 이 옛 속담이 다시 현재로 소환된 계기가 있었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SBS 드리마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에서 도민준(김수현 분)이 천송이(전지현 분)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병자년 방죽을 부린다”는 대사를 하여 이 속담이 크게 화제가 된 것이다. 당시 천송이는 이 말을 욕으로 오해하여 “지금 나한테 ‘년’이라고 욕 한 거냐?”며 흥분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는 기존의 이 속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뒤튼 새로운 속담(혹은 욕)을 하나 더 보탰다.

“이런 븅자년에 죽빵(죽방)을 날릴..”

[사진] 2013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포스터(왼쪽), 드라마 내용 중 주인공 도민준이 말한 ‘병자년 방죽’이라는 속담이 큰 화제가 되고 있음을 보도한 2013년 인터넷기사 캡쳐 사진(오른쪽)

[별그대]의 한 장면이다.

# 만취한 송이, 민준의 집을 습격하는 장면
송이: (맞지도 않는 비밀번호를 여러 차례 눌렀으나 열리지 않자) 열려라. 참깨! 열려라, 참깨!(몇 번 주문을 왼 끝에 갑자기 문이 열린다) 헐∼ 쥔짜 열렸네! 히히히!
민준: 열렸겠지. 내가 열었으니까.
송이: 어∼ 조선 욕쟁이?
민준: 나 욕하고 그러는 사람 아니야.
송이: 욕쟁이! 왜 우리집에 있어?
민준: 당신 집이 아니라 내 집이니까.
송이: 내가 봤을 땐…넌 찌르면 퍼런 피가 나올 놈이야. 이런 자선냄비에 씹던 껌도 안 넣을 시끼!
민준: 이거 봐. 천송이씨.
송이: 왜? 너만 조선 욕하냐? 나도 한다! 이런∼ 븅자년에 죽빵을 날릴!
민준: 죽빵이 아니라 방죽!

“병자년에 죽빵을 날릴∼”이라는 속담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송이가 내뱉은 이 표현은 “병자년에 방죽을 부린다”라는 원래 속담을 천송이식으로 비틀어 욕으로 바꾼 대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욕을 따라 사용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속담 혹은 욕이 되는 것이다. 1876년 태어난 후 한참동안 죽어있던 속담이 2013년의 어떤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생명을 얻고, 또 그 속담은 욕처럼 변형되면서 계속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의 변화는 흥미롭고도 재미있다.

[사진] [별그대]에서 천송이가 “병자년에 죽빵을 날릴∼”이라는 말을 한 이후 대중들은 이 말의 기원과 무관하게 그냥 불만을 표출하는 욕처럼 이 말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더 줄여 “이런 븅자년(병자년)∼” 또는 “븅자년”으로 욕이 되는 것이다. (왼쪽,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originepure/140204380795) 그리고 오른쪽은 네이버 라인의 천송이 이모티콘 중 하나이다. “븅자년!”이라는 말로 불만을 표출하는 이모티콘이다.

애간장타는 한여름의 가뭄

그런데 내가 이 병자년에 대가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관심을 가졌던 계기는 [별그대]라는 드라마 때문이 아니었다. 그 보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수집한 한 점의 자료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수집한 자료는 병자년 대가뭄 당시 민중의 애타는 마음을 표현한 한글 가사 두루마리 1점이었다.

보통의 한글 가사는 부녀자들이 한글로 자신의 한과 애환을 표현한 것인데 경상도 쪽에서 이런 가사들이 많이 쓰였다. 시집살이의 고단함, 결혼해 시집으로 떠나는 딸에 대한 사랑, 친정에 대한 그리움 등등 주로 조선후기 부녀자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한글 가사인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한글 가사를 이미 많이 봐왔던 내게 매우 생소하고 특이한 한글 가사 한 점이 나타났다. ‘애간장타는 한여름의 가뭄’이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의 제일 끝에 병자년 4월 5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병자년 대가뭄의 내용이 궁금하여 검색하고 추적하다가 그 병자년이 1876년일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내가 자료 수집과 해석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이런 자료가 없었다면 1876년 그해는 ‘강화도조약 체결’로만 기억될 것이었다. 강화도조약도 물론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1876년의 조선에 강화도조약만 있었겠는가? 그렇게 역사가 단순하겠는가? 강화도조약에 가려진 수많은 역사가 또한 없었겠는가? 복잡한 민중들의 삶이 어떻게 ‘강화도조약’ 한 단어로 치환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수집한 이 한글가사 한 점은 강화도 조약으로 가려진 개항 당시 민중들의 삶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진] 병자년 대가뭄을 맞은 조선의 한 농민이 기우제 지내는 마음으로 쓴 한글 가사이다. (박건호 소장)

이 한글 가사의 크기는 가로 133cm, 세로 26.2cm로 긴 두루마리 형식으로 되어있다. 한지에 붓으로 쓴 필사본인데 작자는 누군지 알 수 없다. 보통 한글 가사는 여성들이 쓰는데, 가사 내용 중 며칠씩 우물 파는 노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남성이 화자인 것 같기도 하다.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가사에 “올해도 전 해같이 이어 한달토록 할 것인가?”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1875년에도 가뭄이 꽤나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사 중에는 물을 구하느라 며칠 우물을 팠으나 물이 나오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을 곳곳에서 표현하고 있다. 깊이 우물을 팠으나 땅속에서 땀나듯 적게 나옴을 한탄하기도 하고, 심지어 “차마 어이 백성들 타서 죽을 것 보시려하오”라며 하늘을 반(半)원망, 반(半)협박하기도 한다. 또한 며칠씩 우물을 파느라 지친 농민들의 모습을 “날마다 물웅덩이 파느라 출몰하는 오리같고 손이 터져서 거북등 되고 얼굴은 타서 까마귀 같구나”라며 자조하기도 한다.

화자는 글의 제일 마지막에서 고통스런 가뭄이 끝났을 다음 해의 여름에 대한 기쁜 상상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바라건대 하루 빨리 내년 여름 되어서 앞들의 요란한 개구리 소리 누워서 듣고 싶구나.”

이런 가련한 민초들에게 시절을 아는 좋은 비가 흠뻑 내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길지만 한글 가사 전문을 소개한다. 일부 해독이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애간장타는 한여름의 가뭄

저 구름에 비가 올까 이 구름에 비가 올까
억만창생 애타게 하늘만 바라보네
사방들판에 곡식 싹이 모두 타버려
붉은 땅이 되었고 날씨는 언제나
푸른 하늘 불볕만이 내려 쪼이네
밤새도록 부는 바람이 어찌 이리 사나울꼬
초조히 밤새워도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누나
빌고 빌고 또 비오니
하늘이시여! 이 백성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잠깐사이 흡히 비 내려 냇물 넘치게 하소서
오늘도 비가 오지 않으니 석 달이 지나도 어찌
비 한 방울을 내리지 않으니 어찌합니까?
차마 어이 백성들 타서 죽을 것 보시려 하오
사람이 어찌 어리석은가
서로 멍하니 쳐다만 보고 하늘이 버렸는지
다시 돌봄이 없네. 간혹 떠도는 구름은 모두가 흰 구름이요
멀리보이는 들에도 푸른 빛이란 볼 수가 없네.
농사꾼은 다투어 말하기를 저 서늘한 바람 때문이라네.
이제 알겠노라.
이 병자년의 가뭄을 나 천명을 원망 않으나 그러지 못함 근심하나니
일생동안 허물없는 백성들이라오.
심력을 다해같고(다해가지고) 눈뜰 사이 없었고,
해 다하도록 무거운 짐에 시달려온 몸이라오
천지간 생긴 이후 처음 맞은 이 가뭄
하늘땅 어느 곳에 태평세월 있는가?
세상의 기운과 운수 뉘라서 변하리오.
죽지 못할 때를 만남 한탄뿐이라오.
하늘이 내린 것 첫 애(?)는 새로움 없으니
한번 가뭄이 지루하게 몇 달이나 끄는가.
닷새 밤을 우물 파느라 눈을 감지 못했으나
심중 깊이 땅속에도 땀나듯 적게 나오니
올해도 전 해같이 이어 한달토록 할 것인가?
저 달에도 늦었는데 이달에야 더욱 더하지.
듣자니 옛날 태평시대엔 비 오고 개이고 차고 더움이
때에 알맞았다 하던데 날마다 물웅덩이 파느라
출몰하는 오리 같고 손이 터져서 거북등 되고
얼굴은 타서 까마귀 같구나.
땅 파느라 쥐락펴락하는 허리는 큰 벌레 같고
두레박줄 오르락내리락 거미줄 타는 것 같네
바람에 떨어진 잎사귀 귤빛 같아 누렇고
들판곡식 붉게 타 여우 빛깔 되었네.
집집마다 들판 새싹 먹도록 버려둠은
손님께서 매어둔 나귀들 위함일세.
오늘은 모래를 파낸다.
물없는 냇가에 모래만이 쌓이더니
모래가운데 고인 물이 웅덩이 이루었네.
이 밭 저 논 헤아려서 골고루 나누자니
물줄기 따라 부침하여 가래 삽을 잡아야하네.
땅 파서 샘을 내니 밤낮없이 이 곹물(?)이요
하늘을 원망해도 비 안주니 더욱 더 한탄스럽네.
바라건대 하루 빨리 내년 여름 되어서
앞들의 요란한 개구리 소리 누워서 듣고 싶구나.

병자년 4월 5일”

[사진] 한글 가사 ‘애간장타는 한여름의 가뭄’의 끝 부분이다. 병자년 4월 5일이라는 날짜가 보인다. (왼쪽) 한글 가사의 한 부분으로 우물을 파는 자신의 처지를 여러 가지 동물로 비유하고 있는 대목이 보인다. “물웅덩이 파느라 출몰하는 오리 같고 /손이 터져서 거북등 되고 /얼굴은 타서 까마귀 같구나. /땅 파느라 쥐락펴락하는 허리는 큰 벌레 같고/ 두레박줄 오르락 내리락 거미줄 타는 것 같네…” (오른쪽)

1876년 병자년이 대가뭄의 상징이 되었듯이, 올해 2018년 무술년은 대폭염의 연도로 기억될 것이다. 2018년 여름은 그 역시 뜨거웠던 1994년 폭염 기록을 뛰어넘어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111년 만의 최고의 폭염이었다고 한다. 거의 천재지변 수준의 폭염이었다. [별그대] 천송이식으로 표현하면 ‘븅자년 죽빵을 날릴’ 더위였다.

그런데 계절의 변화는 절묘해서 이 폭염도 지난 주 말복을 지나면서 기세가 크게 꺾였다, 그리고 이번 주에는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처서(處暑)가 있다. 새벽녘 공기는 이제 서늘해질 것이고, 가을 냄새가 날 것이다. 혹독한 폭염을 잘 견디고 살아내신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이만 총총…

“지난 여름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강남대성학원의 역사강사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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