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지금도 유령이 되기를 거부한다
    2006년 05월 05일 0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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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 공산당선언의 표지. 너무 어려웠다는 기억 밖에 없다.

내가 <공산당선언>(이하 선언)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백산서당에서 나온 영한대역본이었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됐다. 다만 마지막 문단만은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마지막 문단은 거의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다. 그 짧은 한 문단이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안재성의 소설 <파업>전체와 맞먹을 정도의 무게였다. 그러나 떠돌아다닌다는 유령이 정확히 어떤 분인지는 여전히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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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을 다시 읽은 것은 대학에 들어와서다. 책도 바꿨다. 박종철출판사에서 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권에 들어있는 <선언>은 번역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럭저럭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거쳤던 황광우 선생은 어느 책에선가 선진노동자라면 <선언>을 읽고 또 읽어 아예 외울 정도가 돼야 한다고 했다. 이 책이 복음서여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 팜플렛인 <선언>안에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의 정의와 원리, 목표가 모두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이 팜플렛은 발간되고 150년이 지나는 동안 모든 급진적 운동의 원초적인 강령으로 존재했다.

그런 책을 눈앞에 두고 읽으면서 떨림이 없다면 그건 심장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라고 <선언>을 다시 읽을 무렵에는 생각했다.

앞서 이야기한 유령아저씨 이야기가 말미의 ‘단결하라’ 구호와 더불어 <선언>의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글귀이지만, <선언>의 실질적인 첫 문장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이 부분이다.

두께는 얇아도 역사적 무게가 만만치 않은 이 책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바로 이 첫 문장을 선택하면 된다. 이 문장은 <선언>을 집필할 때까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고민했던 문제이며 <선언> 이후 그들의 저작에까지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혹자는 마르크스를 초기와 후기, 청년헤겔주의 시절과 과학적 공산주의자 시절로 나눈다고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자르고 저렇게 잘라 봐도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그의 명제는 허리를 자를 수 없다.

도서관에 들어간 대학신입생이 큰 맘먹고 펼쳐든 책의 첫 문장에서 역사의 비밀(?)을 맞닥뜨렸다. 그 순간 지난 150년간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이 문장을 읽었을 무수한 ‘동지’들 중 한명이 됐다는 자각보다는, 도서관을 가득 메운 학생들은 모르는 ‘진리’를 나는 깨우쳤다는 자만심이 어깨에 힘을 주게 만들었다.

모든 강령적 문헌들이 그렇듯이 <선언>도 간결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문장 하나마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앞서 예로 든 첫 문장의 ‘임팩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길이 머물고, 입속에서 되뇌이게 되는 구절들이 있다. 국가는 부르주아의 위원회라는 규정이나 부르주아는 자신의 모습으로 세계를 창조한다는 언명, 노동자에게 조국이란 없다는 선언, 그리고 무엇보다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에 대한 전망까지.

이런 글귀들은 한번 읽어버리면, 마치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첫사랑의 기억처럼 일상 곳곳에서 불현듯 재생된다. 가령, 텔레비전 화면 속의 시민단체 간부를 보면서 <선언>의 “부르주아지의 어떤 부분은 부르주아 사회의 존립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적 폐해를 제거하고자 한다”는 문장이 겹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이런 보이지 않는 ‘힘’이 쓰여진 지 150년이 지난 이 팜플렛, 사실 책이라고 부르기는 대단히 곤란한 이 소책자가 여전히 자본주의가 극복될 수 있고, 혁명의 엔진인 ‘계급투쟁’은 지금도 힘차게 가동 중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강령으로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은 부르주아 스스로도 부정하기 어려울 만큼 오늘날의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선언>은 지금도 미국과 일본 주요 대학의 신입생용 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몇 년 전 서울대가 발표한 신입생 추천도서의 명단에 <선언> 대신 <자본>이 들어앉아 있는 걸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다.

이토록 간명한 글을 놔두고 그 골치 아픈 <자본>을 그것도 갓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는 심보는 도대체 무얼까? 아마도 마르크스라면 초장부터 넌덜머리가 나게 만들려는 음모가 깔린 것은 아닐까 혼자 의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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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는 <공산당선언>으로부터 공산당이라고 하는 정치결사를 유추해내는 것은 오독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것은 정치투쟁으로서의 계급투쟁을 전위적으로 선도하는 정당의 존재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지배를 “자유로운 연합체”로 대체하기 위한 전환의 프로젝트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공산주의자 선언”으로 정당하게 복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혹스러운 주장이었다. 150년 동안 이 강령을 믿고 노동계급의 전위를 구성하려고 투쟁했던 사람들이 모조리 책을 잘못 읽어서 그런 생고생을 했던 거였다니…

이론적인 부분은 더 많은 논쟁을 통해 가려내야겠지만 설혹 ‘낡은 좌파’로 몰린다 할지라도 이런 종류의 재해석에는 쉽게 동의가 가지 않는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하는 사람들의 목적의식적인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학 도서관에서 <선언>을 앞에 놓고 떨었던 내 가슴을 무엇보다도 믿어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 "Socialism of the heart, 마음의 사회주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말이 나왔으니, 만약 앞으로 150년 후에도 자본주의가 여전히 폐절되지 않았다면, 그때까지도 자본주의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선언>을 자신들의 변하지 않는 강령으로 여기고 있을까?

여기에는 ‘네’라는 대답과 ‘아니오’라는 대답 두개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단연코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죄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이 뭣 같은 자본주의가 앞으로 150년 후에도 원기왕성하게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마르크스는 <선언>의 시작부터 끝까지 사회주의는 과학이라고 강조했다.(침대가 아니다!) 하지만 과학적 사회주의는 결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 * *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그리고 올해 어린이날은 부처님오신날과 겹쳤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5월 5일은 칼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Happy Birthday K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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