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직노동자들 가슴에 쌓인 시
    [기고] 진실 규명하겠다는 문재인의 약속은?
        2018년 08월 20일 09: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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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10년간 투쟁한 쌍용차 동지들의 가슴 속에는 시집이 몇 권씩 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8월초, 덕수궁 대한문 앞, 30번째로 세상을 떠난 쌍용차 노동자 김주중의 분향소에서 하룻밤 지킴이를 하면서 그들 가슴에 켜켜이 쌓인 시집들을 보았다.

    지난 10년, 도무지 이탈할 수 없던 한 길을 걸어온 그들의 얼굴엔 성직자의 그것과도 같은 고요가 맴돌았다. 평온한 태도로 그들은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을 맞았고, 진행해야 할 의식들을 가지런히 펼쳐갔다. 낙관의 미소도 비관의 냉소도 머물지 않는, 선인의 투명한 얼굴. 아프고 슬프면 모두 시인이 된다는 한 위원장 말처럼, 그들은 앞서간 서른 명의 동지들의 넋을 가슴에 품고, 한 발 한 발 <가야만 하는 길>을 내딛는 중이다.

    그들의 표정과 언어, 크고 작은 동작 하나 하나가 아픔을 품어 삼킨 자가 허공에 지어보이는 시였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했고, 정부의 살인 진압을 겪었고, 감옥에 끌려갔다. 40일이 넘게 단식을 했고, 동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찬 겨울 굴뚝에 올라가 사측과 협상을 요구했고, 법에도 호소했다. 그룹 총수를 만나 담판을 지으려 인도 원정도 갔다. 그렇게 10년간 이 길을 걸어오면서, 기름밥 먹던 진짜 노동자들은 가슴이 뭉그러지도록 시를 쌓는 시인이, 노동자의 존재를 걸고 그 제단을 사수하는 성자가 되어갔다.

    그들은 아침 6시에 일어나, 119배를 한다. 119는 이미 복직된 48명과 그동안 목숨을 던진 30명을 제외하고, 아직 복직을 기다리고 있는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숫자다. 89배까지는 세상과 인류를 위한 축원을 하나하나 담아 절한다. 그리고 90배부터 119배까지는 먼저 간 동지들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명복을 빌며 절 한다. 1시간 동안 이어지는 그들의 119배를 지켜보며 깨달았다. 이들이 이 길을 결코 멈출 수 없는 이유. 쌍용차 노동자들의 싸움은 앞서간 서른 명 동지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싸움이며 노동자 전체의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복직에 앞서 명예회복

    쌍차 분향소 안에는 이들의 세가지 요구가 적혀있다.

    1. 정부의 공식사과와 명예회복
    2. 손해배상 가압류 철회
    3. 해고자 전원 복직

    이들이 요구하는 첫 번째는 정부의 공식사과와 쌍차 노동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다.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것이다. 그들은 물론 폭도도 과격분자도 아니었다. 쌍차 사태의 시작과 끝은 철저하게 정부의 오판과, 책임 방기, 폭력과 기만으로 빚어졌다. 정부가 행한 모든 잘못을 노동자들에게 뒤집어 씌어온 지금까지의 행각에 대해 제대로 규명하라는 것이 이들의 첫 요구다.

    최초의 오판은 참여정부 때 이뤄진다. IMF 사태의 파고 속에, 정부는 2004년 쌍용차 경영권을 중국 상하이차로 넘기기로 결정한다. 당시 노조는 상하이차 매각에 굳건히 반대했다. “상하이차는 쌍용차의 경영 및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기술만 빼가려 할 것”이라는 것이 현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노조의 판단이었다. 정부는 노조의 판단을 묵살했다. 상하이차는 약속한 1조2천억원 투자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오로지 기술만 중국 본사로 유출한 뒤, 5년 후 법정관리를 신청한다. 여기까진 정확히 노조가 예측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상하이차는 한발 더 앞서간다. 그들은 회계장부를 조장하여, 경영상의 이유를 들먹이며 2646명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한다. 먹튀 자본의 사기 행각으로 수조 억 원 상당의 국부가 유출되는 동안, 눈 뜨고 보고만 있던 당시 이명박 정부는 상하이차의 이런 대범한 행각에 오히려 동조하며, 노조 와해를 위한 공작을 사측과 공조한다.

    현장 노동자보다 더 회사를 잘 알고, 앞으로 일어날 사태들을 동물적 감각으로 예견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에게 공장은 일터고 삶이고 가족의 생명줄이다. 그 가장 예민하고 소중한 목소리를 묵살하는 건, 탁상머리에 앉아, 주판알 엉터리로 튕기며 눈 뜨고 수조원의 국부를 강탈당하는 어리석은 관료들, 판사들, 노동자들을 오직 진압의 대상으로만 보는 경찰들이다.

    조현오 당시 경기경찰청장은 여론조작을 위해 쌍용차 사이버대응팀을 불법으로 운용하고, 치밀한 노조와해 공작을 펼쳐, 노노 갈등, 노사 갈등을 야기했고, 이명박으로부터 직접 허가를 얻어, 테러진압 무기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살인 진압했다. 이들에 대한 소탕 작전을 계획대로 성공시킨 후, 정부는 1300억 원의 자금을 산업은행 대출이란 형식으로 지원했다. 이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첫 번째 의무로 삼는 국가가 행한 일이 아니라, 노동자를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사악한 자본가의 사병대가 계급전쟁의 승리를 위해 저지른 만행처럼 보인다.

    정부의 오판, 사법부의 무능을 헌법이 부여하는 노동자의 권리로 저지하려던 노동자 중 90여명이 감옥으로 끌려갔다. 2015년 박근혜 하의 양승태 대법원은 ‘해고 무효’라는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부당 재판거래 사법농단으로 다시 한 번 쌍차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고등법원에서 승소했지만, 대법원 이후 5명이 바로 세상을 떠났다. 막다른 골목에 선 이들은 여기서 굴하지 않고, 굴뚝에 올라가 농성을 벌인 끝에, 이들은 마침내 사측으로부터 2017년 초까지 전원 복직이란 약속을 얻어낸다. 그러나, 지금까지 48명이 복직했을 뿐. 사측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있으며, 국가가 이 노동자들에게 청구한 47억원의 손해배상 청구도 여전히 이들의 목을 조르고 있다.

    기술을 송두리째 해외에 유출시키고, 약속받은 1조2천원을 송두리째 날렸으며, 생떼 같은 30명 국민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태의 책임, 불법으로 여론을 조작하고, 외국자본과의 협잡으로 자국의 노동자를 죽인 정부와 재판부에 있건만, 그들은 그 어떤 죄값도 치른 바 없다.

    진실 규명하겠다는 문재인의 약속

    2012년 대선, 한 정신과 의사가 텔레비전에 나와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걸 보았다. 그가 말하는 문재인 지지의 이유는, 바로 죽음의 벼랑 끝에 내몰린 쌍용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후보가 문재인이라는 것이었다. 그 절절한 호소가 많은 사람을 울렸고, 여전히 내 가슴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지금 대한문 쌍차 분향소에는 2012년 같은 자리에 차려졌던 분향소를 찾아, 세상을 떠난 해고노동자의 동료와 가족들을 위로하며, “반드시 해결”을 다짐하는 당시 문재인 후보의 사진이 크게 벽에 붙어 있다. 사진 속의 그는 진심으로 유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의 문재인은 분향소에 와 보지도, 아직 그 어떤 약속도 이행하지 않았다. 그가 완전히 쌍용차 노동자와의 약속을 잊은 것인가 의심할 무렵, 그는 인도 마힌드라 회장에게 이들의 복직에 힘써 달라는 한마디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그 말은 전혀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를 우린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힌드라 회장도 말의 무게를 가늠하는 지혜는 가진 사람일 터,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가 행해야 할 약속들을 전혀 이행하지 않은 채, 복직에 대한 종용만을 타인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1년 1개월 만에 세상을 등진 김주중. 그는 누구보다 헌신적인 노동자였다. 파업 직후 바로 구속돼서 치유 받을 시간도 갖지 못했고, 감옥에서 나와 생계가 막막해졌다. 가정은 이미 해체됐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도 복직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견뎠으나 사측과 문재인 정부의 기약 없는 희망고문이 결국 그를 벼랑 끝에서 내몬 것이다. 기업이 파업 노동자들에게 청구하는 손배 가압류를 넘어, 노동자를 적으로 몰았던 이명박근혜 정부는 정부 스스로가 이들에게 손배가압류를 청구했다. 김주중의 숨통을 직접적으로 조인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현 정부가 최소한의 진정성을 보이려면, 수년간에 걸쳐 국가가 벌여온 쌍차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범죄에 대한 사죄와 함께 이들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포기부터 해야 한다. 이어서 약속한 대로 국정조사를 통해 국가가 이들을 향해 저지른 범죄들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또한 노측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사측을 향해 노동부는 즉각 개입해야 한다. 정부가 노동자를 탄압할 때는 기업과 찰떡궁합으로 공조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일은 마치 정부의 일이 아닌 척 방관하고 있다.

    18일 개최된 쌍용차 문제해결 촉구 범국민대회 ‘결자해지'(사진=신유아 페이스북)

    결자해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쌍차 노동자들은 시민들과 함께, “결자해지”를 요구하는 범국민대회를 진행 중이다. 시위대는 당연히 청와대로 향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더 이상 자신이 내뱉은 약속을 외면해선 안 된다. 당신이 외면한다고, 이들의 요구가 스스로 수그러드는 날은 없을 것이다. 오직 “인간에 대한 사랑, 동지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은 국가 폭력에 맞서 싸웠고, 앞으로도 그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그날까지 싸울 것이다.

    파업을 유도하고, 곧이어 폭도의 낙인을 찍은 정부, 그 낙인을 유포한 언론, 거기에 놀아난 여론은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재취업도 막았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살벌한 폭도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이들이 지금 투쟁하는 이유는 앵무새처럼 조중동의 논리를 받아 씹는 혹자들이 지껄이듯, 귀족노동자의 신분을 되찾고 싶어서가 아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그들을 받아주는 직장은 없으며, 죽은 자들과 산자들 짓밟힌 명예를 누군가는 반드시 회복시켜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기에, 이들은 기꺼이 이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싸움이 승리로 끝나고 그들이 모두, 그토록 사랑했고,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삶의 터전, 공장으로 돌아가야만, 우린 함께 새로운 세상에 도달했다 말할 수 있다. 그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 정부가 지금 시급히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어서 그 일을 하시라. KTX승무원들의 복직이 온 국민에게 얼마나 큰 환희를 안겼는지 보시라. 쌍차 노동자들에게 국가와 사회가 진 채무를, 그 엄청난 과오를 이 정부는 해결해야 만 한다. 그때서야 우린 과거의 악몽을 딛고 마침내 진보할 수 있다. 당신들의 무위가 쌓고 있는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 소리를 들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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