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가족 문예공모 수기부문 당선작] 노동자의 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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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05일 10: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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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죽어도 ‘꽥’소리나 하고 죽자

    그런데 모이면 신세타령만 하던 여객차량 계약직 동료들 사이에 바람이 일었다. 더 이상 죽는 날 기다리며 하루하루 사는 시한부 인생으로 살지 말고, 죽어도 ‘꽥’소리나 지르고 죽자고 했다. 그러나 다들 술 마실 때만 큰 소리였지,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 싶게 입술을 꾹 닫았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며칠 지나자 40대 형님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말에 힘이 들어갔다. 아마도 재계약 안돼서 나가면 그 나이에 일용직이라도 다른 직장 들어가는 게 더 어렵다는 현실을 잘 알아서일까, 특히 종섭이 형이 그랬다.

    1999년에 들어와 여객차량 차전조에서 줄곧 일하다 지금은 배관조에서 일하고 있는 종섭이 형이 이번에는 진짜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끼리 모임을 만들어서 힘을 합쳐 우리들의 재계약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그리고 지방본부와 지부에서도 비정규직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함께 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니 여객차량지부에서 총대를 멜 사람이 정 없으면 자기라도 맬 테니, 30대에서 총무를 맡아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간절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같이 일하는 형들이나 친구들도 “태형이 나이, 서른하나가 제일 적당하다”며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나를 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스총차고 정문 앞에서 부릅뜬 눈을 하고 계시는 청원경찰 아버지 얼굴이었다. 해군 출신에 월남전까지 갔다 온 아버지는 늘 막내인 내 걱정이 많았고 계약직 모임한다 했을 때도 쓸데없는 데 신경 쓴다며 반대하셨다. 또 겁이 많은 주원이 엄마의 목소리도 목덜미에서 잡아 당겼다.

    “왜 하필 당신이 나서려고 해.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돼요?”

    아침 저녁으로 자식 걱정에, 남편걱정에 제발 한번만 더 생각하라는 아버지와 주원이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11월 15일 준비모임을 거쳐 만든 여객차량 비정규직 동지회 총무가 됐다. 내년도 재계약문제 때문에 모이게 된 우리는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가입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11월 16일 여객차량지부 사무실에서 계약직 20명 중 18명이 철도노조 조합원 가입원서를 제출했다.

       

    전국철도노동조합 제공

    사실 처음에는 노조에 가입하면 사무실로부터 눈치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집에서 노조 가입문제로 식구들과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가만히 있으면 재계약되는 건 문제없는데 왜 네가 앞장서서 총무를 맡고, 게다가 노조는 뭐 하러 가입했어!”하시며 야단이셨다. 또 주원이 엄마는 “빠질 수 없으면 나중 생각해서 중간만이라도 하면 안 되냐”고 울면서 사정했다.

    나도 사람이다 보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식구들의 바램을 무조건 외면할 수 없어 가슴이 많이 아팠다. 하지만 각종 회의나 교육에 참여하면서 비정규직이나 우리들의 재계약 문제가 진정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더 열심히 뛰어서 집에서나 정규직 형님들에게 인정받자고 다짐했다.

    노조가입과 함께 언제나 나올까 기다리던 투쟁조끼가 11월 18일 지급됐다. 정규직 형님들이 입고 다니는 투쟁조끼를 늘 부러워했는데, 11월 20일 서울역에서 열리는 철도총력결의대회를 앞두고 지부사무실에서 나눠줬다. 머리띠까지 받자 동생들은 그 자리에서 머리띠를 메고는 서로 비뚤어진 매듭을 바로 잡아주느라 애썼다. 그렇게 입고 싶었던 투쟁조끼는 그날 이후로 현장에서 일할 때나 투쟁을 할 때 항상 우리들의 분신으로 함께하고 있다.

    투쟁조끼를 처음 받던 날 나도 주원이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어 집에 일부러 입고 들어갔다. 그런데 주원이 엄마는 투쟁조끼를 입은 나를 보자마자 “노조 가입한 게 뭐가 그리 자랑스러워 집에까지 와 유세를 떠냐”고 걱정을 했다.

    성질 급한 나도 이에 질세라 큰소리를 쳤다.

    “내일 모레 서울역 집회가기 위해 갖고 온 것인데, 다리미로 다려주지는 못할망정 당신 너무 한 것 아냐. 사실 내가 굳이 안들어 가겠다고 버티던 철도를 억지로 집어넣은 게 누군데… 연말에 계약만료 될까 걱정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내 심정을 당신이 알기나 해?”

    그날 저녁 주원이 엄마와 처음으로 많이 다퉜다. 연일 시아버지가 아들 걱정하는 모습에서 그나마 들어간 직장마저 노조 때문에 남들보다 먼저 잘릴까 혼자서 걱정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상경투쟁에 가느라 집을 나서는데 주원이 엄마가 등 뒤에서 한마디 했다.

    “이왕 시작한거 열심히 하고, 혹시 직장에서 쫓겨나더라도 그땐 당신이 하고 싶어 했던 일을 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회에 참가해 투쟁가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면서 남대문까지 거리 행진을 한 그날 이후 우리는 12월 중순으로 예상되는 계약만료에 대비해 재계약투쟁을 준비하며 기계시설, 화물차량 비정규직동지회 임원들을 만났다.

    전원 계약해지 통보, 그러나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

    그런데 11월 28일 오후가 되자 기계시설에서부터 계약만료 통지서가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현장에 돌았다. 퇴근 무렵 지부에 확인해보니 우리 여객차량지부도 12월 31일자로 14명은 계약만료, 내년 5월 31일이 계약만료인 6명에게는 해고예고통지서까지 나왔다 했다.

    그날따라 초겨울을 알리는 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리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정말 무거웠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빨리 계약만료 통보를 받고 보니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어디 가서 술이나 잔뜩 퍼마시고 집에 가려다, 계약만료 통보를 맏은 다음 날부터 하기로 한 투쟁 준비 때문에 그냥 집에 일찍 들어갔다. 그러나 주원이 엄마에게는 차마 사실상의 해고에 해당하는 ‘계약만료 통보’를 받았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자전거를 타고 이 공장 저 공장 돌아다니며 알아보니, 보름 전에 철도노조에 가입한 계약직 조합원 36명을 포함하여 총 72명에게 아무런 노사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계약해지, 아니 해고를 통보한 것이다.

    그때 대전철도차량관리단에는 94명의 비정규계약직들이 있었다. 대부분 매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근로계약을 하는 계약직으로, 나처럼 정규직 형님들과 현장에서 같이 망치들고 일하는 계약직 차량관리원부터 식당 아주머니, 청소 아저씨, 환경(폐기물처리)인부, 청사 경비까지 여러 곳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그동안 연말만 되면 관리자들 입맛에 따라 재계약 여부가가 결정되고, 또 올해부터 현장에 불기시작한 철도공사의 구조조정 바람 앞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당연한 듯 받아들이면서도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었다. 노조 가입과 함께 미리 재계약 투쟁을 준비해 왔던 우리 계약직 조합원들도 갑작스런 계약만료 통보에 1주일 동안 잠시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전국철도노동조합 제공

    새벽에 눈이 무척 많이 내린 12월 5일 이른 아침. 우리들은 그동안 준비했던 대로 관리단 정문 앞에서 집단해고 철회 요구안이 담긴 손피켓과 투쟁 소식지를 조합원들에게 나눠주며 재계약투쟁의 시작을 알렸다.

    ‘서러워서 못 살겠다 계약해지 철회하라!’
    ‘우리는 더 이상 유통기간 지난 소모품이 아니다!’

    그날부터 약 2주 동안 매일 새벽같이 출근해 아침 점심으로 언 손 비벼가며 현수막을 들고 우리들의 땀과 눈물이 담긴 선전물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계약직 조합원 외에 현장에서 같이 일하는 정규직 형님들까지 손 피켓을 들고 함께 서있거나, 출근하다가 고생하다며 쌍화탕을 내밀 때면 눈물나게 고맙고 힘이 됐다.

    사실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재계약투쟁 내내 우리와 함께 해주었던 정규직 조합원, 아니 형님들이 지금도 고마운 것은 “우리 자리도 구조조정이 들어오면 만만치 않은데, 걔네들까지 챙기면 나중에 우리만 피박 쓰는 것 아니냐. 지켜주지 못할 바엔 차라리 상관하지 말자”는 다른 정규직 조합원들의 불만에도 아랑곳 않고 그들을 설득하면서 또는 다투기까지 하며 함께 해주었다. 그러다보니 아침, 점심 선전전과 결의대회에 참가하는 정규직 조합원이 점점 늘어갔다.

    그 사이 지방본부에서는 노사협의 대상이 아니라며 임시노사협의회를 거부하는 대전철도차량관리단을 압박하면서 계속 교섭을 이끌어 갔다. 결국 보름동안 눈비 맞아가며 싸운 덕에 12월 15일 계약직 조합원 36명을 포함하여 계약해지 됐던 72명에 대해 전 원 재계약 보장을 받아냈다.

    비록 정규직화를 내걸고 싸운 것은 아니지만,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함께 투쟁해서 이뤄낸 재계약 쟁취라 그날 자정 늦은 시간까지 관리단 1층 로비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우리들은 감격에 겨워 너나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계약해지 되고 식구들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대며 어디서 애먼 소주에게 화풀이만 하고 있었을 텐데…

    많게는 40대 후반에서 적게는 20대 중반의 다 큰 사내들이 서로가, 또는 자신이 대견하다고 느꼈는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형님들과 동생들 얼굴에서 눈물만 보지 않았다. 다들 말은 안했지만 서로의 눈빛에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철도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힘껏 벌여 정규직화를 반드시 이뤄내자고 다짐하는 것 같았다.

    철도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의 그 길을 위해

    한해가 끝나는 지난해 연말, 다른 해와 달리 가슴 졸이지 않고 전원 재계약을 이뤘다. 그러나 지난해는 정규직 형님들과 노동조합의 지원으로 재계약을 어렵지 않게 이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투쟁이 끝났어도 정규직이 되지 않는 한, 매년 되풀이 되는 계약해지의 관행을 막기 위해선 앞으로의 진짜 싸움인 정규직화 투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그 자체가 얼마나 더 소중한가 지난 투쟁을 통해 잘 알았고 ‘정규직화’에 대해 고민하는 동지들이 주변에 생겼기 때문이다.

    계약직 ‘일년살이’ 인생을 벗어나기 위해 모임을 만들고 노조에 가입하여 처음 재계약 투쟁을 준비할 때, 사실 나는 비정규직동지회 총무로서 누구보다 걱정을 많이 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다보니 몇날 며칠 밤잠을 설치고 아버지, 주원이 엄마와 말다툼도 수없이 했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은 “혼자서 가려고 하니까 두렵고 답답한 것이다. 계약직 형님, 동생들과 손잡고 캄캄한 어둠 속을 함께 걷듯이 한번 끝까지 가보자”는 거였다.

    지금 나는 그때 처음 먹었던 마음으로 돌아가, 재계약투쟁 이후 약간 느슨해진 비정규직동지회를 추스르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철도 비정규직 철폐!’의 한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주말이면 전국의 철도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계약직, 아니 비정규직 동지들을 만나고 있다. 단지 정규직화가 구호만 외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또 하루아침에 벼락치기로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 경험을 통해 알았기에, 나는 오늘도 철도 현장을 발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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