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가족 문예공모 수기부문 당선작] 노동자의 길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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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05일 10: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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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직 차량관리원으로 철도에 들어온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간다. 2004년 5월 18일 철조망 사이로 막 지기 시작한 개나리꽃을 보며 대전철도차량관리단 정문을 지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두해를 넘기고 있다.

    새마을호 세척작업을 끝내고 난로가에 앉아 잠시 언 몸을 녹이며 담배 한대 피우는데, 갑자기 대창에서 보낸 22개월이 스쳐간다. 눈물이 난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눈물이 없는 내가 지난 일을 떠올리다 목이 잠기는 걸 보니 즐거웠던 일보다는 힘들고 서러웠던 기억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타이어공장에 다니며 빵집 사장을 꿈꾸다

       

    전국철도노동조합 제공

    철도에 들어오기 전에는 신탄진 한국타이어 안에 있는 하청업체에 다녔다. 거기서는 사내 하청업체 직원으로 일했다. 일은 지금 철도에서 하는 것보다 몇 십 배 힘이 들었다. 4조 3교대를 하다보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몸이 많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리고 입사하고 얼마뒤 결혼을 했는데, 저녁에 출근할 때마다 ‘무섬증’많은 마누라 극성에 일하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타이어 불량품을 골라내거나 사이즈별로 구분하는 일을 했는데, 그렇다고 모든 게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노동강도로 치면 대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타이어의 일이 힘들긴 했지만, 일할 때 정규직이나 하청업체 직원 구분 없이 서로 챙겨주며 일하는 분위기는 좋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형님 동생 하면서 시간만 나면 공도 차러 다니고 술도 마시러 다니다 보니 하루하루가 정말 빨리 지나갔다.

    한국타이어는 사내하청업체에서 1년 이상 근무하다 정규직원 결원이 생기면 정규직원으로 발령을 받는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일이 힘들다 말하지도 못하고 정규직이 되기 위해 참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누라 잔소리와 앞으로 빵집이 전망 좋다는 서울 사촌형 말만 듣지 않고 그곳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한국타이어 정규직원이 됐을 것이다.

    한국타이어 하청업체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결국 제과제빵기술을 배워 멋진 빵집을 차리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곳을 그만두었다. 6개월 학원을 열심히 다닌 끝에 드디어 제과제빵기능사를 땄고 제대로 된 빵집에도 취직했다. 나중에 ‘김태형’이라는 이름을 내건 빵집을 생각하며 밀가루 반죽을 참 열심히 했는데… 빵집 들어간 지 서너달쯤 되었을까, 아버지와 마누라, 아니 주원이 엄마는 철도청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한국타이어에서 정규직이 되는 것도 포기하고, 그 후 집에서 몇 달 동안 실업자로 눈칫밥 먹어가며 배운 기술인데…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평생직장 찾아 대전철도차량관리단에 들어가라고 했다. 계약직이라도 있다가 특채시험봐서 철도공무원이 되라고 했다.

    죽은 사람 소원 들어주는 심정으로 철도청에 들어왔지만

    며칠동안 아버지, 주원이 엄마와 들어가라, 안 들어간다 싸웠다. 식구들은 모두 위로 누나 둘에 막내로 큰 내가 장가가고나서 안정된 직장에 다니길 바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신탄진에서 ‘철도공작창’으로 더 알려진 대전철도차량관리단은 철도청 소속으로 아버지가 30년 넘게 근무하다 퇴직하신 곳이다. 퇴직해서 다시 계약직으로 들어가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관리단 정문에서 청원결찰로 일하셨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다니시던 아버지 친구분들을 보아온 나는 솔직히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주원이 엄마는 그곳에만 들어가면 공무원이 다 되는 것인 줄만 알고 하루종일 긁어댔다. 몇날 며칠 실랑이 하다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하는 심정으로 딱 1년만 견디어보자며 대전철도차량관리단에 발을 딛었다.

    2004년 5월 18일, 처음 발령받은 곳은 여객차량부였다. 그러나 출근하는 날부터 나에겐 부서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경영개선인부’가 아닌 ‘폐차인부’였기 때문이다. 연말이면 계약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철도와 인연이 끝나는 계약직도 다 같은 게 아니었다.

    부서에 배치되어 정규직원과 같이 일을 하는 경영개선인부와 달리 폐차인부로 내가 주로 했던 일은 각 부서의 정규직원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해야 했다.

    군대갔다 와서 새벽에 용역사무실 나가 노가가 뛸 때처럼 하루하루 일이 달랐다. 쓰레기 분리부터 잡초 제거, 작업장 배수로 오물청소, 그리고 개조차량 부품철거작업 등 온갖 잡다한 일을 이 부서 저 부서 불려 다니며 일을 했다.

    힘들어도 싫다는 내색 없이 열심히 일했다. 왜냐하면 나중에 정규직 되는 특채시험은 둘째라도 당장 연말에 있을 재계약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두달 다니다 그만둘까 생각도 많이 했지만, 딸아이 지원이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자존심 가슴에 묻고 일해야 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2004년 12월 31일, 언제나 그랬던 거서처럼 사무실에서 우리 재계약직들을 불렀다. 관리팀장은 12월 31일자로 계약만료가 되었음을 통보하면서 재계약 대상자들은 내년 연초에 집으로 각자 전화 주겠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 계약직 동료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직장에서 출근하라고 전화 왔는데 못 받을까봐 화장실 갈 때도, 심지어는 목욕탕에 들어갈 때도 휴대폰을 랩에 싸 가지고 들어갔다고 했다.

    2004년 한해가 끝나는 그날, 정규직 형님들은 한해를 그냥 보내기 아쉽다며 직장 앞 소주집으로 향하는데, 복지회관 앞에서 만난 우리 계약직들은 서로 말은 안했지만 내년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눈빛에 배어 있었다.

    드디어 205년 새해가 밝았다. 출근하게 되면 지겹게 일할 텐데, 이럴 때라도 출근 걱정 안하고 집에서 며칠 푹 쉬려고 했다. 하지만 몸은 쉬려해도 마음은 따라주지 않았다. 혹시 회사에서 전화가 안 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자,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았다. 한참 예쁜 짓하기 시작한 주원이 얼굴을 볼 때마다 신경은 온통 휴대폰 벨소리로 가게 됐다.

    결국 1월 4일 1차로 재계약 통보를 받았고, 다른 동료들은 며칠 뒤인 1월 8일 2차 통보를 받았다. 출근해서 너는 며칠자, 너는 며칠자 하면서 농담도 했지만, 다들 똑같은 계약직을 1차, 2차로 나누는 자체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공사로 바뀌었지만 구조조정의 칼바람은 불어오고

       

    전국철도노동조합 제공

    올해는 경영개선인부로 도공조에 들어왔다. 철도청에서 한국철도공사로 바뀌면서, 그때까지 쓰던 ‘경영개선인부’라는 명칭도 ‘비정규계약직 차량관리원’으로 바뀌었다.

    비록 내가 공무우너은 아니었지만, 공무원 체제에서 공사, 아니 회사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하루가 다르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특채라도 있을려나 하는 생각에, 차량관리원 앞에 붙은 ‘비정규계약직’의 꼬리표를 떼려고 열심히 페인트칠을 하고 도장작업을 위해 신문지도 땀나게 붙였다. 객화차기능사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도 했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서, 정확하게는 추석이 지나자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벌써 외주계획이 나간 사유화차 말고도 주물공장 폐쇄 방침이 거의 확실해서 내년도 업무량이 대폭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원감축은 당연히 따르는데, 우리 같은 계약직들을 먼저 줄일 것이라는 소문이 아침저녁으로 돌았다. 결국 현장에서 계약직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 신세타령하다 퇴근 후 소주집, 맥주집으로 이어지는 게 매일이었다.

    11월 중순 어느 날 지방본부 투쟁지침이라며 정규직 형님들이 투쟁복 등짝에 달기 시작한 노란 몸벽보가 온 공장을 물들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막연한 불안감은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작업장이나 식당에서 만나는 그 노란 몸벽보에 적힌 ‘주물공장 폐쇄방침 철회! 사유화차 외주화 철회!’ 글귀를 보면 앞으로 관리단에서의 구조조정이, 또 한달밖에 남지 않은 내년도 재계약 문제가 어떻게 될지 ‘뻔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벙어리 냉가슴으로 애먼 소주만 찾게 되었다.

    집에는 한밤중에 들어가게 되고 주원이 엄마와 다투는 날이 많았다. 어는 날에는 주정까지 하면서 아버지와 주원이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죽은 사람 소원 들어준다는 심정으로 들어온 직장인데, 왜 이 모양이야. 열심히 일해도 남는 건 없고… 오히려 왜 나를 힘들게 만드냐구.”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은 게 올 초 재계약 걱정할 때처럼 되어갔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정규직 특채는커녕, 우선 당장 내년도 재계약이 걱정되었다.

    부서 형님들이 내년에 직무진단 결과가 나와, 지금보다 인원이 더 줄어 지방청 차량 사무소로 쫓겨 날까봐 걱정 할 때, 우리는 계약해지 되어 이 직장마저 쫓겨나면 어디로 가나 하는 하소연만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일이 많아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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