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의 '붉은 나폴레옹'
    [붉은오늘 스토리] 보 응우옌 지압
        2018년 08월 10일 03:5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번 ‘붉은오늘’ 방송에서는 20세기 최대의 조작사건인 동시에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을 촉발시켰던 ‘통킹만 사건’을 2회에 나누어 다루고 있다. 베트남 전쟁이 워낙 방대한 역사적 사건이어서 베트남 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그 발화점이 되었고 미국의 조작으로 드러난 1964년 8월 2일의 통킹만 사건을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관련 방송 링크)그리고 [붉은오늘 사이드스토리]에서는 항불, 항일, 항미 전쟁을 이끌었던 베트남의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군사전략가 보 응우옌 잡을 다룬다. <편집자>
    ——————-

    1953년 11월 한 달 동안 베트남 서북부 산간지역인 디엔비엔푸에 프랑스 공수부대가 낙하했다. 보병을 포함해 16,000명의 병력이 산간지역에 주둔하며 길목을 차단했다. 디엔비엔푸는 북부의 베트남 인민군이 남진하는 것과 동시에 라오스를 통해 우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요충지였다.

    수송기를 통해 실어 나른 공수부대와 전투장비는 베트남 인민군의 화력을 압도했다. 게다가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길목을 장악한 탓에 화력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베트남 인민군은 열배의 병력으로도 승산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앙리 나바르 장군의 전술은 완벽해 보였다. 상대가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라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1945년 1월 일본의 패망이 짙어졌다고 판단한 호치민은 보 응우옌 잡이 이끄는 민병대를 분대 단위로 나눠서 북베트남에 잠입시켜 봄에는 하노이 인근에 집결했다. 8월에 되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호치민은 민병대를 하노이에 진격시키며 전국적인 봉기를 호소했다. 일본이 항복하자 호치민은 재빠르게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공화국은 하노이와 북부 일부에만 영향력을 미치는 수준에 불과했다.

    프랑스가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다. 옛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다각도로 연합국을 상대로 외교전을 펼쳤다. 프랑스의 외교전은 절반의 성과를 거두는데 그쳤다. 남쪽은 프랑스가, 북쪽은 중국이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통치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한반도와 유사한 상황이 베트남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식민지 국가를 독립시킨다는 기조를 가지고 있던 연합국이 들고 나온 일시적인 타협책이었다.

    중국이 하노이에 진주하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그 지위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식민지를 절반만 일시적으로 장악한 프랑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끈질긴 외교전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북베트남 작은 땅덩어리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중국이 철수를 해버린 것이다.

    호치민은 이 국면을 프랑스와 협상을 통해 풀려고 시도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 내에서는 호치민의 전략이 분단과 식민지 장기화를 가져올 수 있다며 격렬히 반대했다. 호치민은 소수파에 몰렸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협상을 진행했다. 몇 차례의 고비를 넘기고 북쪽지역에 한해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인정한다는 협정을 맺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호치민의 노력은 돌발적인 사건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하이퐁에서 베트남 민병대와 프랑스군의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프랑스는 순항함을 동원해 대대적인 폭격에 나섰고 수천명의 베트남인들이 무차별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격분한 호치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20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잘 훈련된 군대와 뛰어난 화력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프랑스의 생각은 커다란 오판이었다. 보 응우옌 잡이 이끄는 민병대의 게릴라전에 프랑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지형에 익숙한 민병대는 끊임없이 프랑스군을 괴롭혔고 산림에 익숙하지 못한다는 것도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5년간 전투가 계속되면서 프랑스군은 북상을 하기는커녕, 중부지역까지 보 응우옌 잡의 민병대에 내주었다. 전투의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판단한 보 장군은 라오스를 거쳐 남부로 내려가는 전략을 수립했다. 남부에서도 지하에 있는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 월맹)들이 프랑스군을 타격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프랑스는 디엔비엔푸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승부수를 들고 나왔다.

    프랑스는 디엔비엔푸가 산간지역이라 지리적으로 유리한데다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분쇄할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보 장군은 대담하게도 5만 명의 민병대를 나누어 프랑스군을 포위하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지형에 유리한 것은 프랑스군이지만 밀림에 익숙한 것은 보 장군의 민병대였다. 곳곳에서 기지를 향해 포탄이 날아들고 공격이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오히려 고립되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공포가 전염되면서 프랑스군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지휘체계는 급격히 무력해졌다. 프랑스군이 사실상 항복하면서 보 장군의 디엔비엔푸 전투는 전쟁사에 또 하나의 신기원을 기록했다.

    디엔비엔푸의 전투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난 후 프랑스의 감독 하에 있던 남베트남의 위성공화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하에 있던 민병대들도 프랑스군과 남베트남 공화국에 대한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디엔비엔푸의 전투에서 승리한 보 장군의 민병대는 한발씩 사이공(호치민)을 향해 진격했고, 밀림과 게릴라에 질린 프랑스군은 사이공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다. 사이공의 함락은 시간문제처럼 보이자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 북베트남에 개입했다.

    호찌민과 보응우옌잡(왼쪽)

    보 응우옌 잡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교육을 마치자 프랑스로 일찍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의 지배에 강력히 저항하던 부모들 아래서 자란 보의 학생생활이 순탄할 리 없었다. 프랑스의 상급학교에는 베트남에서 유학 온 엘리트들의 자제들이 많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지지하는 프랑스인들도 있었다. 보는 비밀모임에 가담했고 스트라이크를 계획하는 데 참여하다 퇴학을 당했다.

    그때 베트남 유학생들 사이에서 하나의 소문을 듣게 된다. 광저우에서 호치민이 독립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에 유학을 한 적이 있는 호치민은 유학생들의 입소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보는 프랑스에서 주저 없이 베트남 청년혁명당(Thanh Nien)에 가입했다. 보의 나이 16살 무렵이었다.

    프랑스에 체류하던 보에게 독립도, 혁명도 전진하고 있다는 소식은 날아오지 않았다. 22살에 베트남으로 돌아온 보는 하노이 대학에 입학했다. 장기전을 생각해 공부를 하려는 목적과 은신의 이유도 있었다. 청년혁명당이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확대되면서 보의 비극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공산당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처제는 형식적인 재판으로 사형을 당했고, 보의 아내는 종신형을 받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보는 전위조직으로 베트남에서 진지전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무장투쟁만이 유일한 방안이라고 생각한 보는 입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호치민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1940년 보는 윈난군사학교에 입학해 고급군사전략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윈난군사학교는 미국방첩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군사학교 수료 후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호치민은 그에게 사령관의 임무를 맡겼다. 1945년 호치민과 보의 민병대는 하노이로 진격해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었지만 보는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작전을 계속하면서 미국의 북진을 막는 동시에 이른바 ‘호치민 루트’ 등을 개발해 반격에 나섰다. 1968년 ‘구정 대공세’는 전술적으로 실패한 측면이 있었지만 전략적으로는 전 세계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나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승기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호치민이 세상을 떠났지만 보의 군대는 남진을 계속했고 마침내 베트남을 통일했다. 보 장군의 전쟁전략을 흔히 3불 전략이라 불린다.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말고(회피 전략), 적이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지 말고(우회 전략), 적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싸운다(혁파 전략).

    1978년 캄보디아 침공을 반대하면서 당 내에서 소수파로 추락했고 친소파가 득세하면서 국방장관직을 상실했다. 이후 부총리로 전임되었고 1982년 정치국원에서도 배제되었다. 보는 베트남 민병대 창설이후 47년간 군에 재직했으며 80살이던 1991년에 은퇴했다. 2013년, 10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사람들은 그를 ‘붉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렀다.

    1995년 전쟁 당시의 적이었던 미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왼쪽)와 함께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