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과 그의 사인을 생각한다
[역사의 한 페이지] 나는 ‘키테이 손’ 아니라 ‘손긔졍’
    2018년 08월 10일 10: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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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라톤 영웅의 포옹

그날은 8월 9일이었다.

지금부터 25년 전인 1992년 8월 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 결승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의 황영조는 40Km까지 일본의 기대주 모리시타 고이치 선수와 선두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 2Km 정도를 남기고 황영조는 회심의 승부수를 던졌다. 몬주익 언덕, 급경사였다. 황영조는 언덕길을 힘차게 뛰어오르기 시작했고, 지친 표정이 역력한 모리시타는 황을 따라잡지 못하고 점점 뒤쳐져 갔다.

드디어 황영조가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서자 8만명의 관중들은 기립해 22살의 젊은 마라톤 챔피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황영조는 두 팔을 흔들어 그들의 환호에 답했다. 완전한 우승이었다. 2시간 13분 23초로 2위 모리시타보다 22초 빠른 기록이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최초로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순간이었다.

이어 몬주익 스타디움 시상식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고 눈시울을 붉힌 황영조는 시상식이 끝나자 스탠드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이미 백발이 된 비운의 마라토너 손기정이 있었다. 황영조는 자신의 금메달을 손기정에게 걸어주고 손기정과 감격의 포옹을 하였다. 황영조를 안은 손기정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했던 손기정은 황영조에게 나직이 말했다.

“고맙다…수고했다.”

황영조를 안은 손기정은 56년 전 베를린 올림픽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날의 감격과 슬픔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는 우승 후 손기정옹과 감격의 포옹을 하였다. (왼쪽). 당시 체신부에서는 황영조 우승 당시 마라톤 제패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는데, 베를린 올림픽의 손기정에 대한 경의를 동시에 표현하였다.(오른쪽)

그날도 8월 9일이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결승전이 있던 날이었다. 스물 네 살의 손기정은 같은 조선인인 남승룡, 일본인인 시오아쿠와 함께 일본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일제 강점기 나라 없는 백성의 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일본을 대표하는 마라톤 선수단에 조선인이 두 명이나 낀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일본에서는 일본 마라톤 대표에 조선인이 두 명이나 들어있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어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 갖가지 방법으로 이를 바꾸고자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 코미디같은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보자.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할 마라톤 대표를 뽑기 위해 마지막 두 번 열린 선발대회에서 각각 손기정과 남승룡이 1등을 차지해버리자 일본 육상연맹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손기정과 남승룡과 일본인 스즈키가 참가하게 되는 것인데, 자존심이 상한 일본은 조선인 하나 정도는 빼고 싶었던 것이다.

1936년 5월에 열린 일본 육상 연맹 기술위원회는 무려 6시간이나 회의를 하며 격론을 벌인 결과 희한한 해법을 내놓았다. 최종 선발된 3명 말고 4위를 차지한 시오아쿠라는 일본 선수를 참가시킨 가운데 베를린에 가서 현지에서 대표 선발전을 한 번 더 치르기로 한 것이다.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일본 대표로 어떻게든 일본인을 최소 2명은 출전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회를 얼마 앞둔 7월 22일 베를린 현지에서 4명의 선수가 30킬로미터 레이스로 최후의 승부를 벌이게 된다. 그런데 이 선발전 도중 뜻밖의 일이 벌어졌는데 14킬로미터 지점에서 스즈키 선수가 컨디션 난조로 레이싱을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이로써 최종 선발된 선수는 결국 손기정, 남승룡, 그리고 일본 선수인 시오아쿠였다. 결과적으로 손기정, 남승룡은 그대로인 채 일본인끼리 자리를 바꾼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힘겹게 올림픽에 출전한 경기에서 손기정은 비장한 각오로 레이스를 시작했다. 하벨 호수를 끼고 달리게 되어 있던 마라톤 코스 아부스(ABUS)는 자동차용 직선주로였다. 반환점을 돌 때까지는 영국의 하퍼와 2∼3위를 다투고 있었다. 1위는 4년전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아르헨티나의 자바라로 몇 분차로 앞서고 있었다. 반환점을 돌 무렵, 선배 권태하가 손기정에게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기정아! 4분 전에 자바라가 달아났어.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그 놈 잡아야 돼.”

권태하는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손기정에게 퍼붓고는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말대로 기정은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승부를 걸었고 이 곳에서 드디어 자바라를 제치고 선두에 나섰다. 이후 자바라는 컨디션 난조로 31km 지점에서 레이스를 포기하였고, 손기정은 그를 추격하는 하퍼와 마지막 레이스를 벌였다. 손기정은 막판 결사적인 힘을 발휘하여 하퍼마저 멀리 따돌리고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12만 관중들은 기립하여 동양에서 온 마라토너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 마라톤을 중계하던 독일 아나운서도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손기정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 학생(Koreanischer Student)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Der Koreaner)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결승점 100미터를 남기고 손기정은 놀라운 속도로 라스트 스퍼트를 하여 마지막 100미터를 13초로 달려 우승하였다. 49Km를 달리고도 그 당시 단거리 선수의 기록에 육박하는 초인적인 속도로 레이스를 마무리한 것이었다. 최종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올림픽 최고기록이었으며 2시간 30분벽을 최초로 깬 쾌거였으며, 동양인 최초의 마라톤 우승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하퍼가 2시간 31분 23초, 3위는 남승룡으로 2시간 31분 42초였다.

“나는 ‘키테이 손’이 아니라 ‘손긔졍’이다.”

손기정과 남승룡의 마라톤 제패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열광하였다. 사람들은 거리에 쏟아져 나와 손기정과 남승룡 만세를 외쳤다. 이런 조선인들의 기쁨과 열광은 심훈의 시에 잘 집약되어있다.

“….오늘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승전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어잡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 부를테냐?’ ”

-심훈, [오오, 조선의 남아여!] 중

그러나 손기정은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가슴에 달린 일장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동포들이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수상하는 자신의 사진을 본다면 얼마나 비애감이 들것인가? 그는 금메달을 따고서도 기뻐할 수 없는 초라한 식민지의 백성이었다. 그는 기미가요가 연주되고 일장기가 게양될 때 금메달리스트에게 주어진 월계수로 가슴에 일장기를 가렸다. 그리고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남승룡 역시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남승룡은 뭐라도 가릴 것이 있는 손기정이 부러웠다.

고개숙인 우승자들!

세상에 이렇게 슬픈 메달리스트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진] 마라톤 우승 후 시상식에서 고개숙인 챔피언 손기정과 남승룡의 모습. 손기정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는 월계수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남승룡 가슴의 일장기는 선명하다.(위) 베를린 올림픽 1년 전인 1935년 일본신궁경기에서 우승했을 때도 손기정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왜 우리는 국기가 없느냐”며 울었는데 일본 신문은 “감격에 넘쳐 울었다”고 썼다. 상의에는 그가 재학 중이었던 양정고보를 상징하는 ‘양(養)’자가 새겨져 있다.(아래)

당시 손기정의 심정은 뒷날 출간된 그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다.

“보기도 싫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영광의 1착 테이프를 끊고 시상대에 섰을 때, 우리는 애국가가 연주되지 않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월계관을 쓰게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마구 쏟아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손기정의 회고록,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중에서

이런 그의 심정은 시상식 후 손기정이 조선일보 김동진 기자와 가진 인터뷰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자가 물었다.

“명예의 승전을 무어라고 축하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얼마나 기쁘십니까?”

손기정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답했다.

“남형과 내가 이긴 것은 다행이요. 기쁘기도 기쁘나 실상은 웬일인지 이기고 나니 가슴에 북받쳐 오르며 울음만이 나옵니다. 남형도 역시 나와 같은 모양입니다…..우승했다고 반겨하는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섭니다…”

[사진] 우승 직후 나주의 친구에게 보낸 엽서만큼 손기정의 심정을 압축해서 극적으로 드러낸 것은 없을 것이다. 그의 이 엽서에는 단 세 글자만 쓰여 있었다. ‘슬프다!!?’

이날 이후 손기정은 베를린올림픽의 영웅이었다. 가는 곳마다 위대한 마라토너에게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그리고 사인 요청이 쇄도하였다. 손기정은 그때마다 망설임 없이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썼다. 그의 올림픽 공식 이름은 일본식으로 표기한 ‘Kitei Son’(키테이 손)이었고, 독일인들은 그를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사인에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썼다.

그가 한글로 사인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의 양정고보 선배였던 김은배가 4년 전 LA올림픽에 참가했을 때 현지에서 사인 요청을 받으면 한글로 ‘김은배’로 사인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손기정에게는 조선사람이 한글로 사인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한글 이름 옆에 ‘JAPAN’ 대신 ‘KOREA’라고 적었다.

또한 선수촌 안팎에서 외국인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꼭 ‘KOREA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올림픽 마라톤 우승 후 금메달리스트들이 서명한 국빈 방명록에도 손기정은 [손긔졍 KOREA]라고 적었다.

이런 그의 행동은 현지의 일본 선수단에서도 문제가 됐다. 본부 임원은 한자 대신 한글로 사인하는 이유를 기정에게 따졌다. 그에 대해 손기정은 “한문으로 이름을 적어주는 것보다 한글의 글자 획수가 훨씬 적어서 한글로 썼소”라고 대답해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일본 선수단은 이 문제를 더 확대하지 않고 덮어 버리기로 했다.

일본 고등계 형사도 이런 손기정의 동향을 그냥 놓칠 리가 없었다. 당시 상부에 보고된 내용은 이러했다.

“손 선수는 독일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수많은 외국인의 사인 요청에 응하면서 [KOREA 손기정]이라고 적는 등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두 선수는 일반 조선인의 접근을 쉽게 만들려는 듯 선수 대열에 마지막에 자리 잡으면서 일부 민족주의자의 뜻에 영합하려는 것 같은 행동이 있었다.”

어찌보면 위험할 수도 있는 이런 행동을 통해 그는 금메달 시상식에서 말하지 못한 비애와 울분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이 손기정 나름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을까?

손기정의 사인 한 장

손기정이 우승한 지 82년이 지났고, 황영조가 우승한 지 26년이 지났다. 그리고 손기정이 90세로 세상을 떠난 2002년으로부터 16년이 지났다. 나는 손기정의 사인 한 장을 보고 있다. 몇 년 전 수집한 것이다.

[사진] 올림픽 마라톤 우승 3일 뒤 손기정이 현지에서 해 준 사인이다.(박건호 소장)

크기 고작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3.5센티미터 조그마한 종이에 남긴 사인이다. 여기에는 손기정의 이름이 한글(손긔졍)과 영어(Kichung Son)로 쓰여져 있다. 영어 이름도 ‘Kitei Son’이라고 쓰지 않았다. 이름 밑에는 ‘KOREAN’이라고 썼다. 이 여섯 자가 사인에 담긴 글자 중 가장 크게 쓰여 있다. 자신이 ‘korean’이라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인 용지의 제일 위에는 ‘(1)marathon(2.29.19)’이라고 썼다. (1)은 1등을 했다는 뜻일 것이고, 괄호 속의 숫자는 그의 기록을 쓴 것이다. 그리고 이 사인의 오른쪽 제일 아래 있는 ‘12.8.1936’은 사인을 해 준 날짜일 것이다.

손기정은 이 사인을 그가 우승한 지 3일 뒤에 사인을 요청하는 어느 독일인에게 해 준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올림픽 우승 직후 손기정이 현지에서 남긴 사인의 수가 정확히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8월 13일자 1점과 8월 15일자 1점이 있다. 물론 더 남아있을 수는 있으나 현재까지는 그렇다. 내가 소장한 사인은 그것들 보다 빠른 8월 12일자 것이다.

[사진] 현지에서 해 준 것으로 현재 공개되고 알려진 다른 사인으로 1936년 8월 13일 해 준 것도 있다. 둥근 원 부분이 손기정 사인이고, 그 왼쪽에 하퍼의 사인도 보인다. (왼쪽, 인터넷 사진) 손기정의 또 다른 사인으로 1936년 8월 15일 해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9년 뒤 이날 조선이 광복될 것을 손기정은 몰랐을 것이다.(오른쪽, 인터넷 사진)

이 사인의 제일 왼쪽 앞에 쓰여진 숫자 ‘98’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등번호일까? 그의 등번호는 382이므로 그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추정컨대 ‘98’의 글씨체가 손기정의 글씨체와 다른 것으로 보아 사인을 받은 이가 이 사인을 정리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의 사인 컬렉션 중에서 98번째라는 뜻일 것이다.

사인 뒷면에는 “KICHONG SON. MARATHON WINNER 1936 OLYIMPICS”라고 연필로 쓴 글씨가 보인다. 사인을 받은 이가 쓴 것일 것이다. 원래 어디에 붙여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서 떼어 낸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명함 크기보다 작은 이 종이 조각 하나에서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갔던 ‘고개숙인 챔피언’의 비애와 슬픔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크고 무거웠는지 알기에 황영조가 우승했을 때 그 노쇠한 챔피언이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감격스러워했는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때 성화를 들고 스타디움에 들어서면서 그가 덩실덩실 춤추듯이 뛰었던지 그 심정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황영조도 이미 은퇴하고, 손기정도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지금, 이 종이 한 장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그래서 크고도 무겁다.

오늘은 2018년 8월 9일이다.

[사진] ‘울보 손기정’. 광복 직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해방 경축 종합경기 대회에서 태극기를 든 기수 손기정은 감정에 북받친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위) 1996년 가을 강형구(당시 손기정기념재단 공동이사장)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한 손기정옹이 강 화백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 화백은 캔버스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젊은 손기정의 얼굴을 담았다.(아래, 강형구 화백 사진)

<참고문헌>

천정환, 『끝나지 않은 신드롬』 푸른역사, 2005

손기정,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학마을B&M, 2012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제패 60주년 기념집 『겨레와 함께 뛰었다 손기정. 그 힘찬 발걸음』 1996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강남대성학원의 역사강사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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