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지상주의와 사회주의 결합한 동성애 극작가
    2006년 05월 08일 10: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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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 존 바에즈, 데이비드 보위, 말론 브랜도, 카사노바, 윈스턴 처칠, 제임스 딘, 재니스 조플린, 차이코프스키, 볼테르….

이들은 ‘세계의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의 동성애자’라는 기획이 있다면 후보 명단에 오를만한 인물들이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동성애자임을 공공연하게 밝힌 이들도 있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동성애자’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는 어디에 속할까. 그는 동성애가 남색(sodomy)이라는 이름으로 금지된 당시의 영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변호했던 것으로 봤을 때 그는 아마도 전자에 속할 것이다.

동성애 혐의로 체포돼 법정에 선 자리에서 자신의 사랑을 "플라톤 철학의 기초에서든 미켈란젤로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든 찾을 수 있는…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항변했던 것을 보면 그런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작가 존 러스킨 만나 19세기 말 영국 사회주의 사상 형성

   
 

하지만 그를 영국의 극작가 정도로만 아는 사람이나, 본국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쫓겨난 동성애자 정도까지는 알고 있는 사람도 그가 "자본주의 체제는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철폐돼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잘 모를 것이다.

가령 그가 1891년에 쓴 에세이집 <사회주의적 인간의 영혼>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또는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지, 사유재산을 공공의 부로 바꾸고 경쟁을 협력으로 대체하는 것은 사회를 바람직한 상황으로 회복시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나 당시 영국의 심각한 사회문제인 빈곤의 해결책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을 그저 생존하게 하는 것은 해결방법이 아니"며 "빈곤이 불가능하도록 사회를 재건설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회주의자이자 동성애자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문필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와일드는 스무살때 옥스포드대학에 들어가 작가이자 사회주의 사상가였던 존 러스킨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존 러스킨과 오스카 와일드는 19세기 말 영국 사회주의 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대학시절부터 그의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옥스포드 시절 긴 머리에 기괴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며 눈길을 끌었고 종교를 모독하며 당시 사회의 위선을 공격했다. 그는 1878년 졸업 후 미국, 캐나다, 영국 등지에서 강의를 하거나 잡지에 기고를 하면서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예술지상주의의 대변인이 됐다.

예술지상주의는 외적 제약에 대한 거부

예술지상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시 예술지상주의는 외적 제약에 대한 거부, 예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고 그런 면에서 반부르주아 의식과 통했다.

즉 부르주아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예술을 선전의 도구로 삼으려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진지함이 예술지상주의의 이면에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도 그런 결합이 나타나 있다. 1888년 출간된 그의 동화 <행복한 왕자>를 살펴보자.

<행복한 왕자>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왕자가 동상으로 세워진 뒤, 세상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줌으로써 축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의 동화다. <행복한 왕자>는 기성 제도와 부르주아 속물주의에 대한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철저한 비타협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890년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첫 장편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발표됐는데 이 작품은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이었다. 이 작품은 한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이 자신의 본성에 눈을 뜨게 되고 ‘아름다움을 찾아’ 쾌락주의에 빠졌다가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된다는 내용이다.

사실 소설 주인공 도리안 그레이는 와일드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 역시 1895년 동성애자 애인 더글러스 경과 알제리로 여행을 갔다온 이후 체포돼 2년간 복역하게 된 것이다. 석방후 영국 국적을 박탈당한 그는 파리에서 혼자 살다가 1900년 11월 30일 감옥에서 얻은 뇌수막염으로 46세의 나이에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무대에 올려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가 살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근엄함과 위선을 소설과 희곡을 통해 날카롭게 풍자했던 그는 동성애자라는 ‘이방인’의 길을 걷다가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의 명예는 사망 1백년 가까이 된 1998년에야 비로소 회복됐다. 오스카 와일드 사망 98주기인 그해 11월 30일 노동당 정부가 런던 트라팔가 광장 근처에 ‘오스카 와일드와의 대화’라는 이름의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그때까지 영국땅에 오스카 와일드의 기념비는 하나도 없었다.

죽은 지 1백년 지나 명예회복

이날 동상 제막식에는 노동당의 마이클 풋 전 당수와 영화배우 주디 덴치 등 많은 저명인사가 참석했다.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는 노동당 정부의 크리스 스미스 문화부장관은 "그는 편견에 도전한 인물"이라며 "우리가 오늘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은 여러 측면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덕분"이라고 칭송했다.

사망 1백년이 지나고 난 후 오스카 와일드의 삶과 문학세계는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사회주의와 탐미주의라는 일견 모순된 주장을 한 듯 보이는 오스카 와일드는 사적소유가 악의 뿌리라고 주장하며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데 있어서 가장 철저한 입장에 서 있었다.

"사유재산은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저해한다"고 주장한 그는 "사유재산을 철폐시킴으로써 우리는 참되고 아름답고 건강한 개인주의를 영위할 수 있을 것"이며 "아무도 물질을 축적하는데 자기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기독교적인 공동체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기독교식의 ‘자기희생’을 통해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소유제의 철폐와 같은 사회체제의 혁명적인 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급진적이고도 낙관적인 전망은 오늘날 영국의 좌파 역사가와 사회주의 정치세력에 의해 다시 비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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