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TA시대에 김동리의 <산화>를 읽는 이유
    By
        2006년 05월 05일 10:0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오랜만에 <김동리 전집>을 손에 잡았다. <산화>(山火)를 다시 읽기 위해서다. <산화>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으로 뽑힌 작품이다. <산화>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동리 소설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난다.

    김동리는 흔히 보수주의자로 평가된다. ‘순수문학'(본격문학)이란 용어를 문단에 정착시켜 한국문학의 탈사회화, 탈정치화를 주도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1978년 임헌영, 구중서, 염무웅을 상대로 벌였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논쟁’은 그러한 이미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1978년이라면 긴급조치 9호가 서슬 퍼렇게 작동하던 시대였는데, 당대의 민중문학론자들에게 사회주의자의 빨간 색깔을 덧칠하는 양상이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김동리가 처음부터 순수문학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1947년 즈음부터 그러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판단한다. 서양의 르네상스에 필적할 만한 새로운 르네상스의 모색이 좌절하면서 문학을 신비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순수문학론자로 변모하기 이전의 김동리는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산화>는 김동리가 현실주의자의 입장에서 써 내려간 작품이다.

    뒷골의 주민 대부분은 ‘윤 참봉’에게 빚을 지고 있다. 윤 참봉은 뒷골 부근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였으며, 뒷골 유일의 금융기관으로서 장리 벼를 주고 현금을 대부하였다. 이를 매개로 하여 그가 벌이는 착취와 행패는 보통이 아니다.

    어느 날 윤 참봉이 기르던 황소가 병을 앓다 죽어버린다. 출장 나온 감독원이 보는 앞에서 소의 사체는 소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렇지만, 황소가 아까운 윤 참봉은 하인을 시켜 소의 사체를 도로 파내 온다. 그리고 자신의 환갑 기념이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긴다. 얼마 후 쇠고기를 먹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독(肉毒)이 들렸으며, 죽는 사람도 늘어갔다. 이 즈음 홍화산에서는 원인 모를 산화가 난다.

    "홍화산에 산화가 나면 난리가 난다지요?"
    "난리가 안 나면 큰 병이 온다지?"
    뒷골 사람들은 모두 한 곳으로 모여들어 먼 산의 큰불을 바라보고 있다.

    나름대로 <산화>의 줄거리를 요약해 봤는데, 아무래도 원작의 완성도를 크게 해친 것 같다. ‘난리가 안 나서 큰 병이 왔다’는, 그래서 이제 난리가 일어나리라는 주제의식만 부각시킨 꼴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소설의 줄거리 요약이란 원래 그런 법. 그래서 <산화>의 의의에 대한 염무웅의 평가를 곁들이기로 한다. <김동리 문학의 현실감각>(金東里文學의 現實感覺)이라는 평론의 한 대목이다.

    1930년대의 중엽에 발표된 이 작품이 동 년대에 가질 수 있는 의미는 가히 민족적 현실의 예술의 축도(縮圖)라고 찬양되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작가 자신이 이 작품에서 의도한 주관적 목표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일제의 식량 보급기지, 병참기지로 전락해 가던 식민지 한국의 당시에 있어서 그것은 이상(李箱)의 모더니즘과 소위 프로문학의 공식주의가 다 같이 이루지 못했던 하나의 종합적 결실이었다.

    몇 번을 읽어 봐도 <산화>는 완성도 높은 소설이다. 하지만 무척 불행한 시대에 <산화>와 같은 작품이 씌어진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로지 돈 벌기 위한 목적으로 목숨 위협하는 상한 쇠고기를 팔고, 가난에 쪼들린 이들이 그 고기를 먹고 죽어가는 상황, 참혹하지 않은가. 물론 그보다 먼저 극히 일부의 사람이 모든 것들을 소유해 버리는 현실이 문제가 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산화>를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전문가들은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려는 쇠고기의 안정성이 불확실하다고 지적한다. 광우병 걸린 소의 고기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수입을 추진하는 정부는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 산불이 나는 게 아닐까. 난리가 나면 어떡하나. 큰 병이 돌면 어떡하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것만 같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